<2022.2.5.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 토요일>
<마르6,30-34>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라 여기며, 그렇지 않을 때는 본인은 필요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는 엄마에게,
부인은 남편에게 남편은 부인에게,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 평가하며 세상을 비판 비난 불평 잔소리 위협하기 벌주기 통제위한 상주기 등으로 그러한 통제를 이어가려 합니다.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당신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시고,
마귀를 쫒아내고, 병자를 낫게하는 능력과 힘을 주시며,“
기뻐하며 돌아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전하면서도 상대편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편을 사랑하고, 상대편이 나도 사랑하게 하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라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맙니다.
따지고 보면 악마가 예수님을 높은 곳에 데리고 가서 세상적 영화와 권세를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라고 유혹한 지배욕에 대한 힘 성취의 욕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 대신에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을 내가 내 말로 통제함으로써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자유의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힘을 행사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반발과 저항을 유발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나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숨’(창세2,7)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를 쫒아내거나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은 인간이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귀를 쫒아내거나 병자를 고쳐줄 때
하느님께 의탁하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발동했고,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우리의 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활동과 봉사로 쓰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쉬라고 하십니다.
활동과 외딴 곳에서의 쉼,
이것이 우리 신앙적 삶의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아가는 방법은?
기도하였으면 활동을 하고,
활동을 하였으면, 기도를 합니다.
<Mark6,30-34>
30 The apostles gathered together with Jesus and reported all they had done and taught.
31 He said to them, "Come away by yourselves to a deserted place and rest a while." People were coming and going in great numbers, and they had no opportunity even to eat.
32 So they went off in the boat by themselves to a deserted place.
33 People saw them leaving and many came to know about it. They hastened there on foot from all the towns and arrived at the place before them
34 When he disembarked and saw the vast crowd,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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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1장
운, 친밀한 관계, 그리고 좋은 세계
운은 내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내 경우, 6학년 때 쉐안 선생님한테 배우게 된 것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선생님과의 1년 동안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학교공부를 열심히 잘 했었다. 그러나 그분의 사진이 나의 좋은 세계(quality world)에 들어와 자리한 것은 운이 아니었다. 내가 그분을 아주 특별한 분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우리의 좋은 세계는 우리 삶의 준거가 된다.
좋은 세계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후 우리의 기억 내에 형성해 가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
두 살 정도 될 때쯤이면 이 세계는 욕구충족에 관한 정보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런 정보는 대체적으로 사진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변화 내지는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 쉐안 선생님을 다시 현실로 데려올 수는 없지만 그 선생님의 사진은 아직도 나의 좋은 세계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좋은 세계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세 종류의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쉐안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이다.
두 번째, 사물들인데, 예컨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컴퓨터와 같은 물건이다.
세 번째, 종교나 정치와 같은 신념체제이다.
사람인 경우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많은 사람들의 좋은 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이나 신념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할 수 있으나 이것들을 우리의 좋은 세계에 집어넣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기분 좋게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친밀한 관계 중에서 가장 분명히 눈에 띄는 친밀한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친밀한 관계이다. 이것은 배우자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性)적인 친밀한 관계일 수도 있고, 자녀, 부모, 가까운 친척과 같이 성과 관련이 없는 친밀한 관계일 수도 있다. 기분이 좋고 쉽게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부통제가 끼어들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은 친밀한 관계도 있다. 그것은 친구간, 교사와 학생 간, 동료 간에서처럼 두 사람 간에서 생겨나는데, 서로는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러나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관계이다. 이들 관계는 배려하는 마음과 격려로 충만 되어 있으며, 외부통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조안, 배리, 로저 씨의 경우는 예외가 될지 모르지만, 다른 모든 집단 참여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전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친밀한 관계와 외부통제가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쉐안 선생님과 가졌던 그러한 친밀한 관계는 언제든지 형성될 수 있다. 예전에 알지 못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반드시 아주 오래 지속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가 일단 형성되면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두 사람간의 신뢰감은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마치 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 펼쳐지는 듯 힘이 솟음을 느끼게 된다./
내 진로에 있어서 첫 번째 계기는 쉐인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쉐인 선생님께서 “너 정말 내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었니?” 하고 물으셨다. 뭐라고 할지 몰라 그냥 “내 생각으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말 그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9장에서 본 바와 같이 나의 창의성이 그러한 질문을 하는 목소리를 내 뇌의 청각 피질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거북해 하는 것을 알아차리시고는 곧 바로 “괜찮다. 아주 잘한 대답이었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오늘 한 것처럼 손을 들면 돼.”라고 하셨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은 대화이었으며 다시는 그/런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 한 해 그 시간은 너무도 좋았다. 선생님의 모든 이야기를 마치 나에게 개인적으로 하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들었다. 나는 창의성을 발휘해서 아주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 때 ‘선생님에 대한 편견을 버리자. 선생님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선생님을 알아야 한다.’ 라는 표제로, ‘낙서 장’ 이라고 불리는 학교 신문에 실렸으며 학교나 집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내 진로에 있어서 두 번째 계기는 내 전공을 화학공학에서 심리학으로 바꿀 때였다.
공과 대학에서는 심리학 과목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원을 진학하기 전에 5과목의 학부과목을 들어야 했다. 그 때 한 과목을 헌틀리 학장님한테서 배웠었는데, 학장님은 나에게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물어보셨다.
나는 임상심리학 박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잠시 후 학장님은 의과대학으로 진학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어 보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하셨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정말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학부 성적이 의과대학으로 진학하기에는 너무 좋지 않았다. 학장님께서 “내가 아는 바로는 자네는 두 번째로 잘 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네.” 하셨다./ 헌틀리 학장님과의 이때의 친밀한 만남과 수업에서의 친밀한 관계는 내가 의과대학에 지원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나는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그 후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내 진로에 있어서 마지막 중요한 계시는 정신과 수련의 3년 차 시절, 나의 수련지도 담당 의사이었던 G.L. 해링턴 박사님과의 만남이다.
3년간 치료를 받고 있던 여환자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아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외상경험에 대해 매 년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였다. 어떤 심리치료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통해 관심 받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대체적으로 매년 레지던트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DSM-IV 진단을 받아 여러 개의 병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해링턴 박사께 그 환자는 정신적으로 아픈 것이 아니라 외롭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남편 및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였다. 해링턴 박사는 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우리 모임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분도 역시 정신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친밀한 만남이었다. 그 후 7년간 우리는 선배와 후배 학생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분의 후원을 받으며 기존의 독단적인 정신의학 체제에서 벗어나 나의 새로운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경험과 유사하게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감지하거나 심지어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종종 있는데 이를 때는 나 스스로 놀라곤 한다.
이런 경우에는 나는 내담자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였다. 즉 ‘마음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야기하여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안전할 것이다. 나는 판단이나 비평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든 매우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외부통제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실수를 하게 되면 그 즉시 사과하면서 나의 실수를 이용하여 외부통제를 설명해 주는데 사용하였다. 현재 7가지 치명적 습관인 비판, 비난, 불평, 잔소리, 위협하기, 벌주기, 통제위한 상주기 중 명 개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면 내담자들은 아주 쉽게 이해하였다.
외부통제의 7가지 치명적 습관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성(性)적인 관계는 점차 친밀성을 상실해 간다.
나의 경우, 친밀한 관계는 가까이 있다고 느끼며 나를 지지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격려해 주는 관계이며 생각만 해도 아주 기분이 좋은 관계이다. 그리고 성별, 나이, 성역할, 종교, 인종, 삶의 장소 등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는 어느 정도의 배려함 내에서는 서로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던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 같은 수준이나 위치에서 함께 노는 관계이며 쌍방 간에 힘의 차이가 없는 관계이다. 그리고 쉐안 선생님, 헌틀리 학장님, 해링턴 박사와의 관계에서와 같이 서로가 항상 필요하면 곧 만날 수 있는 관계이다./
앞장에서 몰리(섬유근육통을 앓고 있는 부인) 씨가 왜 자신이 완벽에 사로잡혀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때 나는 본 장의 내용을 읽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본장에서 우리의 좋은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다루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좋은 세계에 있는 어떤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하고 있는데, 그녀나 혹은 상대방 쪽에서 외부통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원하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좌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그녀의 좌절은 아마도 남편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에 경험하게 된 것일 수 있다. 남편을 통해 할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고 그 대신 자신을 통제하려고만 하고 있으며, ‘완벽하게’ 라는 말로 자신을 둘러쌓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다. 왜 당신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나를 제대로 대우를 해 주지 않느냐?’. 그러나 그녀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녀의 섬유근육통은 바로 이 점을 알려주려는 하나의 경고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만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 자신이 자신의 좋은 세계에 있는 자신에 대한 완벽한 사진을 덜 완벽한 사진으로 바꾸어야 한다. 동시에 남편에 대한 사진도 보다 현실적인 사진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녀가 좋은 세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으면 그 사진들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좋은 세계는 그녀가 창의적으로 만든 세계이다. 그 세계에 만들어 넣은 사진을 좀 덜 요구하는 사진으로 바꾸어 자신과 남편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친구가 수년 전 나에게 반복해서 들려준 말 즉, ‘대안에 대해 생각하라’ 를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그녀가 자신의 좋은 세계에 집어넣은 사진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녀만이 그 사진들을 바꿀 수 있다.
배리 씨 부부는 점차 관계가 좋아지면서 자신들의 좋은 세계에 있는 서로에 대한 사진과 아들 조쉬에 대한 사진을 바꾸었던 것이다.
대안에 대해서 생각하면 좋은 세계의 사진을 바꿀 수 있다. ‘좋은(Quality)’이라는 개념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경직된 세계를 고집하면 좋은 세계의 사진들은 내 재산이 아닌 취약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으로서 ‘옳다’ 혹은 ‘도덕적이다’ 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를 들면,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을 자신의 좋은 세계에 넣어 두고 있을 것이며,
사업 관리자는 ‘창의적’인 회계방법을 좋은 세계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3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과 전혀 관련되지 않은 쾌락적인 사진들이 사람과 관련되는 사진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될 수 있으나, 이런 경우 결과적으로는 큰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기분이 나쁠 때 우리는 곧 바로 좋은 세계로 눈을 돌려 기/분을 좀더 좋게 하기 위해서 사진들 중 하나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 살펴본다.
어린아이는 행복하지 않을 때 곧바로 자신의 좋은 세계에 있는 사람, 대부분 엄마를 먼저 찾을 것이며 다음으로 아빠, 그리고 다른 사람들(할아버지, 할머니, 형제 자매 등) 순으로 찾을 것이다.
성장하여 사랑과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 좋은 세계에 넣어둔 이성들 중에 그들의 좋은 세계에도 ‘나’라는 사람이 들어 있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 사람을 찾게되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좋은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외부통제를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쉽지가 않다.
우리가 좋은 세계에 물건들의 사진을 넣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것들을 현실 세계에서 획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때가 많다.
발달 초기에 우리 인간은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좋은 세계를 채워가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큰 광고회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들을 우리의 좋은 세계에 집어넣기 위해서 선전하고 있다. 우리의 생존, 사랑, 힘, 자유,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상품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념체제 또한 광범하게 선전되고 있다.
정치적 신념, 종교적 신념, 도덕적 신념, 건강에 관한 신념, 행복에 관한 신념, 가족에 관한 신념 등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득하다.
선택이론은 행복을 원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신념체제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던 당신의 좋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가 당신의 행복 혹은 불행을 결/정한다.
부모는 자녀의 좋은 세계에 자신들이 자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자녀가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학생의 좋은 세계에 자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정이나 학교는 이렇게 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치명적 습관인 외부통제의 본산이 되고 있다. 즉, 학교는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는 글을 부모에게 보내고 있다. 이러한 비난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학교와 부모는 아이들을 처벌하는 쪽으로 서로 지원하고 있다. 약물중독, 비행, 원하지 않는 임신 등과 같은 현상은 아이들의 좋은 세계 내에 선생님이나 교육을 집어넣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우리의 좋은 세계에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항상 많은 사람들(가족, 친구, 동료 등)을 나의 좋은 세계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들의 좋은 세계에 내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장담은 할 수 없으나,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외부통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좋은 세계에도 비슷한 유형의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들 중 몇 사람의 좋은 세계에 당신이 자리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라.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 집단의 베브(우울증 환자이며 17살의 딸인 브랜디의 어머니) 부인을 검토해 보자.
베브 씨의 말에 근거해 볼 때,
딸은 자신(베브 씨)의 좋은 세계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그 당시는 서로 좋은 관계가 아니더라도 분명히 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딸의 좋은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녀가 딸에 대해 한 이야기, 즉 ‘딸은 자신을 싫어하며 자신도 이제는 그것을 믿게 되었다’ 고 한 것을 보면 그녀는 딸의 좋은 세계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직 딸의 좋은 세계 안에 그녀가 있을 것으로 본다. 자녀가 부모를 자신의 좋은 세/계에서 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계속해서 딸에게 외부통제를 사용한다면 딸의 좋은 세계에서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앞장에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엄마인 베브 부인은 딸에게, 딸은 엄마인 베브 부인에게 외부통제를 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오는 외부통제를 아주 싫어하고 있습니다. 딸은 화내기를 하고 있고 부인은 우울해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인이 우울해 하면 할수록 딸은 더 화내기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딸은 부인이 힘 빠지면 빠질수록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딸이 원하는 것 아닌가요? 자기 마음대로 하는것?”
내 말을 듣고 베브 씨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정말 딸과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녀를 우리의 좋은 세계에 넣을 때 우리가 그 아이를 사랑하니까 그 아이도 우리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바로 외부통제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그런데 베브 씨는 외부통제 사용을 중단하라는 말을 듣고, 전 보다는 좀 덜 화를 냈지만, 저항하였다. 그녀의 생각은 만약 딸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이다.
로저 씨 부부와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와의 관계에 관한 사진에 부모의 통제를 포함시키고 있다./
젤마 씨와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아들 짐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온 정성을 다해 아들을 정신병 문제가 있기 전의 상태(과거에 가졌던 아들에 대한 사진)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한 사람에게 외부통제를 사용하게 되면, 특히 그 사람이 우리와 가까운 사람(가족, 친척, 친구 등)일 경우, 그 사람은 저항을 할 것이다. 그 관계가 가까울수록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더욱 저항을 할 것이다. 셀마 씨 아들의 정신병 증상은 그 아들이 가지고 있는 저항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두툼한 DSM-IV 책을 보라. 그 안에는 실로 수많은 저항행동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경고: 정신과 치료가 당신의 정신건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생활심리 시리즈 31, William Glasser, M.D. 저, 박재황 역, 도서출판 계림, 2015,p197-209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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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계명
간음하지 마라
406 결혼한 사람도 정결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독신자든 기혼자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정결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2348-2349, 2394]
우리가 모두 결혼 생활로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삶을 살라는 부르심은 모두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내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 생활을 통해,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위한 자발적인 독신 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내어 줍니다. 모든 삶은 사랑에서 그(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20)/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결하게 산다는 것은 완전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결하지 못한 삶은 망가지고 자유롭지 못한 삶입니다.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유롭고 열렬하며 선합니다. 그는 사랑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강한 사랑의 원형이시기 때문에, 정결의 모법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1테살4,3-5)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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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절 여섯째 계명
간음하지 못한다(출애20,14)(신명5,18 참조)
“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마태5,27-28)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31)/
정결의 다양한 형태
->2348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정결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결의 모법이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3,27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자의 신분에 알맞게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 정결하게 살겠다고 약속하였다.
->2349 “정결은 각개인의 다양한 생활 상태에 따라서 구별되어야 한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더 쉽게 전념하기 위한 훌륭한 방법으로서 동정이나 봉헌된 독신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고, 또 모든 이에게 도덕률이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혼인하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36)/
나 독신으로 지내는 이들도 있다.”(신앙교리성, 선언 Persona humana, 11항: AAS 68(1976), 90-91면). 혼인한 사람들은 부부로서 정결을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금욕으로써 정결을 실천한다.
정결의 덕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내들의 정결이고, 다른 하나는 과부의 정결이며, 셋째는 처녀들의 정결입니다. 우리는 다른 형태들을 배제하면서 어느 한 형태만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규율이 풍부하다는 증거입니다.(성 암브로시오, ‘과부론’, 23: Sanct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pera, 14/1권(밀라노-로마 1989), 266면(PL 16, 241-242))(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37)/
간추림
->2394 그리스도께서는 정결의 모범이시다. 세례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분에 따라 정결한 생활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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