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교사의 전교조 고발 2탄
불법적단체행동 우려 단체행동권은 금지했는데도 노동자와 같은 행동 일삼아...
양보도 없고 희생도 없는 “개인주의 세대들”
[편집자 주] 한국 사립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mid.sahak21.or.kr)가 발행하는 133호 사학회보 4월호에 실린 정재학(전남 삼호서중)교사가 쓴 글 ‘현직교사가 이 시대 이단아 전교조를 고발한다 (上)’을 지난 12일 게재한데 이어 하편을 2탄으로 연재한다. 정 교사는 전교조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를 돌아보고 20년 이상의 교직생활을 통해 전교조를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헤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은 ´이 시대의 이단아 전교조를 고발한다´(하편) 전문이다.
4. 전교조는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
전교조 설립 목적을 보면,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서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참교육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교육보다는 교단에서 노동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때로는 교육의 범주를 벗어나 다른 사회단체들과 연대하여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및 좌파적 통일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이 나라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마디로, 전교조가 순수교육에 관심이 없는 단체임을 알려주는 여타의 행동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들의 참교육 논리는 해괴하기까지 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참교육이란, “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참세상이다. 이 참세상을 이루기 위해 하는 교육이 참교육이다. 고로, 참교육은 노동자를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전교조 교사들이 스스로 노동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간과(看過)해서는 안될 것이 이 노동자의 정체다. 여기에서 노동자는 노동과 기술을 습득하여 위대한 장인정신으로 자아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사회구성원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으로 보고, 적대의식으로 무장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한다. 이들은 과거 공산혁명 당시 보여준 피의 투쟁을 통해 가진 자의 것을 빼앗고 갈취하고자 하는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노당이 주장하는 부유세가 그것을 증명한다.
경쟁을 통한 발전보다는 능력의 차이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을 바탕으로, 물질의 공평한 분배를 선호하는 천박한 의식이 전교조가 부르짖는 노동자인 것이다.
하다 못해 우리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대가 돈에 눈이 어두운 행동을 하면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다. 전교조 눈으로는 정당하다는 그것이 평범한 서민의 눈 속에서도 허용키 어려운 오류가 있다면, 지금쯤 전교조는 자기 반성에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할 것이다.
나이 어리고, 철없는 미성숙한 자들(설립 당시 교육 경력이, 많아야 5-6년 된 젊은 교사들이 주축을 이룸)이 자기들만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재단하여 야기한, 모든 불행에 대해, 이제는 스스로 고백할 때다. 뜻있는 선배님들의 말씀을 옮겨 적는다.
“ 교사는 10년이 넘어야 가르치는 교과에 자신이 생기고, 20년이 넘어야 생활지도에 자신이 생긴다. 그 무렵이 되어야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자신만의 교수법이 생기고, 어떤 분노에 휩싸이더라도 애들을 가슴으로 보고 가슴으로 가르치게 된다.”
이제 겨우 걸음마도 걷지 못하는 어린 전교조 교사들이 이 땅의 수많은 위대한 교육선배들이 보여준 조언(助言)을 무시해버린 결과가, 오늘날 교단에서 바라보는 무너진 교실의 폐허이다. 애들이 싸우면 도망가 버리고, 대들면 숨고, 받은 만큼 가르치고 교실을 나가버리는 전교조 노동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긴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의하면 너는 너고 나는 나, 학생은 학생이고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인데, 어찌 나를 희생하고 학생을 위해 살겠는가?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하는 교육이 참교육일 수 없다. 아이들은 점점 흩어져 각자의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각자 자기의 뿔을 낸 사슴이 되어 저 높은 산정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너와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다. 완성된 교사가 어디 있겠는가? 비애와 슬픔, 실수로 가슴을 여미면서도 학생들을 사랑하는 눈을 거두지 않는. 조금만이라도 어려울 때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는 수줍음 많은 교사로 나는 살아가고 싶다.
5. 파르티잔식 조직 확장과 운용
전교조가 전교조 조직을 팽창 또는 유지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은 참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집단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가증스러운 것들이 많다.
과거 이 땅에서 잘못된 사상의 굴레를 쓰고 날뛰다 처참하게 비극을 맞았던 파르티잔들의 조직 확장과 운용은 참으로 비인도적인 점이 많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동지와 배신자 그리고 적을 대하는 그들의 서로 다른 모습은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붉은 피와 어울려 우리 문학과 민족의 뇌리(腦裏)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전교조, 이와 너무도 닮은 점이 많은 것이다.
조합원을 만드는 방법을 조금만 소개한다.
그들은 인사이동이 있을 시에는 연락망을 동원해서 전출 가는 학교 전교조를 동원해서 맞이하도록 한다. 누구누구가 가니까 맞이해라. 시골 같으면 직접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가기도 하고, 짐을 받아들고 거처까지 마련해 주면서 공을 들인다. 학교 업무분장에서부터 편리를 조정해 주고, 환영파티 등 매사에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가는 것이다. 자기 돈까지 아끼지 않고 써가며 돌봐주고 생일파티까지 열어주는 이상, 전교조 가입을 거절할 수는 없다. 지금 전교조 회원의 다수가 이 과정에서 들어간 것이다. 가입한 이상 이들도 새로운 조합원을 포섭하기 위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앞장선다.
위의 방법은 회원 수가 적을 때 초창기 시절에 드러나지 않게 끌어들이는 모습이고, 이후로는 업무에 대한 협조를 무기로 협박하는 방법도 있으며, 교장과의 불편한 관계를 빌미로 보호를 약속하며 끌어들이는 방법.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교사들에게 왕따를 시키는 방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자기들만 모이는 회의와 회식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차 마신다고 우르르 휴게실로 간 뒤 전교조 교사들이 빠져나간 교무실에서 혼자 남은 교사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하다 못해 병가를 낼려고 해도 누가 수업시간을 맡아주어야 낼 것 아닌가? 이 방법이 전교조가 가장 선호하는 회원 모집 방법이다. 왜 전교조가 급작스레 늘어났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탈퇴? 어느 누가 배신자라는 손가락질과 이후로 있을 왕따를 각오할 것인가.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누가 보호하고 협조해 줄 것인가? 탈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 그러면 이렇게 모집한 교사들을 전교조는 그냥 놔 둘 것인가? 절대 아니다. 조직의 일꾼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특히 신규교사를 훈련시킬 때는 반드시, 시위 현장이나 투쟁현장에 데리고 나간다. 그 시위에 참가한 교사들은 집단의 군중심리에 휩싸이고, 강한 동지의식으로 뭉쳐지게 된다. 만약 물리적인 충돌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그 동지의식은 거의 투사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시 적을 염두에 둔 사고와 행동을 가르친다. 그 예가 바로 교장을 사용자로 규정하는 일이다.
‘교장은 사용자다. 그러므로 전교조 교사들은 그 적을 향해 단결해야 한다.’
전교조의 존립에 적개심이 전교조 운용의 에너지로 작용한다. 따라서 교장은 노동자 교사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부르조아이며, 개혁을 위해 처단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착취자 교장이 있는 이상 전교조는 반드시 이를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교조의 왜곡된 사명감, 교단개혁의 허구성이 근본부터 밝혀지는 순간일 것이다. 전교조로부터 사용자, 착취자들로 규정된 교장선생님들은 전교조의 필요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적이다. 나아가 교육청 장학사들도 이 적대 속에서 신음하고 있고, 전교조는 신입교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교장과 장학사들을 먹잇감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교조 신입교사들에게 대상이 누구일지라도 적개심을 가르치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교육청 앞으로 몰려가고 있다.
전교조 교사들 중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교조의 요구를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개인의 의지와 자유로운 판단을 제약받고 있는 것이다. 배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은 말없이 때로는 악을 쓰며 교장을 향해 , 또한 교육청에서 눈 부라리는 대열에 함께 서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은 전교조로부터 압제를 당하는 비자유인들이다. 전교조로부터의 구속....멋모르고 호의를 받아들인 이후 전교조 교사가 되어버린 이후 그들은 행동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각계각층에서 전교조에 대한 불만과 회의가 일어나고, 전교조 행동에 정당성이 의문시되면서부터 조직 결속력이 이완되는 현상에 직면한 전교조가 조합원들에게 하달한 것이 교단개혁의 정당성이다. 전교조 교사들의 전교조에 대한 회의감(懷疑感)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사명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함인 것이다.
작금에 일어나는 전교조의 온갖 패륜적인 행위, 비도덕성, 성추행, 정치개입 등 온갖 반인륜 반교육적인 행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전교조는 굳굳하게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교단을 개혁하고 있다. 우리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자랑스럽다."
다시 말하면, 교장의 학대에 맞선다 또는 교단을 개혁시킨다는 당위성을 지닌 목표와 언행으로 조합원들을 위무(慰撫)하고 있는 것이다.
전교조가 우리에게 보여준 행동반경 속에는 항상 정치적인 언어와 행동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나 정치적이며 사상적인 줄기에 부딪히면, 그들은 정체를 숨기지 않고 거리로 나온다. 선거에 개입하고, 당을 지원하며, 사회주의 사상의 이념성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을 종합해 볼 때, 전교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혁명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그들이 순진한 전교조교사들을 교단개혁이라는 말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전교조 교사들이 전교조의 궁극적 목적이 사회주의 혁명에 있음을 안다면, 그 누가 전교조에 있을 것인가. 전교조는 조합원들에게 교단개혁의 정당성을 불어넣어주고 거기에서 보람을 찾게 하는 한편 자신들의 의도는 감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교조 대부분은 그런 허구적인 사명의식으로 불타고 있다.
한마디로 속고 있는 것이다.
"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먼저 속여라." 손자병법의 군쟁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적을 속여야만이 형세를 아군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며, 전쟁 상황을 아군의 뜻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맺는말
전교조는 지금 민노당과 더불어 예비군제 폐지ㅡ 국방예산 감축 - 미군 철수 - 통일운동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60년 전 이 땅의 빨치산들이 행하였던 그대로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교사의 입으로 미군철수가 나오고, 민족자주 통일이라는 구호 속에서 우리의 국방부터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목적은 교단의 학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통일론에 존재의 가치를 두고 있으며, 그러므로 학생의 학력제고보다 국가방위력을 약화시키는 주장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교조 교사들은 본인들도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의 본의 아닌 동조자가 되고 있는 현실을 두고, 대부분 선량한 전교조 교사들은 교단개혁이라는 말 속에서 깜박 그 정체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교사가 악쓰고 게거품 물면서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을 위대한 투쟁이라 하는, 또한 투쟁이 절대선으로 인식되면서 학생들도 동원되는 상황. 그리고 일부 전교조 교사들의 물질지향적인 이기성으로 인해 참된 가슴을 상실한 아이들과 노동자임을 내세워 자기 편리만 도모하는데 이어서 교사를 교사로 보지 않은 세태. 존경이 사라진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교실의 공허.
전교조 교사 몇몇이 좋다고 해서, 전교조 모두가 좋다는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우리는 실재하는 많은 증거들로부터 깨닫고 있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합성의 오류라고 한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전교조가 내세우는 개혁의 한 면만 보지 말고, 집단이 추구하고 실행하는 전면과 후면, 측면 모두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생각해 보라.
미군철수를 주장하며 애들을 길거리로 몰고 나가는 의도가 순수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전투적인 혁명노선을 가르치는 것이 타당한 행위인가? 어찌하여 받은 만큼만 가르친다 하는가? 교단이 장사를 하는 곳인가, 아니면 품 팔아 먹고 사는 곳인가. 우리 소중한 자식들에게 부모의 허락 없이 가르치는 교육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언제 반미를 가르치라 하였는가.
생각해 보라.
지금 우리의 교단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비교육적 투쟁이 전교조에 의해 수시로 자행되고 있다. 언제까지 두고 보고만 있어야겠는가.
지금 학교 점령을 위해서, 사상의 ‘해방구’를 만들기 위해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 교단은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