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636호]
황금 동전이 쌓이는 의자
한명희
괴테가 앉았던 이 의자 셰익스피어가 앉았던 이 의자를 내어드리지요
카프카가 앉았고 도스토옙스키가 앉았던 이 의자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눈 좋은 목수가 동굴에서 해저에서 꿈속에서 나무를 골라냈습니다 오르페우스의 후예들이 의자에 돋을새김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자식들이 의자를 지켰습니다
당신들이 몰려오자 이 의자가 황금으로 물드는군요
좋습니다 내어드리지요 의자 위에 황금 동전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달려오자 영문 모르는 사람들조차 뛰기 시작합니다
의자가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를 복제합니다 의자가 늘어납니다 황금 동전이 그득그득 쌓입니다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이 의자를 보들레르가 앉았고 두보도 앉았고 백석도 앉았던 이 의자를 당신들께 내어드리겠습니다
- 『꽃뱀』(천년의시작, 2018)
*
올해도 참 많은 시집을 읽었는데, 좋은 시집도 많았는데,
그중에서 한명희 시인의 시집 『꽃뱀』도 무척 좋습니다.
시집의 느낌을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덤덤한데 뭉클하다. 시크하면서도 시니컬하다. 두루뭉술한 듯 날카롭다."
궁금하신 분들은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꼭 사보시기 바랍니다.
시집 속에서 한 편 띄웁니다. '황금 동전이 쌓이는 의자'
오늘은 제 이야기보다는 이 시를 읽고 떠오른 故 김남주 시인의 시 두 편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부르조아 새끼들의 위선이 거만이 구역질나서 보들레르는 / 자본의 시궁창 파리 한복판에 악의 꽃을 키웠다 / 랭보는 꼬뮌 전사의 패배에 절망하여 문명의 절정 빠리를 떠났다 / 시에다 똥이나 싸라 침을 뱉고 / 대한민국의 순수파들 절망도 없이 / 광기도 없이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 (중략) / 에끼 숭악한 사기꾼들 / 죽으면 개도 안 물어가겠다 / 그렇게 순수해가지고서야 어디 씹을 맛이 나겠느냐"
- 김남주, 「예술지상주의」 부분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 삶인 것이다 / 파란만장한 삶 / 산전수전 다 겪고 /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 김남주, 「시인은 모름지기」 부분
'황금 동전이 쌓이는 의자'를 통해 한명희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도 김남주 시인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 속에 나오는 '당신들' 속에 혹시 나도 포함된 것은 아닐까.
공연히 붉어져 거울을 들여다 보게 되는 아침입니다.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말입니다.^^
2018. 12. 24.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첫댓글 독일의 괴테하우스를 간 적이 있는데
그 오래전의 시대에 삼층인지 사층인지 높은 건물이었고
각 층마다 유품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책장에 책이 그득하고 삼층에서 뜰을 내다보는 창문 밑에 의자가 놓여있었던가요.
괴테하우스 둘러보는데 돈을 받으니 의자에 황금동전이 쌓이는 건 맞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