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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史 원문보기 글쓴이: Death-Ripple
김 차 규(명지대학교) I. 머리말 III. 외부정책 II. 내부정책 1) 샤를르마뉴와 교황청과의 관계 1) 종교정책 2) 불가리아와 아랍과의 관계 2) 행정정책 IV. 맺음말 I. 머리말 헤라클레이오스 왕조(610-711)가 찬탈, 무정부 상태를 거쳐 반란에 의해 종식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이사우리아라는 새로운 왕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왕조를 세운 레오 3세(717-741)는 717년에 있었던 아랍인들의 콘스탄티노플 포위공격을 잘 막아냄으로써 칼리프와 휴전조약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침략은 언제 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방어가 필요하였다. 게다가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모반, 시실리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인 세르기우스(Sergius)의 반란이 연이어 지자 중앙집권화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되었다. 이에 나타난 중요한 개혁이 테마제도의 강화와 재조직이며 성상파괴주의와 에클로가(Ekloga)1)는 이 개혁의 일환으로 나타났다. 성상파괴주의는 새로운 종교 통합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종교 통합 시도는 국가의 중앙 행정에 전권(全權)을 부여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기독교와 유대교와 모슬렘 교도들 간의 불협화음을 제거하고 비(非)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발을 쉽게 들여놓을 수 있게 함으로써 제국에 충성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레오 3세는 군대의 힘만을 높이 평가했으며, 교회를 하나의 단순한 보조자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신학을 하나의 정치적인 요소로 생각했다. 이러한 레오 3세의 성상파괴 정책은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5세(741-775) 시대에 와서도 교황청을 자극하면서까지 계속해서 수행되었다. 그러나 성상파괴 정책은 콘스탄티노스 5세가 그의 아들 레오 4세(775-780)의 배후자를 잘못 선택함으로써 실패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스 5세는 그의 아들의 결혼을 위해 페핀의 딸 기셀라(Gisela)를 선택하고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765년 환관 시네시오스(Synesios)와 황실 경호 장교인 안티모스(Anthimos)를 페핀에게 보냈으나 교황의 반대, 만족에 대한 비잔틴인들의 편견 그리고 766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스 5세와 서방간의 불화로 말미암아 실패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스 5세는 미인 경연대회를 통해 아테네 출신의 이레네를 그의 아들의 배후자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그의 실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레오 3세로부터 남편인 레오 4세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 제국을 굳건하게 잘 지켜온 이사우리아 왕조의 정책을 버리고 성상숭배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 외에도 그녀가 여러 섭정 황후들을 제치고 비잔틴 최초의 여제가 되었다는 점과 레오 3세 이후 미카엘 3세(842-867)에 이르는 1세기 반동안 비잔티움의 모든 황제들이 아시아 출신인데 반하여 이레네는 발칸반도 출신이라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이러한 점 외에도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레네는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이레네는 비잔틴 최초의 여제였다는 점과 성상숭배 정책을 실시하여 훗날 성자의 한사람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연구는 제1차 성상파괴 논쟁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 종교문제와 관련해 성상파괴 정책을 철회하고 성상숭배 정책을 실시한 여제로 간략하게 기록되어져 왔다는 것이다.2) 이처럼 그녀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가 없는 이유는 787년 종교회의에 대한 791년 프랑크 왕국의 비평에서도 보이듯이 이레네가 여자라는 편견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레네에 대한 연구는 아주 드물며 비평을 곁들인 전문연구서는 없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쉬펙(Speck)의 저서인 "콘스탄티누스 6세"3)는 이레네에 대한 많은 내용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레네에 대한 연구서로 볼 수는 있으나 이 저서는 콘스탄티누스 6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레네에 대한 전문 연구서로 볼 수 없으며, 도미닉 바르브(Dominique Barbe)의 저서인 "비잔티움의 이레네"4)는 제목 자체로 보아서는 이레네에 대한 전문 서적인 것 같지만 이 저서의 저자는 비잔틴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지중해 세계 특히 갈리아의 기독교와 정치권력을 연구하는 연구자라는 점과 저서의 내용으로 볼 때 간간이 비평적인 내용이 보이기는 하나 비평서라기 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처럼 주(註)가 거의 없는 이야기체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문 연구서로 볼 수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본인은 이레네를 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본 연구는 먼저 일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레네의 종교적인 입장을 소개함과 동시에 이 문제를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의 대립이라는 차원에서 서술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본 연구는 일반적으로 잘 다루고 있지 않는 이레네의 비잔틴 제국 내의 행정정책과 외부 정책 즉 샤를마뉴와 교황청과의 관계, 불가리아와 아랍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행정정책은 소아시아에 치중되어 있는 군사력을 어떻게 발칸반도로 확대 개편하여 슬라족을 진압하면서 발칸반도에 테마제도를 설립하게 되었는지에 촛점을 맞추고, 대외 정책은 781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스 6세와 샤를마뉴의 딸 로트루드(Rotrud)와의 결혼약속 사건과 신으로부터 인간을 지배하도록 임명받은 신성한 인물로 여겨지는 비잔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샤를마뉴의 대관식에 대한 이레네의 태도를 중심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II. 내부정책 1) 종교정책 775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죽자, 성상파괴 운동의 절정은 지나갔다. 그의 아들 레오 4세는 성상파괴의 노선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의 종교정책은 온건했다. 바로 이 온건 정책은 훗날 성상숭배 정책으로 돌아서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당시 허약한 체질이었던 레오 4세는 그의 형제들이 부황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보낸 신호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군대의 요청에 의해 776년 나이어린 콘스탄티노스 6세(이 당시 5세)를 공치제로 삼아 계승권을 확정했다.5) 780년 2월 6일 니케타스(Nicetas)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파울로스(Paulos) 4세가 총대주교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성상파괴에 대한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파울로스는 성상을 숭배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으며, 780년 4월 레오 4세는 황비의 방에 성상을 몰래 들여다 놓았다는 이유로 6명의 황궁환관들을 태형에 처했다.6) 성상숭배자인 테오파네스의 연대기는 이들을 순교자로 간략하게만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레네를 옹호하고 있다. 이 연대기에는 음모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레오 4세의 병이 성 소피아 사원에서 썼던 왕관에 의해 전염되었다고 말하는 점과 레오 4세가 이레네를 유배보낸 후 얼마 있지 않아 780년 9월 8일 갑자기 사망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780년의 레오 4세의 사망은 석연찮은 점이 있다. 달리 말해 레오 4세는 독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레오 4세의 사망은 제국정치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성상을 숭배하는 아테네 출신의 이레네가 나이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위해 섭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섭정 40일째가 지나자 일부의 원로원 의원들과 고위 관료들이 레오 4세의 형제였던 니케포로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7) 이 음모는 성상 적대파 세력들이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음모는 진압되었지만 다음해인 781년 시실리의 스트라테고스인 헬피디우스(Helpidius)가 반란을 일으켜 또 다시 이를 진압해야만 했다.8) 결국 이러한 진압으로 국가를 계속 통치할 수 있게 된 이레네는 성상문제에 대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50년 동안 지속되어온 성상파괴주의에 대해 급작스러운 정치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 당시 황궁이나 테마의 관료들은 성상파괴주의 정책을 따르고 있었고, 군대는 콘스탄티노스 5세에 대한 향수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주교들이 히에레이아(Hiereia) 공회의의 결정을 따르고 있었다.9) 이에 이레네는 내부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내적으로는 이들 세력과 협상하면서10) 다른 한편으로 아래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외적으로 샤를마뉴와 평화관계를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교황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레네의 성상 숭배의 부활계획은 784년 8월 31일 파울로스 총대주교가 사임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이 당시 이레네는 황궁에서 회합을 소집하고 신학을 알고 행정적인 경험이 있는 자신의 비서였던 타라시오스(Tarasios)를 총대주교로 임명했다.11) 물론 이 임명은 교회의 법규상 무자격 취임이다. 그러나 이레네의 입장에선 성상숭배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타라시오스와 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성상을 반대하던 궁정직원들을 성상숭배자들로 대체했으며, 성상파괴에 최종적·교리적인 치명적 반격을 가하기 위한 공회의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반대편을 과소평가했다. 왜냐하면 786년 8월 7일 그녀는 아들과 함께 배석한 공회의를 콘스탄티노플의 사도교회에서 개최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항상 충성을 바쳤던 근위부대가 콘스탄티노플의 사도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모임을 해산시켜 버렸다.12) 그후 이레네는 아랍인들에 대한 한 차례의 원정을 실시하면서 이 근위부대를 소아시아의 전선으로 보내고 성상을 숭배하는 트라키아의 충직한 상비대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787년 5월 니케아에서 공회의를 소집한다는 초대장을 제국내의 주교들에게 보냈다. 공회의를 니케아에서 소집하기로 결정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아직까지 성상파괴자들과 성상숭배자들의 소란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니케아가 첫 만국공회의(325년)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니케아 공회의(787년)는 공식적으로 367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여 8번에 걸쳐 회합을 가졌다. 787년 10월 23일에 열렸던 8번째 회합은 콘스탄티노스 6세와 함께 이 회합에 참석한 이레네가 이 회합을 주도했다. 그녀는 주교들에게 연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성상숭배에 대한 칙령이 공회의에서 승인을 받아야 된다고 요구했다. 결국 이 공회의는 성상을 금한 754년의 히에레이아(Hiereia) 공회의를 부당하다고 선언했고, 성상화된 인간을 향하는, 그리고 예배(latreia)와는 구분되는 성상들의 숭배(proskynesis)를 결정했다. 이 공회의의 특징은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성상숭배에 대한 과거의 모든 기록을 모았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제2차 성상파괴 당시 성상숭배자들을 위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는데 당시에 사용했던 기록들 중 특이한 것은 전기물이나, 기적에 관한 문집이다.13) 물론 이것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법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는 이 공회의 교회법규 3조에 군주로 하여금 주교들을 선택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다.14) 셋째는 엄격한 수도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부들이 그때까지 성상파괴적이었던 주교들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단호히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적인 태도는 향후 비잔티움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계속될 내부 분열을 가져왔다. 교회법 규정들을 엄격하게 준수하고자 하는 급진적 수도사들의 파인 열심파는 정치적 상황에 적응할 줄 알며 세속권력이 정통파 신앙을 고수해주기만 한다면 그 권력과 기꺼이 협력하고 모종의 양보도 마다하지 않는 온건파의 태도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성상숭배 정책 자체는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의 대립이라는 차원에서 발칸반도를 옹호하는 정책으로서 중앙 정부의 권력은 성상을 숭배하는 발칸반도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위의 관용정책은 성상파괴주의를 표방하는 소아시아 지역과 성상숭배를 표방하는 발칸반도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니케아 공회의가 기독교 내의 통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비잔틴 통치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역대의 비잔틴 황제들은 기독교 내의 통합문제가 국내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신학(헤노디콘, 엑테시스)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이 문제에 전력을 투구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상 적대적 세력문제가 확실히 극복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세력의 존속은 이레네와 콘스탄티노스 6세간의 대립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콘스탄티노스가 통치 능력이 있는 연령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심찬 황태후는 권력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자 성상 적대적 세력들은 젊은 황제에게 모여들었다. 이에 790년 초 이레네는 이들 세력들을 진압하고 자신을 제1인자로 하는 공식적인 지위를 유럽에서 파견된 수도의 군대에 서약을 받아냄으로써 합법화시켰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중심으로한 소아시아의 군대는 이레네의 계획에 거세게 저항했다. 결국 군부는 790년 10월 콘스탄티노스 6세를 단독 지배자로 선포함으로써 이레네를 황궁에서 쫓아내었다. 그후 나약한 성품의 황제는 황태후 지지자들의 여론에 밀려 이레네를 황궁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이어서 불가리아와의 전쟁의 실패, 숙부들에 대한 적대감, 과거에 자신을 도와준 아르메니아콘의 스트라테고스인 알렉시오스를 장님으로 만든 사건, 그의 옛 지지자들을 적으로 삼아 감행했던 원정은 성상 적대적 세력으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곧이어 795년 1월 7년 전에 결혼했던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아내를 쫓아내고 정부인 궁녀 테오도테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성상숭배자들과도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열심파의 급진적 수도사들이 부정한 황제에게 격렬하게 반대했는데 이 당시 콘스탄티노스 6세는 이들 열심파 지도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열심파와 황제를 옹호하는 총대주교 타라시오스 사이의 불화를 극도로 첨예화시켰다. 결국 모든 지지를 잃은 콘스탄티노스 6세는 자신의 어머니 이레네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후 이레네는 단독통치를 하는 가운데 종교정책을 잘 펼쳐 보이고자 하였으나 수도사들이 기대했던 만큼의 상처달래기와 원상 회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도사들에게는 그녀의 정책이 단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보상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15) 2) 행정정책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레네의 정책 중에서 눈에 띄는 발칸반도 문제와 문예부흥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당시의 행정정책을 살펴보면 이레네의 일반 행정정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궁정에는 음모의 분위기가 지배했는데 스타우라키오스와 아이티오스는 서로 우세를 다투었다. 그리고 이레네는 국가예산을 고려하지 않고 제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국민들의 재정적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수도원과 수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기에 문제가 되었다. 수도원은 이레네의 인기의 초석이라는 이유 때문에 수도 주민들은 불안한 정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레네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로고르스키에 따르면 이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이 지불해야 했던 고율의 도시세가 폐지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 항구들인 아비도스와 히에로스에서 징수해오던 것으로 비잔티움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수출입 관세 역시 낮추어졌다. 물론 수도 주민들은 이 조치를 환영하였으며 스투디오스의 테오도로스 역시 이레네의 너그러움을 높이 찬양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권력의 주요 토대를 이루던 비잔티움 국가의 재정제도는 이러한 너그러운 조치들 때문에 큰 혼란에 빠졌다.16) 그럼 여기서 발칸반도 문제를 살펴보자. 7세기에 들어오면서 제국이 겪었던 가공할 위기 즉 군대의 반란, 시민 전쟁, 아랍인들과, 슬라브족, 아바르족, 불가리아인들의 침략은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지방 도시들이 타격을 받았는데 이러한 혼란은 지방 도시의 자치(중앙정부에서 임명한 자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치도시를 말한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Kherson이 있다)에 종말을 가져오면서 테마제도를 창설하게 만들었다.17) 본격적인 테마제도는 이사우리아 왕조에 들어와서 만들어졌는데, 이레네 시대에는 발칸반도에 새로운 테마가 만들어졌다. 아테네 출신이었던 이레네는 정권을 손아귀에 쥐자 유럽속주의 문제에 매달렸다. 6세기 이후로 슬라브족은 발칸반도 남쪽으로 이주해왔다. 이 당시 테살로니카, 코린토스, 아테네, 테베, 라리사와 같은 도시들은 결코 함락을 당하지 않았지만 발칸반도는 전체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화폐는 거의 유통되지 못했으며, 많은 주교구들이 침입을 당하고 수도(콘스탄티노플)와의 연락은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제국 정부는 수도에서 테살로니카에 이르는 지역을 가로막고 있었던 슬라브족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레네와 콘스탄티노스 6세 아래에서는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783년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장관은 불가리아에 의해 위협을 받았던 트라키아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을 뿐 아니라 테살로니카와 발칸반도 중부를 가로질러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포로와 노획물을 얻었다.18) 스타우라키오스의 개선 축하는 콘스탄티노플 대경기장에서 열렸으며, 이 개선축하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스타우라키오스의 승리 이전 시기에 슬라브족들이 들어와 정착했던 발칸반도의 지역들은 외국지역으로 취급되었는데19) 스타우라키오스의 개선 축하는 이 지역이 다시 비잔틴 제국의 지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확정시키는 축하자리였다. 784년 이레네와 콘스탄티노스 6세는 트라키아에 탑을 세웠다. 그리고 이레노폴리스(Irenopolis)로 불렸던 베로이아(Berroia)로 갔다가 흑해 해안을 따라 나있던 안키알로스 도로를 따라 수도로 돌아왔다.20) 7세기 말엽 트라키아와 헬라스(발칸반도 중부)에 테마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테마들은 계속된 슬라브족과 불가리아의 침투로 붕괴되었다. 그런데 스타우라키오스의 원정으로 이들 지역은 더욱 안전해졌을 뿐 아니라 교구도 증가하였다. 이들 새로운 교구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 행해졌는데 릴리(Lilie)와 다루제(Darrouzes)의 연구에 따르면 이 당시 새롭게 생겨났던 교구들은 비기독교 종족들에 의해 점령당했던 내륙지역에 세워졌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선교활동과 개종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헤라클레이아(Herakleia), 쭈룰론(Tzouroulon), 카리우폴리스(Charioupolis) 그리고 헥사밀리온(Hexamilion) 교구는 기독교의 이러한 성장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아드리아노플 지역의 데벨토스(Develtos), 불가로피곤(Boularophygon), 팜필론(Pamphylon) 교구 그리고 아테네와 코린토스 지역의 트로이젠(Troizen), 포르트모스(Porthmos), 오레오스(Oreos) 등의 교구들이 새롭게 탄생되었다.21) 802년 이전에 이레네는 아테네를 메트로폴리탄 도시로 승격시키면서 아테네에 테살로니카, 코린토스에 이어 세 번째의 대주교구를 세웠다. 또한 그녀는 자기 가문 사람들을 강화된 발칸반도 행정 요직에 고용했을 뿐 아니라 헬라스를 유배지로 활용했으며 그리고 마케도니아에 테마를 건설했다.22) 이레네의 이러한 조치들은 소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졌던 발칸반도의 위상을 높여주었음에 틀림없다. 다음으로 문예부흥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보자. 이레네의 정책은 비잔틴 문예부흥(비잔틴 인문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사실 이 문제를 상세하게 논한다는 것은 지면관계상 어렵다. 여기에서는 중요한 부분두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소문자체에 대해 살펴보자. 3-9세기 기간동안 그리스어 필사에 쓰여졌던 언셜자체가 9세기에 들어오면서 지적인 변화의 선행조건으로서 필사본 생산에 있어 기술개량을 위해 소문자체가 생겨나게 됨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23)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성상숭배와 관련된 문예부흥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폴 르메를르(P. Lemerle)에 따르면 비잔틴의 르네상스는 9세기에 갑자기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제1차 성상파괴운동의 동요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이 당시 수많은 저서들이 나왔는데 이 저서들의 대량 생산은 종이를 사용하면서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랍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866년에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비잔틴 세계에 있어 종이는 아랍세계의 도시 이름을 따서 바그다티코스(βαγδατικ??), 혹은 밤부키노스(βαμ??κινο?)라고 불렸다. 그런데 기록상 비잔틴 제국에서 종이를 사용한 년도는 미카엘 아탈리아테스(Michael Attaliates)에 따르면 11세기 후반, 이레네 콤네나(Irene Comnena)에 따르면 12세기 초반,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Constantinos Monomacos) 황제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1052년 그리고 비잔틴의 가장 오래된 종이 필사본은 1043년 혹은 1105년으로 알려져 있다.24) 여기서 우리는 소문자체가 종이 사용 때문에 생겨났다고 볼 수 없다. 문학작품은 9세기 이전까지는 언셜자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9세기에 들어와서 소문자체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알려진 바로는 소문자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레닌그라드에 있는 Tetraevangelium이다. 이 필사본은 835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된다.25) 그런데 우리는 소문자체가 이 시기보다 앞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아탈로스(B. Atsalos)의 연구26)나 폴 르메를르의 연구27)에 따르면 콘스탄티노스 6세와 이레네의 통치시기(80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보들레이엔느(la Bodleienne)의 한 필사본은 논쟁의 여지가 많이 있지만 이 필사본에서 보이는 γρ?μματα κεκολαμ(μ)?να는 석판에 새겨진 글자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일부의 학자들은 소문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만약 이 글자체가 소문자체라고 한다면 소문자는 이레네의 통치 아래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폴 르메를르는 이 시기를 780-797년 사이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확실하다면 이레네 시대는 문예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소문자체는 일반적인 연구 특히 폴 르메를르의 연구에 따르면 9세기의 학교교육과 10세기의 백과사전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성상에 관해 살펴보자. 성상은 문예부흥의 예술적인 면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비잔틴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로마, 코르도바, 카르타고, 키레네(Cyrene), 예루살렘, 안키라(Ancyra)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발달하였다.28)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성상파괴주의 시대까지는 전기 시대로 분류된다. 그러나 성상파괴주의는 이러한 전기 시대의 예술환경을 파괴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레네의 성상부활은 9세기 문예부흥의 예술적인 면에서 기여를 하였다. 즉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모자이크·벽화·성상 등의 색채 미술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고대의 유물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수용되었다.29) III. 외부정책 1) 샤를마뉴와 교황청과의 관계 레오 4세 통치시절 베네벤툼(Beneventum)의 롬바르드족들은 778년에 일어난 시실리의 비잔틴 파트리키우스(patricius)의 음모와 연계된 음모를 꾸몄는데 이 음모는 캄파니아 지방에서 교황청의 권위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이에 하드리아누스 교황은 이 음모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를 파견하기 앞서 그는 샤를마뉴의 외교적인 개입을 원했다. 이 당시 샤를마뉴는 이탈리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색슨족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30) 781년 봄 고위 관료였던 콘스타에스(Constaes)와 마말루스(Mamalus)는 이탈리아로 가서 샤를마뉴를 만났다. 이 만남의 목적은 정략적으로 콘스탄티노스 6세(당시 11살)와 당시 7-8살(혹자에 따라서는 6-7세라고 주장하기도 함) 정도된 로트루다(Rotruda)의 약혼관계를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31) 왜냐하면 위에서도 살펴본 내부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외적인 평화가 필요했는데 비잔틴 제국은 아랍인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32) 그런데 샤를마뉴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왜냐하면 샤를마뉴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계속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72년 작센을 공략했고, 773년과 774년에는 롬바르드 왕국을, 775년과 776년에는 다시 색슨족을 공격하였다가, 778년에는 스페인에 진격하였으며, 779년에는 또 다시 작센에 가 있었다. 그리고 782년에는 색슨족이 프랑크 침략군의 한 부대를 몰살해 버리자, 샤를마뉴는 보복전을 감행해야 했고, 785년 색슨족의 지도자 비두킨트가 항복한 후에도 20여년 동안 수 차례 색슨족의 소규모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다.33) 곧이어 두 국가간에 조약이 맺어졌다. 787년 샤를마뉴는 아리키스(Arichis)가 독립을 하려고 하는 베네벤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에 왔다. 그는 아리키스로부터 아리키스의 아들 그리모알트(Grimoald)를 포함한 자들을 인질로 삼은 다음 부활절을 로마에서 보낸 후 프랑크 왕국으로 되돌아갔다. 이 당시 아리키스는 교황에게 나폴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들인 아퀴노(Aquino), 테아노(Teano), 카푸아(Capua) 그리고 가릴리아노(Garigliano) 서안에 위치한 소라(Sora), 아르피눔(Arpinum), 아르카(Arca)를 교황에게 주겠다는 언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이 언질은 실현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 당시 아리키스는 또 다른 음모를 꾸몄다. 이번에는 과거에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비잔틴 제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스 6세와 로트루다간의 약혼관계는 파기되었으며,34) 이때부터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반(反)프랑크족 정책을 펼쳤다.35) 그리고 콘스탄티노플로 간 아리키스의 두 관리는 황궁의 환대를 받았다. 비잔틴 제국은 아리키스에게 나폴리공(公)이라는 칭호와 함께 비잔틴식 귀족칭호(patricius :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창설한 귀족칭호)를 주었다. 그후 아리키스는 디디에르(Didier)의 아들 아달기세(Adalgise)의 군대와 라벤나에서 합류하려고 하였으나36) 787년 8월 26일 갑자기 사망하게 됨으로써 그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37) 그러나 그의 아내 아달베르게(Adalberge)는 그의 원대한 계획을 계속 추진해 나가면서 샤를마뉴에게 아리키스의 아들 그리모알트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당시 교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달베르게를 도와주지 말 것을 명령했을 뿐 아니라 샤를마뉴로 하여금 이탈리아로 원정을 와서 아달베르게의 음모를 분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788년 여름 그리모알트를 그의 바쌀(vassal)의 자격으로 이탈리아로 되돌려 보냈다. 이때부터 비잔틴과 아리키스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에 화가난 이레네는 시실리 총독으로 하여금 그리모알트와 전쟁을 할 것과 베네벤툼의 국경선을 무너뜨릴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개입으로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영토는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나폴리 주변 그리고 아드리아해 일부지역으로 국한되었다.38) 한편 동로마 제국은 공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포석으로 먼저 관계개선을 위해 784년 이전에 하드리아누스 교황과 면식이 있는 시실리의 레온티움(Leontium)의 주교인 콘스탄티노스로 하여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표현의 글을 교황청에 전하도록 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주교는 교황청으로 가서 관계개선을 위한 교황의 적절한 답사를 받아내었다. 그후 시실리의 스트라테고스는 로마로 갈 수 있게 되었고, 교황청의 특사들도 나폴리와 시실리에 올 수 있게 되었다.39) 784년 8월 29일 이레네와 콘스탄티노스 6세는 하드리아누스 교황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이들은 교회의 분열을 막고 교회의 유일한 수장인 크리스트를 중심으로 교회를 통합시키기 위해 만국공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성상숭배에 대한 과거의 전통을 확정지어 달라고 요청했다.40) 그후 파울로스 4세 총대주교를 이어 총대주교에 취임한 타라시오스는 그 자신의 취임을 알리기 위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에 취임 보고서를 보내었는데 이 내용에서 그는 니케아 만국공회의부터 시작된 6번의 만국공회의의 도그마를 인정함과 아울러 그 자신이 성상을 숭배한다는 것을 밝혔다.41) 이와는 별도로 이레네는 그 자신이 로마에 타라시오스의 총대주교 취임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는데 이 서한에서 이레네는 타라시오스의 발언을 지지한다는 것과 공회의에 교황을 초대한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켰다.42) 그러나 황궁과 교황청간의 교감은 쉽지않았다. 왜냐하면 성상숭배를 부활시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나, 교황청을 중심하는 것이 아닌 크리스트를 중심으로 교회를 통합시킨다는 내용은 묘한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미는 교황청을 교회의 수장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세속 관리가 총대주교 자리에 취임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교황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785년 10월 26일에 가서야 황제특사에게 성상숭배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레오 3세 황제 때 비잔틴 영토 안에 있었던 교황청 영지를 돌려달라는 요청의 답신을 주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 답신에서 공회의 때 황궁의 간섭을 배제할 것과 공회의에 보내는 2명의 특사에게 폭넓은 발의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43) 니케아 제2공회의는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성공리에 개최되어 잘 끝났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이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는 샤를마뉴가 이스트리아(Istria)와 이탈리아 남부지방에 대한 군사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니케아 제2공회의의 결정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타났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점차로 확대되어가는 군사적인 힘만큼 사제들의 신학적인 능력도 점차 힘을 얻고 있었는데 프랑크 왕국의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상숭배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관료와 성직자들은 샤를마뉴를 히에레이아 공회의와 니케아 제2공회의 사이의 중재자로서 생각했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니케아 제2공회의는 "성상에 관한 법령집(Capitulare de imaginibus)"에서 비판을 받았다.44) 이 법령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레네에 대해 여자라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점과 종교회의에서는 가르치는식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 그리고 타라시오스에 대해서는 너무 빨리 총대주교좌에 취임했다는 점, 그리고 비잔틴의 황제, 총대주교, 주교들이 모두 필리오쿠에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45) 794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이 종교회의는 교황특사가 출석한 자리에서 787년 니케아 제2공회의가 성상을 숭배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46) 또한 이 종교회의는 삼위일체에 대해 언급하면서 훗날에 문제가 되었던 필리오쿠에(Filioque) 문제도 약간 언급했다.47) 이 종교회의가 끝난 후 프랑크 왕국에서는 안길베르트(Angilbert)를 주축으로 한 사절단을 로마로 보냈다. 당시 사절단은 위에서 언급한 성상에 관한 법령집과 니케아 제2공회의를 승인하지 말 것을 간청하는 샤를마뉴의 서한을 교황에게 전달했다. 794년 교황은 안길베르트 편으로 황제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교황은 니케아 제2공회의는 성서에 근거한 공회의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주장을 논박했다.48) 그러나 교황은 이 당시 프랑크 왕국이 니케아 제2공회의를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에게 니케아 제2공회의에 대한 답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2 니케아 공회의는 위에서 살펴본대로 성공리에 개최되어 잘 끝났다. 로마는 이 공회의의 결과에 대해 만족해했지만 이탈리아 남부와 일리리쿰 지역에 대한 로마의 권한이 공회의에서 점잖게 무시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들 지역에 대한 권한을 주장했다. 이 당시 하드리아누스 교황의 서한의 그리스 번역본은 교황의 항의 부분이 빠져있다. 사실 니케아 제2공회의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해결했다고 볼 수 있지만 두 세계 중심지의 진정한 화해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은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가져왔다. 로마에서의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서유럽인들에게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이 하나의 제국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49) 왜냐하면 비잔틴에서 이레네가 황제가 되자 남자로 계승되는 황제의 대가 끊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황제 즉위를 찬탈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로마 교회측도 역시 단일 제국이라는 사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비잔티움과 공존하는 제2의 제국을 이룩할 의도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로마 교회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제국이 옛 비잔티움 제국을 대신하게끔 할 작정이었다50).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인정을 받지 않은 샤를마뉴의 황제권은 법적으로 허공에 떠 있는 셈이었다. 비록 비잔틴 제국이 제위를 한 여인이 소유하고 있는 한 그것은 공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나 비잔틴 제국이 이단에 빠졌다는 식의 공허한 주장만으로는 분명히 진전이 없었다. 802년, 샤를마뉴와 교황이 보낸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들은 "동과 서가 다시 합일되도록" 비잔티움의 여제에게 그들 군주의 청혼서를 건네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직후, 궁정에서 혁명이 일어나 이레네가 제위에서 쫓겨나는 바람에(802년 10월 31일), 이 문제의 해결은 연기되었다. 제국의 고위 관리들과 장교들에게서 시작된 이 반란으로 인하여 그때까지 게니콘의 로고테테였던 니케포로스가 제위를 얻게 되었다.51) 3) 불가리아와 아랍과의 관계 불가리아인들은 레오 3세가 황제가 되자 이사우리아 왕조의 동맹자가 되었다. 그래서 755년까지 비잔틴인들은 이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제국의 전통적인 동맹자들인 카자르들처럼 불가리아인들은 황제가 위협적인 모슬렘교도들에 대항하도록 몇번 부추겼을 때도 믿음직한 지지자들이 되었다.52) 그리고 불가리아의 공주 이레네가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부인이 되자 불가리아와 비잔틴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러한 평화관계는 레오 4세 때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레오 4세가 사망하자 위협적인 존재로 돌변했다. 783년 스타우라키오스는 트라키아를 위협하고 있었던 불가리아와 전쟁을 치루었으며 그후 트라키아에는 테마가 설립되었다. 789년 또다시 불가리아 국경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콘스탄티노스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 전쟁을 직접 수행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792년 여름 다시 국경 요새 마르켈라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황제는 도망치고 명망있는 비잔틴 제국의 사령관들이 잡히는 바람에 이 전쟁은 굴욕적으로 끝났다. 다시금 비잔틴 정부는 조공의 지불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불가리아인들이 조공액수를 높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굴욕적이긴 하지만 조공을 지불해야만 했다.53) 다음으로 아랍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678년과 688-689년의 아랍과 비잔틴 제국의 협상은 아랍인들의 침공을 일시적으로 저지시켰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717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면서 또 다시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다.54) 8세기 중엽 아랍세계에는 우마야드 왕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750년 아바시드(Abassids) 왕조가 칼리프의 지위를 장악했다. 그러나 아바시드 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기면서까지 새로운 면모를 보이려고 하였으나 거대한 정복지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아바시드 왕조는 레오 4세의 치세하에서 2차례에 걸쳐 소아시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778년 킬리키아(Cilicia)55)와 780년 아르메니아 테마56)에서 벌어진 전쟁은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781년 아랍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영토 깊숙이 침입하여 트라케시온 테마 지역에서 큰 혈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이레네는 하룬 알-라쉬드(Harun al-Rashid)에게 페트로스와 안토니오스라는 두명의 관리를 보내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조공의 지불을 약속했다.57) 그러나 아랍인들은 항상 위험스러운 존재였다. 이런 굴욕적인 의무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소아시아에서 곧 다시 아랍인들의 침공을 받았다. 782년 아랍인들의 기마척후대가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까지 돌진해왔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레네는 전임 황제들이 전쟁을 통해 거둔 모든 유리한 조건들을 포기함과 동시에 무거운 공물을 주는 조건으로 3년동안 휴전조약을 맺었다.58) 바르-헤브라에우스(Bar-Hebraeus)는 이 당시 공물로 황금 7만 리브라(libra)를 주었다고 추정한다.59) 아랍인들의 이러한 육로로의 침입과는 달리 해로로의 침입은 봉쇄를 당한 것 같다. 확실치는 않지만 8세기에 나타난 것으로 예상되는 에게해 섬을 관장하는 드룽가라톤(δρουγγαρ?τον)이 781년에는 확실히 존재했는데 테오필락토스(Theophylaktos)라는 이름을 가진 이 드룽가라톤은 에게해 섬들을 잘 관장한 것 같다.60) IV. 맺음말 레오 4세의 죽음으로부터 이레네의 폐위(802년)까지 22년 동안의 기록은 일반적으로 모반과 음모라는 단어를 통해 너무 폄하되어 왔다. 이에 필자는 위에서 이레네의 전반적인 정책을 통해 그녀를 재평가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찾아내었다. 첫째, 이레네는 787년 니케아 제2공회의를 통해 성상숭배 제도를 확립시켰다. 또한 성상숭배 제도의 확립은 문예부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둘째, 발칸반도에 새로운 테마를 건설함으로써 소아시아, 에게해의 테마와 더불어 비잔틴 내의 테마제도를 확립했다. 셋째, 샤를마뉴와의 초기 외교정책은 큰 성과였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대관식에 따른 서방의 상실은 제국의 동방화의 결과에서 비롯되지만 어쨌든 제국의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었다. 넷째, 슬라브, 불가리아, 아랍의 위협은 이레네의 정권을 위협했지만 이레네는 이 위기를 잘 넘김으로써 9세기의 안정을 가져왔다. 위와 같이 이레네의 정책은 좋은 점도 발견되기 때문에 모반과 음모라는 단어를 통한 폄하는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주 1) 726년에 있었던 에클로가(Ekloga)의 출간은 레오 3세 통치기간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법률집은 재판관이 접하게 되는 일상의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 채택된 법규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실 이 에클로가는 민간법과 형사법의 영역속에서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 유용한 텍스트들을 선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대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유용한 과거의 텍스트들을 표절하고 있기도 하다. 2) 오스트로고르스키, 루이 브레이에, 바실리에프, 알렝 뒤셀리에, 앙드레 귀이우, 뒤메즈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저서들은 이레네의 종교정책을 제외한 일반정책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3) P. Speck, Kaiser Konstantin VI : Die Legitimation einer Fremden und der Versuch einer eigenen Herrschaft (Munich, 1978). 4) Dominique Barbe, Irene de Byzance, Paris, 1990. 5) Theophanes, a. 6268. 레오4세의 형제 니케포로스와 크리스토포로스는 769년에 부황제로 임명되었으며, 니케타스와 안티모스 역시 콘스탄티노스 5세 치하에서 노빌리시모스(nobilissimos : 지극히 고귀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레오 4세 때에 가장 어린 동생이었던 에우도키모스 역시 이 칭호를 받았다. 6) Ibidem, a. 6272. 7) 이 음모는 두 번째 음모다. 첫 번째 음모는 레오 4세 때에 일어났다. 당시 죄인들은 케르손으로 추방당했다. 8) Theophanes, a. 6273. 9) Gervais Dumeige, Nicee II, Paris, 1978, p. 100 ; Louis Brehier, Vie et mort de Byzance, Paris, 1946, 1969 et 1992, p. 86. 10) Alain Ducellier(L'Eglise byzantine : Entre Pouvoir et Esprit(313-1204), Paris, 1990, p. 133)는 이레네가 785년 공회의를 소집하기까지 군대, 행정, 교회 세력들과 5년동안 협상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 협상이 원만하지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시실리의 스트라테고스인 헬피디우스(Helpidius)의 반란과 786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가 무산된 점으로 볼 때 반대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1) Theophanes, a. 6278 ; Mansi XII 985C. 12) Theophanes, a. 6278. 13) Michel Kaplan, La chretiente byzantine : Du debut du VIIe siecle au milieu du XIe siecle, Paris, 1997, p. 63. 14) 물론 이 법규는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선임할 때 다시 문제가 되었다. 15) Georges Ostrogorsky, Histoire de l'Etat byzantin, Paris, 1983, pp. 208-210. 16) Ibid., p. 211. 17) Louis Brehier, Les institutions de l'empire byzantin, Paris, 1949 et 1970, pp.169-170. 18) Judith Herrin, The formaion of Christendom, London, 1987, pp. 409-410. 19) J. B. Bury, A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vol. II, London, 1889, p. 484. 20) Ibid., 457. 21) R.-J. Lilie, "'Thrakien' und 'Thrakesion' : Zur byzantinischen Provinzorganisation am Ende des 7. Jahrhunderts, " JOB 26(1977) : 7-45, esp. 35-46 ; J. Darrouzes, "Listes episcopales du Concile de Nicee (787), " REB 33 (1975) : 5-76, esp. 22-26. 22) N. Oikonomides, Les Listes de preseance byzantines des IXe et Xe siecles (Paris, 1972), p. 349 ; J. Darrouzes, Notitiae episcopatuum ecclesiae Constantinopolitanae (Paris, 1981), no. 2. 23) Judith Herrin, The formation of christendom, London, 1987, p. 404 ; N. G. Wilson, Scholars of Byzantium, London, 1983, pp. 63-68. 24) P. Lemerle, Le premier humanisme byzantine, Paris, 1971, pp. 109-111. 25) G. Cereteli, Wo ist das Tetraevangelium von Porphyrius Uspenskij aus dem Jahre 835 entstanden?, Byz. Zeitschr., 9, 1900, pp. 649-653. 26) B. Atsalos, La terminologie du livre-manuscrit a l'epoque byzantine : termes designant le livre-manuscrit et l'ecriture, Paris, 1969, pp.571-573. 27) Paul Lemerle, Sur deux termes grecs concernant l'ecriture a l'epoque byzantine, Revue des Etudes Sud-Est europeennes, 7, 1969 (Melanges B?nescu), p. 151-154. 28) Joseph H. Krause, The Nature of Art (Englewood. Clffs : Prentice-Hall, 1969), pp. 50-51. 29) Horst W. Janson, History of Art, New York, 1995, pp. 230-41 ; Dacid Talbot Rice, "The Eastern Roman Empire," in Herbert Read(ed.) The book of Art : Origins of Western Art(New York : Grolier, 1971, p. 82. 30) JW 2424 ; Cod. Carol., 62. Halphen, Charlemagne et l'empire carolingien, Paris, 1947 et 1968, p. 65. 31) Theophanes, a. 6274. 32) 아랍인들의 위협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살펴보겠다. 33) Pierr Riche, Les carolingiens, Paris, 1983, pp. 104-122 ; 브라이언 타이어니/시드니 페인터,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93, 132-134쪽. 34) JW 2460, 2463 ; Cod. carol., 80, 83 ; Annales d'Eginhard, a. 786 ; Annales de Fulda, a. 787. 35) 아인하르트(Einhard)의 786년에 관한 기록은 프랑크 왕국에서 양국간의 협약을 파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테오파네스의 6281년에 관한 기록은 이레네가 양국간의 협약을 파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오파네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이레네는 프랑크족과의 협약을 파기하면서 콘스탄티노스 6세와 결혼을 시키기 위해 테오파네스라는 관리를 아르메니아로 보내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데려오도록 했다. 당시 콘스탄티노스 6세는 프랑크족 왕의 딸 때문에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이들의 결혼은 788년 11월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아인하르트의 786년 기록은 아리키스가 786년 독립을 하려고 할 때부터 비잔틴 제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온 기록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 비잔틴 제국은 양국간의 협약을 파기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788년 테오파네스의 기록에 보이는 이레네가 협약을 파기했다는 내용은 787년 부활절 이후 샤를마뉴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아리키스가 비잔틴 제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되자 이레네가 취한 행동으로 보인다. 36) JW 2463 ; Cod, carol., 83. 37) Chronicon Salernitanum, XVII(MGH, Ss., III, p. 481). 38) Annales Laurissenses, a. 788. 39) F. Dolger, Regesten der Kaiserurkunden des ostromischen Reiches (Corpus der griechischen Urkunden des Mittelalters und der neueren Zeit, Reihe A, Abt. I), Munchen-Berlin, 1924, 1925, 1932, p. 342. 40) Theophanes, a. 6277 ; Mansi XII, 984. 41) Mansi XII, 1078-1083, 1119-1135 ; Zonaras XV, 11 ; Grumel, 351-352. 42) Dolger, 343 ; Mansi XII, 1056. 43) 콘스탄티노스 6세와 이레네에게 보내는 편지 JW 2448 ; Mansi XII, 1056, 1074 그리고 타라시오스에게 보내는 편지 JW 2449 ; Mansi XII, 1077-1083 ; PL 96, 1234-1242. 44) 성상에 관한 법령집은 그리스 텍스트를 잘못이해하여 번역상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MGH Leg. sect. III, Concilia, II suppl. Hannover-Leipzig 1924, ed. H. Bastgen, 1-228.) 이 당시 프랑크 왕국은 니케아 제2공회의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샤를마뉴는 서방 기독교인들이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성상에 관한 문제를 프랑크 왕국의 신학자(중요인물은 알퀸이다)들로 하여금 연구케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Jean Decarreaux, Byzance ou l'autre Rome, Paris, 1982, p. 61.). 45) Capitulare de imaginigbus, III, ii ; III, iii ; III, viii ; III, xi ; III, xiii ; IV, xxviii ; ed. H. Bastgen, 108-110 ; 110-113 ; 121 ; 123-125 ; 127-129 ; 227-228. 46) Concilium Francofurtense, MGH Leges, sect. III, concilia II, I, ed. A. Verminghoff, Hannover-Leipzig, 1906, 165-171. 47) 필리오쿠에 문제는 809년 엑스-라-샤벨 종교회의에서 다시 언급되었는데 하드리아누스(795년)와 레오 3세(816년)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서 필리오쿠에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Jean Decarreaux, Byzance ou l'autre Rome, Paris, 1982, p. 62) 48)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내는 사를마뉴의 편지(MGH Epist. Aevi karolini, III, ed. E. Dummler, Berlin, 1899, 6-27. 49) A. A. Vasiliev,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Madison, 1958, p. 265. 50) Georges Ostrogorsky, Histoire de l'Etat byzantin, Paris, 1983, p. 214. 51) Ibid., p. 215. 52) Dominique Barbe, Irene de Byzance : La femme empereur, Paris, 1990, p. 26. 53) Georges Ostrogorsky, Histoire de l'Etat byzantin, Paris, 1983, pp. 211-212. 54) F. Dolger, Regesten der Kaiserurkunden des ostromischen Reiches(Corpus der griechischen Urkunden des Mittelalters und der neueren Zeit, Reihe A, Abt. I), Teil I : 565 bis 1025, n° 239, 257 ; Theophanes, Chronographia, a. 6178, 6179, 6209. 55) Theophanes, a. 6270. 56) Ibidem, a, 6272. 57) Andre Guillou, La civilisation byzantine, Paris, 1990, p. 146. 58) Theophanes, a. 6274. 59) Bar-Hebraeus, Chronique universelle (a. 1094), texte arabe, ed. Salhani, Beyrouth, 1890, p. 783. 60) Helene Antoniadis-Bibicou, Etudes d'histoire maritime de Byzance, Paris, 1966, pp. 96-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