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 타령에 숨은 관능적 해학/김문억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골에 백도라지
무심하게 들어오던 우리 가락 도라지 타령,
그냥 전래된 민요로만 들어왔고 그 가락에 맞춰 춤사위까지 무대에 올라오는 것을 즐겼던 도라지 타령이 요즈음은 왠지 우리 귀에 잘 들려오지 않는다.
그만큼 무대에서 멀어진 것인가 소리꾼들의 입에서 멀어진 것인가.
한 번 쯤 그 가사가 갖고 있는 은유적 깊은 사유 속으로 빠져 들어가 볼작시면
그것이 남자의 거시기를 두고 우리 민족이 오래도록 노래로 즐겼다고 해서 경망스럽다거나 부끄러울 것 또한 없거니와
오히려 현대인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찬 해학으로 아주 멋들어진 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골 백도라지
신성하고 거룩한 그 사타구니 골짜기에 깊이깊이 뿌리내린 백도라지 한 뿌리. 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면서 원천이었던 것.
시인 행세하기가 부끄러울 만치 절묘한 그 묘사에 하하! 그래그래 고개를 저절로 끄덕끄덕 하면서 다음 구절을 잇대어 볼작시면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로 스리살살 다 넘는다.
헤헤! 남자의 거시기를 캐 담는 대바구니가 여자의 거시기라면 그 또한 한두 뿌리만으로도 스리살살 넘친다고 했으니
가히 우리 조상님들 해학이 기절초풍할 만큼 나의 애를 뒤틀리게 하나니.
도라지 한 뿌리로 인한 그 ‘스리살살’이야말로 얼마나 자분자분한 성애性愛의 느낌이냐.
대바구니와 백도라지의 관계 설정에서는 충분히 한두 뿌리만으로도 얼마든지 차고 넘치는 것.
쾌감과 만족과 부끄럼이 어우러지는 꽃의 신음이렷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대바구니라 했으니 대단한 해학이다. 꽃바구니다. 그러면 다시 2절로 사분사분 넘어가 볼작시면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골에 백도라지
하도 날 데가 없어서
쌍 바위틈에 가 났느냐
히야! 가구佳句로다.
이제 이쯤 듣고 보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평생토록 지고 다녀야 할 그 쌍 바위틈에 난 백도라지의 자존심이 아니겠느냐.
함부로 캘 수도 함부로 뽑힐 수도 없는 뿌리 깊은 자존심,
쌍 바위틈에 날 수 밖에 없는 남성의 무궁한 심벌.
'에헴'
'허허 에헴 커험커험커험 끄으으으으
뭔 소리냐고?
부끄자버서 헛기침 하는 소리라요 왜.
그러고 나서 후렴으로 마친다 도라지 타령은.
에헤야 데헤야 에헤야아
에야라 난다 지화자 좋다
니가 내 간장 스리살살 다 녹인다.
이쯤 되고 보면 지화자 좋지 않고 어찌 배겨낼 수 있겠는가.
니가 내 간장 스리살살 다 녹일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다.
무슨 표현이 더 필요 하겠는가.
도라지 한두 뿌리에 어찌 그리 니가 내 간장까지 스리살살 다 녹일 만큼 만족하고 흡족하고 만취할 수 있는 건가.
이는 분명 도라지만을 노래한 것이 아닐 것이란 짐작을 가능케 한다.
엄청난 상상으로 내 심상은 만개한 도라지꽃밭 벌 나비가 되어 나풀거리며 날아다니고 있다.
아무래도 그냥 예사로운 도라지 타령이 아니다.
참말로 음탕한, 아니, 음탕하기보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가사요 민요다.
아지랑이 어지럽고 봄바람 살랑거리는 날 두툼한 겨울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분홍치마 노랑저고리에 봄나물 캐는 처자들이 누가 들을세라 입속으로 흥얼거리던 가락
앞산으로 삭정이 따러 가던 나무꾼들이 지게 목발을 두드리면서 부르던 구성진 가락 도라지타령이다.
안 보는 듯 보고 있으며 안 듣는 듯 듣고 있으며 듣고 보이는 것보다는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듣던 멋을 가진 우리 조상들이다.
아닌 듯하면서 엉뚱하게 드러내던 가락 하나가 도라지 타령이다.
이렇게 뿌리 깊은 가락으로 우리 민족의 피 속에 용해된 도라지 타령의 맥을 짚고 전통 민족시가인 시조 한 수도 자리 잡았으리라.
혼곤한 계절에 봄날은 가고 있다.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 달라는 유혹 당하고 싶고 바람나고 싶은 이 환장하게 스멀거리는 춘삼월에
어느 독자가 내 인터넷 카페에 도라지 꽃 한 송이를 올렸는고?
영자야! 너 그렇다고 대낮에 도라지 캐러 나가면 절대 안 되여 야.
그 도라지 잘못 캐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도라지 돼야
첫댓글
안녕하세요.명절이 몇일 남지 않은 월요일 행복의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