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d Case
한 친구는 부처를 알고 나니까 시 같은 거 안 써도 되겠다며 시를 떠났다. 또 한 친구는 잠들어 있는 딸아이를 보니까 더 이상 황폐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시를 떠났다. 부러웠다. 난 적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별자리 이름을 많이 알았거나, 목청이 좋았다면 나는 시를 버렸을 것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초파리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신중한 내연기관이었다면 수다스럽게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또 시를 쓴다. 그게 가끔은 진실이다. 난, 언제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 부처에게로 떠난 친구나, 딸아이 때문에 시를 버린 친구만이 끝까지 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시가 누군가의 입맛을 잃게 해서. 끝까지 가지 못해서.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사, 2012.
Cold Case 2
(19세기 사람 쥘 베른이 쓴 「20세기 파리」라는 소설에 보면 시인이 된 주인공에게 친척들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안에 시인이 나오다니 수치다.")
20세기도 훨씬 더 지난 지금 시는 수치가 된 걸까.
시는 수치일까. 노인들이 명함에 박는 계급 같은 걸까. 빵모자를 쓰는 걸까. 지하철에 내걸리는 걸까.
시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랑 더 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다. 시쓸 영혼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본다.
싸구려 호루라기처럼 세상에 참견할 필요가 있을까. 노래를 해서 수치스러워질 필요가 있을까? 자꾸만 민망하다
그런데도 왜 난 스스로 수치스러워지는 걸까. 시를 쓰는 오후다.
불머리를 앓고도 다시 불장난을 하는 아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쇠꼬챙이를 집어 든다.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