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일. 묘청(妙淸)과 유참(柳旵)·조광(趙匡)등이 서경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인종13년(1135) 정월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일파는 드디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대로 인종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죠.
신해일. 김부식을 원수(元帥)로 삼아 서경의 반군을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조정의 삽질(?)덕에 그냥 묘청 모가지 하나로 바로 끝날 일이 해를 넘겨버리게 됩니다.
김부식의 대군이 당도하자 각 성들이 모두 벌벌 떨며 두려워하였다. 김부식이 막료를 서경으로 보내 일여덟 차례에 걸쳐 설득하자 조광(趙匡) 등은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성을 나와 항복하려 했으나 미적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때 김순부(金淳夫)가 조서(詔書)를 가지고 성에 들어가자 서경 사람들이 마침내 묘청(妙淸)·유참(柳旵) 및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머리를 벤 뒤, 윤첨(尹瞻) 등으로 하여금 김순부의 뒤를 따라 나가 그 머리를 바치게 하고 용서를 빌었다. 이에 세 사람의 머리를 큰 거리에 매달고 윤첨을 하옥시키니 조광은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다시 항거했다.
고려사 묘청 열전
물론 모두 알다시피 이 서경반란은 결국 반란군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서경천도와 금국정벌에 대해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 특히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가 1135년경인데, 그 점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1135년 금나라 태종이 죽고, 어린 희종(아골타의 손자)가 즉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죠.
계묘일. 왕이 다음과 같은 금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았다.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통에 대행황제(大行皇帝)께서 병들어 오래 신음하시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니 추모하는 애달픈 통곡을 그칠 도리가 없다. 짐이 유훈을 공경히 받들고 사람들의 추대에 못 이겨 보잘 것 없는 몸으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경은 멀리서 부음을 듣고 지극히 애통할 것으로 생각되나 더욱 마음을 분발하여 우리 조정과 함께 통치에 힘쓰도록 하라.”
한편 금 태종이 죽기 직전인 1134년 악비가 금나라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유제가 소유하고 있던 양양6군을 수복하고, 태종이 죽은 일년 뒤 1136년에는 그 유명한 '북벌'을 시작하게 됩니다.
자 가자!!!!!!
묘청이 이러한 국제정세를 어느정도 판단, 예측하고(금황제의 병환, 악비의 금나라 공격 등)일을 밀어 붙였는데 왕이랑 조정이 하도 답답하게 굴어 반란을 일으킨 건지, 아니면 그냥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사료가 적어 판단을 하기는 힘듭니다.
설사 그 모든 것을 판단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가 송나라와 힘을합쳐 장기적으로 금나라를 대적할 국력이 있는지였죠. 가깝게는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조정이 어지러운 상태였고, 약간 시간 텀이 있지만 윤관의 여진정벌로 인한 재정적 부담은 과연 해결 되었고, 그만한 군대를 또 보낼 여력이 있는가를 판단한다면.....
어쨌든 서경반란이 1년여 정도 시간이 걸리게 되는데, 중간에 송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상한 소리를 주절 거립니다.
기미일. 송나라에서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보내,
“최근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평정하기가 어려우면 10만의 군사를 출동시켜 원조하려고 한다.”고 제안했다. 인종13년(1135) 6월
땅뺏기고 두 황제까지 잡힌 나라 주제에 남의나라 도와준다고 하니, 고려는 아마도 속으로 '니 앞가림이나 잘하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고려는 '당신들 도움은 필요 없어요~' 라는 답서를 보냅니다.
을해일. 송나라 사신 오돈례(吳敦禮)가 귀국하는 편에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부쳤다.
“서경의 반란군은 이미 그 괴수를 섬멸하였고 남은 잔당들이 저들끼리 모여 험한 곳을 발판삼아 버티고 있습니다. 속히 공격해 쳐부수고 싶으니 인명 피해가 많이 날까 우려한 나머지 진군을 멈추고 성을 포위한 채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바,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어 곧 무너질 것입니다. 외국의 하찮은 나라가 사소한 문제로 천자의 위엄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감히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 원군의 파병여부를 물어주시니 상국에서 작은 나라를 걱정해주시는 뜻은 황감하오나 다만 행정 처리상 불편함이 있을 것이기에 뜻을 받들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더구나 험난하고 먼 바다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상국의 군대가 이동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하달한 지시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인종 12년(1135) 9월
송나라가 과연 진짜로 군대를 파견하려고 했을까.
위에서도 말했지만 송나라는 1136년에 악비가 본격적으로 북벌을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전 작업으로 서경반란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낸 뒤 그 군대로 금나라의 요동지역으로 들어가 중원과 요동 양쪽을 동시에 공격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까워서 그랬을까? 파병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서하의 밀사를 고려에 파견하려 합니다.
을해일. 김치규(金稚規)와 유대거(劉待擧)를 송나라의 명주(明州)에 보내 다음과 같은 공문을 전하게 했다.
“최근 상국의 상인 진서(陳舒)가 다음과 같은 공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근자에 하국(夏國 : 서하(西夏))에서 사신을 보내와 우리 사신과 함께 고려를 찾아가 일을 의론하고 싶다고 하기에 진서를 고려에 보내 관련되는 일을 맡은 관청에 이 뜻을 은밀히 알린 다음 회답을 받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인종13년(1136) 9월
서하의 사신이 송나라 사신과 함께 고려에 와서 뭔가 일을 하겠다라는 의견을 피력한 것인데. 고려로서는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분명 서하와 송나라사이에 뭔가 합의한 사항이 있고, 의논하고 싶어하는 그 일이라는 것이 금나라와 관련된 일일 것이라는 것이 너무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악비가 북벌중이고, 고려가 실질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하-송-고려가 커낵션을 이루고 있다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 만으로도 금나라는 악비의 군대에만 집중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나 그런거 없어도 잘 싸워;; 나중에 내 발목이나 잡지마 니들..........
하지만 고려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 없었죠. 그해 2월달에 서경반란군이 겨우 평정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마당에, 금나라와 분란거리를 만들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려는 직접적으로 안된다고 거부하면서, 고려의 지리적 중요성을 역설하며, 자꾸 이상한 소리하면 확 금나라에 붙어버린다는 식으로 협박합니다.
우리나라는 한(漢)·당(唐) 이래로 대대로 중원(中原)을 섬겨 모든 제도와 의례를 본받고 익혀왔습니다. 더구나 우리 고려왕조는 지금까지 2백 년 동안 상국에 귀부해 역대 황제들로부터 지극한 후대와 은총을 받아왔으니 어찌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후의 도리를 지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금나라와 국토가 맞붙어 있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화친을 맺었는데, 만약 상국에서 사신을 보내 하국 사람과 같이 일을 의논했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세 나라가 몰래 모의했다고 여길 것이며 이 사실을 두고 분노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삼는다면 저희나라는 승산 없는 전쟁에 휘말려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두 나라의 완충지대가 되지 않으면 상국의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의 지역이 바로 금나라와 맞붙게 될 것이니 그리 되면 정말 상국에 불리한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또 상국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거쳐 진격한다면 금나라 역시 우리나라를 거쳐 반격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바닷가의 여러 고을은 필시 수비할 겨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난 번 상국의 양응성(楊應誠) 상서가 와서 상국은 저들 금나라와 강화하려고 할 뿐 전쟁을 하지는 않겠다고 했으나, 길을 빌려드리지 못해 지금까지도 온 나라가 죄송해 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상황이 이처럼 긴박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집사(執事)께서 이러한 사정을 깊이 짐작해 우리로 하여금 금나라와 원한을 맺지 않게 해 주시고 상국 역시 강한 금나라의 침략을 받게 될 우려가 없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인종13년(1136) 9월
고려의 뜻이 완강해서 였을까? 결국 송나라는 '그냥 한번 해본 말이야 신경쓰지마'라는 식으로 답서를 보냅니다.
송나라 명주에서 보낸 회답은 다음과 같다.
“본국 추밀원에서 황제께 보고해 결정한 공문에 따라 지난번 오돈례로 하여금 조서를 가지고 귀국으로 가게하고 아울러 상인 진서도 귀국으로 보낸 것입니다. 우리 조정이 역대로 여러 나라를 우대하여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왔건만 정강연간(靖康年間)에 벌어진 병란 이후로 사신의 왕래가 점점 어렵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하국(夏國)의 밀사(密使)가 도독행부(都督行府)를 찾아 왔기에 오돈례를 귀국으로 보내 종래 우호관계를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 듣건대 고려가 금나라와 바로 이웃하고 있다하기에 사신이 왕래하는 편에 금나라에 가 계신 두 황제를 문안할 길을 찾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서로 돕는다든가 길을 빌려 정벌에 나선다는 말은 모두 오돈례 등의 개인적 말일 뿐 조정이 지시한 바가 아니니 잘 헤아려 의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인종13년(1136) 9월
이제 금과 송은 서로 집중해서 한판 제대로 붙게되고, 드디어 고려는 외교적으로 조용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금나라의 책봉만 남았습니다.
첫댓글 오오 언제나오나 기다렸는데.. 잘 읽고가염 ㅎㅎ
너무 재밌습니다. 금나라 화이팅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