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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보고]
일본 神道의 비밀
日王, 한국말로 신라神 모신다
왜 일본에서는 신라를 철저하게 미워하고 배타시해 왔을까. 이 큰 의문점 때문에 필자는 오랜 세월 일본 속의 신라 연구에 집중해왔다. 일본왕실이 9세기 초엽부터 역사 문서에 공공연하게 신라를 적대시해온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결론적으로 그 미스터리는 일본의 국가종교가 된 ‘일본 신도(日本 神道)’의 뿌리가 다름 아닌 고대신라의 신도(神道)였다는 사실을 일본왕실이 숨기려 발버둥친 데 있다. 필자는 그 역사의 내막을 일본 고대 문헌 등을 통해 낱낱이 고증 분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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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潤基 < 문학박사·한일역사문학연구회장 > |
▼ 신라를 적대시한 일본 왕실문서 ▼
고대 일본이 신라를 배격하며 적대시한 사실은 일본왕실 문서에 그 증거가 나타나 있다. 천황가의 법령 주석서인 30권짜리 ‘영집해(令集解)’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고기(古記)’에 전하는 바에 따르자면, 일본천황의 치세 때에 조서를 내려서 묻기를 ‘이웃나라’와 ‘달갑지 않은 나라’는 어찌 구별하는가. 답하기를 ‘이웃나라는
큰 당나라이며,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이로다.”(제3권)
이 문서에서 인용한 책 ‘고기’는 서기 738년에 씌어진 역사 기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문서기록상 ‘영집해’(859∼876년 성립)가 작성된 9세기가 아닌 이미 8세기 초부터 일본은 신라를 배격해온 것이다. 이에 대해 저명한 사학자 오오와 이와오(大和岩雄, 1928∼)씨는 이렇게 지적한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을 ‘귀화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고대 역사책 ‘일본서기’(720년 편찬)에서도 3국(신라·백제·고구려)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3국을 문화의 선진국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단지 백제로부터의 문물 도래만을 강조하며, 달갑지 않은 나라(이하‘蕃國’이라고 칭함)로 취급한 것은 주로 신라였다. 신라를 번국으로 삼은 것은, 통일신라(668년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정복한 시기 이후)가
되기 이전부터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부터는 신라가 한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므로, 신라와 조선과
번국을 일체화하는 해석도 생겨났겠지만,‘일본서기’가 씌어진 무렵의 ‘달갑지 않은 나라(번국)는 신라이로다’는 다분히 신라를 적국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新羅蕃國視에 대하여’, 1978)
쉽게 말해 오오와 이와오의 견해는,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미워한 것은 신라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데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의 시대부터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나오듯이 신라·백제·고구려가 서로 적대시하며 전쟁을
했기 때문에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곱게 봤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에서 본국 백제의 멸망 이전부터 신라를 적대시한 또다른 이유도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은 538년 백제 성왕이 백제인 계열의 왜왕인 킨메이(欽明, 538∼571년
재위)천황에게 백제불교를 전파시킨 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불교가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일본 땅에서는 신라의 신도(神道)가 왜왕실을 중심으로 국가 종교로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본왕실에 백제 불교가 전파됨으로써,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는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587년)으로 비화되고마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의 종교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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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백제 계열의 왜왕 킨메이천황과 그의
아들 비타쓰(敏達, 572∼585년 재위)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간략하게 고증해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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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조선의 분국(分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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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538년 이전의 왜왕실에서 불교의 발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당시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도를 존중해왔다. 엄밀하게 지적한다면, 이
신도는 고조선의 단군 숭배 등 천신(天神)신앙이 그 원류였다고 본다. 구태여
‘신라신도’라고 분명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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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말로 제사 지내는 천황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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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고대 왜왕실에서 신라 신도 제사를 지켜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모노노베노(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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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신(園神)과 백제신(韓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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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인 ‘카라카미(韓神)’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물론 일본 천황가 내부 사항은 일체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도 근래에는 천황가 제사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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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하는 초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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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일본 천황은 토우쿄우의 천황궁 안에서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낸다. 해마다 11월23일 거행되는 천신 제사다. 역대 일본 천황들은
대신들과 신관을 거느리고 직접 신상제 제사를 지내왔다. 이때 어김없이 신라의 아지매(阿知女) 여신을 초혼하며,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의
축문을 연거푸 외우는 것이다. 이 축문이 담긴 것을 통틀어 신악가(神樂歌)라고
일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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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진천황과 한일동족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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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천황가의 조상신 제사는 철저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로부터 일본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司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다.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밝혔거니와,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오사카교육대 사학과의 토리고에 켄사브로우(鳥越憲三郞) 교수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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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된 9명의 천황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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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더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일본서기’등 고대 역사책에는 초대 왕부터 제9대왕까지의 조작된 왕들을 써넣고 있고, 제10대 왕에
신라인 스진천황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려 9명의 왕들을 날조해 놓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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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처음 세워진 神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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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권자가 가지고 건너간 신화(神話)와 신도(神道)라는 종교다. 일본 신도의 종주국인 신라에서 ‘신궁(神宮)’이 처음으로 섰다는 사실(史實)은 일본 사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다. 신사(神社)나 신궁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서 신라에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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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개국신인 스사나오노미코토는 신라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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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진천황이 종교와 함께 가지고 온 신화에도 신라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
개국의 대표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나오노미코토)’과 그의 누이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은 신라신이다.(사진3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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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카신사의 기온마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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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도의 주체인 신라신 소잔오존을 제신(祭神)으로 받드는 대표적 신사가
쿄우토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다. 야사카신사는 해마다 7월17일부터 24일까지 ‘기온마쓰리’를 거행해 소잔오존의 ‘신령’을 위령한다. 일본에서‘마쓰리’라는 제사 축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스사노오노미코토(소잔오존)에게 제사드리는 축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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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작물에 나타나는 신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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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농업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알려주는 곡식 용어를 짚어보기로 한다. 소잔오존의 신화에는 보식신(保食神, 우케모치노카미)이라는 여신이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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