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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유일한 박사의 가족들.
왼쪽부터 유일한, 딸 유재라, 댕댕이,아들 유일선, 부인 호미리 여사.
호미리 여사는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의사이다.
유일한 박사(1895-1971)
우리나라에 경영자는 많다. 돈을 많이 버는 경영자는 쉽게 생각난다. 존경할 만한 경영자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었고, 삶 자체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경영자가 있다. 바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다.
성공한 창업가
9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유일한 박사.
그의 아버지는 남다른 교육열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 박사가 9살 때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미국에서 자란 유 박사는 제너럴 일렉트릭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3년 만에 회사를 나왔다.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세웠다.
당시 중국 음식에 필수 재료였던 숙주나물은 유통이 발달하지 않아
금방 썩어 말라버리곤 했다.
유 박사는 연구 끝에 오래 보관 할 수 있는 통조림을 개발했다.
그의 숙주나물 통조림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남다른 경영 방식
많은 부를 손에 쥔 1924년. 유 박사 나이 29세 때였다.
일 때문에 한국을 밟았다.
당시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그는 고국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년 뒤, 그는 유한양행을 세웠다.
유한양행은 처음에는 국내에 필요한 약을 미국에서 수입해서 팔았지만,
1933년에는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등을 개발해 판매하게 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의 남다른 경영 사고는 당시 신문광고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의 경쟁사들은 자신의 약을 만병통치약인 듯 선전하며
소비자들을 현혹했다.
반면 유한양행은 제품 용도는 물론 약을 개발하고
만든 사람들을 밝혀 신뢰도를 높였다.
청렴결백한 유일한
유일한 박사의 남다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36년 유한양행은 1주당 50원씩 주식 1만 주를 발행했다.
자본금 50만 원을 주식회사가 됐다.
당시 유 박사를 포함한 직원 77명 가운데 24명이 주주로 등재됐다.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한 것으로 직원들과 기업의 이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실천적 모습을 선도적으로 보여줬다.
유 박사는 정경유착이 일상화였던 60~70년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에게 기대지 않았다.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아 정치가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여러 차례 당시 정부로부터 세무사찰을 받았다.
청렴한 그였기에 드러난 탈세 사실이 없었다.
오히려 성실한 세무 납부가 드러나 표창장까지 받게 된다.
시대의 양심
유일한 박사는 대표 자리를 떠날 때는 자신의 자식에 회사를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사실상 국내 최초의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손녀의 등록금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기부했다.
1971년 당시 금액으로 36억 2,000만 원.
그가 평생 기부한 금액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박사의 손녀 유일선 씨는 자신에게 남겨진 등록금 중 반만 쓰고 나머지 반은 사회에 환원했다.
20년 뒤, 딸 유재라 씨는 200억 원에 이르는 모든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유년기 시절
유일한(1895-1971)은 1905년 조선 평안도 평안부
독실한 크리스토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당시 9살에 불과한 큰 아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으로 보냈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준 미국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크리스토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중서부 특유의 타락한 문화적 분위기도 하나의 원인이 된)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1909년 입학한 그는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도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름을 바꾼 계기도 비범한데,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이라고 불렀다.
그는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한(韓)'자를 떠올리고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고,
아버지는 승낙을 넘어서 동생들의 돌림자까지 '한'자로 바꿨다.
대학교 생활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였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1922년에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우리교육에서 출판한 유일한 전기에 따르면,
청년시절에 유일한은 중국계 미국인들에게 부채, 찻잔같은
고향을 그리워하여 전통제품은 산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장사를 한 셈이다.
식품사업가 시절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일한을 아꼈다.
유한양행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때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병이나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한민족의 건강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에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유일한은 유한양행
그 이유는 라초이사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탈세하지 않았으며, 모르핀
1936년 유한양행은 한국최초로
이후 회사의 운영을 동생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유한양행의 사업 조직망 전체를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에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해방 후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고, 1971년
재산의 사회환원
독실한침례교 신자인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예수님
그래서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
2.3. 청년 사업가
자신의 힘으로 1919년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중국계 호미리 이기에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교통사고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이후 1925년에
결혼해 1녀 1남을 얻었다.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부인 호미리에게는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한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아래서 백성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것을 뜻하는)
버드나무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1929년(1948년? 1953년?)에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1926년에 귀국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중국에 갔다가 북간도
부모는 큰 아들 유일한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병이나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인 《탈출기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 보낸 줄 아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 일을 하라" 는 식으로 꾸짖었다고 한다.
몸소 민족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고민 끝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왔다.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anti(안자라는) flame(염증을 일으키다)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인이었던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그의 경영 철학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
약장수가 신문에 진출한 격.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 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하였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꾸준한 납세를 고집했던 이유는 라초이 사 경영을 하던
시절, 자신과 거래하던 녹두 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1939년 유한양행은
2.6. 해방 이후의 삶
해방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1952년에는전쟁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군부정권은 각 기업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내놓으라고 압박했고,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박정희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유한양행에 세무조사를 지시했고,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세무사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기는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받았다고 한다.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에게
유한양행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1971년 3월 11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타계하였고 유한공고
죽기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연세대병원(현 세브란스병원의학세브란스 병원유한양행을 세우기 전에
에비슨 박사로부터 "세브란스에서 일해 보겠냐"는
제의를 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 씨가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그에게 여러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 씨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 씨를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 회장은 결국 의견 차이가 벌어졌다.
유일한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유일선 씨는 부사장 취임 후
오직 기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기업인으로써 전혀 틀린 자세는 아니지만,
평생 국민건강, 나라를 위해 살아온 유일한 회장의 입장에서 아들 유일선 씨의 이러한 의견은 그의 신념과 충돌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회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했던 연만희 씨와 대화에서 유일한 회장은 연만희 씨에게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비롯한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고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 유한양행
게다가 이 전문경영인 임명도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하였다.
2017년 기준 현 CEO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5. '유산'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 회장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만 제외하고 자신의 재산을 전액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407억 원이다. "뭐 이리 적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1971년 지금도 407억 원의 재산이면 평생을 풍족하게 살 수 있는데, 물가 상승률을 따지면 2012년7,085억원이 된다. 3대가 평생 놀고먹을 이 천문학적인 액수가 사회를 위해 환원됐다는 거다.지식채널 e 참고로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라면은 20원, 짜장면 60원, 커피 60원, 담배는 60~100원, 쌀참고자료 # 이런 생필품 물가로만 따져 본다면 100배 정도의 가치가 된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