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겹의 사람)
1.
전철에서 맞은편에 앉았는 아주머니를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가정하면
처음에는 '이노무 할배, 기분 나쁘게 왜 빤히 쳐다볼까' 하겠지만
두어 정거장 지나칠 테까지 계속 응시한다면 어떨까?
상대는 적지않게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더럭 겁이 날것이다.
'어머나~ 혹시 윗도리 단추가 풀려서 알몸이 드러난 건 아니겠지'
'아고~ 무시라 무슨 헤꼬지를 안당할지 모르겠네'
당황스러워 엉거주춤 본연의 자세가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을 양자역학에서는
관찰하면 대상의 상태가 바뀐다고 하여 관찰자 효과라고 한다는데
관찰자 효과라는 것이 꼭 이런 단순한 사실만을 언급하는 이론은 아니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을 학자들은 때로 이렇게 낯선 말로 다시 포장해 돌려준다.
아무튼 관찰받는 존재의 흔들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인간의 약한 모습이며 모순이다.
2.
어느 날
썩은 내 기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 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봄비)
그런데 관찰당하는 존재로부터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천편이 넘는 시를 쓴 정호승 시인은 학자들처럼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거창하게 다작을 내세우지도 않으며
스스로를 파헤치지 못하는 내면을 다 캐내지 않고 인간의 약함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며 그냥 덮어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서지 않고 뽐내지도 않는 그의 시는 인간의 약함을 꾸미지 않고 보여준다.
3.
그러나 관찰당하는 존재에서
안으로 침잠하던 마음을 밖을 향해 손을 내밀어도 세상은 꼭 그렇게 순순하지는 않다.
2006년,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버스에서 내리던 청년은 자신 앞에서 버스를 내리다 넘어져 다친 노인을 부축해서 병원에 데려다준다.
그때 연신 고맙다고 했던 노인은 이후 청년이 자신에게 부딪혀 넘어지게 되었다며 청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담당 판사는 청년에게 "당신이 밀치지도 않았는데 왜 노인을 부축했는가?"라고 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남을 돕게 되면 난처한 일에 휘말리게 된다며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냉담해하는 웨이관 문화가 성행하게 된다.
선의를 베풀고 나면 그 선의가 되레 올가미가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는 걱정탓에
이타심은 이렇게 종종 세상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선의가 배신당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과 악을 가진 인간의 약한 모습이다.
4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
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춰주겠네
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다면
이름 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
~~~~~~~~~~~~~~~
(중략)
~~~~~~~~~~~~~~~
너무 멀리 서있는 내 사람이여
너무 멀리 서있는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 백창우)
그럼에도 종종 험한 세상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그 두려움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가능성을 백창우는 노래했다.
세상이 아무리 웨이관의 논리로 돌아가더라도 , 누군가는 여전히 너무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고 싶어 한다.
인간의 선함이며 사랑이다.
5.
그리고 흙 묻은 손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1167년 고려 의종은 중미정 남쪽에 배를 띄울 수 있는 연못을 만들게 했다.
중미정 공사에 징발된 역졸들은 사적으로 양식을 지참해야 했다.
그중 한 역졸은 너무 가난하여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하여 함께 일하는 역졸들이 매일 한수저씩 나누어 이를 먹게 했다.
어느 날 그의 처가 음식을 장만해서 찾아와서는 말하기를
"의당 친하게 지내는 이들을 불러 함께 드시지요"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음식을 장만했는가,
다른 사람과 사통 하여 얻은 것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친 것인가?"
"용모가 추하여 누가 더불어 사통 하려 할 것이며
성품이 서투른데 어찌 도적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머리카락을 잘랐을 뿐이요"
역졸이 흐느껴 울며 음식을 들지 못했다.
가난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든 그 짧은 순간,
자신이 아내에게 던진 말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목에 걸렸을 것이다.
관찰당해 흐트러지는 존재,
스스로를 다 파헤치지 않는 조심스러움,
손 내밀기를 주저하게 하는 세상,
다 주고 싶은 마음,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낸 부부에 이르기까지 —
사람이 산다는 것은 여러 겹이다.
그 모든 결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사는 일이, 아마 사람으로 산다는 일일 것이다.
첫댓글 관찰자나
관찰받는자의 존재의 흔들림이나
선함이나
그 선함이 악으로 받아지거나 말거나
그래도
이 모든 결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사는 일이 사람으로 사는 일이다! 라는
말씀 깊이 공감합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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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구~
깊이 공감해주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억수로 무덥다던네 어떤가요 ~ 양프리카라고 하데요, 말도 참 잘 만들어요 ~
글을 짜임새 있게 참 잘 쓰십니다.
중국의 웨이관문화에 대한 글을 보면서
지인 생각이 겹쳐 보이네요.
지인이 좋은 의도로 노인을 차에 태워
목적지에 내려드리고 후진 하다가
살짝 노인 몸에 닿은 모양입니다.
노인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간병비까지 요구해서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좋은 의도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가 있지는 않다는걸
알게된 사건이었습니다.
새하마노님~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나,
지난 글도 오늘 글도 과분한 댓글 주셔셔 고맙습니다,
노트에 큰 글씨로 적어 두었어요, 제라님에게는 특별히 고급 초코렛 한통 선물해야겠다 ~~~~~~~잊지말고 !
양자역학 이 어려운 학문인줄 알았더니~~
웨이관(圍觀) 둘러서서 바라 봄.
20년 전 중국 난징의 이야기 군요.
우리도 무섭습니다
손지갑, 휴대폰, 비닐주머니
하나라도 건드리면 불려다닙니다.
(외국인들은, 우리가 공중도덕이 높아서
손 안대는 줄 알고 있음)
반갑습니다, 향적님 ~
외국인들은, 우리가 공중도덕이 높아서 손 안된다, ㅎㅎㅎ
맞아요, 가끔 우리가 대단하다고 하는 동영상 있어요 ~~~~~~~~~
내가 베푼 선의가 나를 난처하게 하는 올무가 될 가능성, 경계하게 됩니다.
전에 이웃 학교 교사 운전자 포함 세 명이 카풀로 출퇴근을 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선의로 날마다 동료를 차에 태워다 주던 그 운전자 선생님은 졸지에 큰 책임 부담을 지게 되고,
사고 수습이 원만하게 안 되자 동료들은 원수 지간이 되고,
교육청에서는 관내 각 학교에 카풀 금지 공문을 보내고, 그랬던 일이 생각납니다.
참 난감한 경우입니다.
교육청 공문까지 보냈다니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래서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자기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는 길에 옆집 아이가 같은 학교 다녀도 절대 태워주지 않아요, 당연히 이웃은 요청하지 않는 불문율입니다.
관찰자 스스로 수많은 벽을 쌓고 살고, 관찰을 받는 자 또한 그러할지라 겹겹이 쌓인 벽속에서 중심 잡고 살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벽안에서 자유롭고 싶어 벽을 낮춰보려 했지만, 금연처럼 쉽지가 않아 금세 다시 벽에 갇히고 말더군요. 금연은 어느날 갑자기 성공했는데... 벽도 겹도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경계가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공연히 발동이 걸렸지만 이만 해야겠습니다. 곧 아래 조용한 곳으로 내려가야겠어요 ~
본문의 글처럼 답답해 하지 마시고 무서우리만큼 광활하고 빵 뜷린 길 위에서 편안하세요 ~~~~~~~
관찰자라하니
지난번에 쓴글 "그 해 여름......."
그 글을 쓰고보니 갑자기 너무 불편한 진실인듯 해서 지웠어요
누구든 그 아파트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언제든지 그 글을 볼 수도 아픈 상처를 건드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댓글 달아주신 여러님들께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새하마노님 글을 통해 사죄 드립니다
제 글 바로위에 올려졌던 글이라 기억합니다.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그럴수도 있겠네요. 글쓰기 어려움 중의 한가지라 하겠어요~
우리네 인간의 약한 모습 그리고 모순에 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어차피 모두 다 함께 어울려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
그렇습니다.
모두가 같을순 없으니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더불어 가는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를 한것 같습니다. ~^^
좋은 글에 하루를 마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새하마노님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함을 늘 가슴에 안고 삽니다
그렇지요 늘 안고 살기만 할 뿐 한번도
세상의 잣대 앞에서는 착함을 잊은 척할 뿐이지요
그래도 착한 사마리아인 흉내 낼 날을 꿈꿉니다.
착함을 안고 살면서도 세상 앞에서 그걸 짐짓 잊은 척 한다는 말씀이 정직합니다.
청년도, 그 순간엔 계산하지 않고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을겁니다.
흉내 낼 날을 따로 정해두지 않아도, 그렇게 몸이 먼저 나가는 날이 있겠지요.
그때까지는, 잊은 척하면서도 가슴에 품고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사마리아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 혼자 볼수없어 카톡 으로 20 에게 함께 합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시니 고마운 일이지만 쑥스럽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