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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예썰의 전당> [9회] 삶의 빛과 그림자 - 렘브란트/ 2022년 7월 3일 22:30 방송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아홉 번째 주제는 빛의 화가 렘브란트
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국민화가다. 하지만 화려한 명성과 달리 그의 말년은 초라했다. 렘브란트의 굴곡진 인생은 그가 남긴 자화상과 그의 다른 그림에도 잘 드러난다. 예썰박사들과 함께 렘브란트의 삶과 작품에 얽힌 예썰을 풀어보자.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열었으며 서양 미술사상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힌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주요 작품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베드로Peter Denying Christ)>와 <루크레티아(Lucretia)>.〈야경(Nightwatch)〉.〈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플로라처럼 분장한 사스키아(Saskia as Flora)〉 등 유화와 소묘, 에칭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미술사의 거장으로 수많은 초상화와 자화상은 인간의 성격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며, 소묘는 당시 암스테르담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뛰어난 판화 기법을 터득한 그의 에칭화는 생전에도 고가에 팔릴 정도였고, 후대 판화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는
생명이 없는 시신과 같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ㅡ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 예썰 하나, 렘브란트가 ‘빛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비결?
렘브란트는 평생에 걸쳐 100여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다. 오늘날로 치면 셀카 중독이라 할 만한 렘브란트가, 자화상을 그릴 때 신경 썼던 부분은 ‘빛’. 그의 자화상에 보이는 표준화된 렘브란트식 조명법, ‘렘브란트 라이팅’은 지금도 인물사진에 흔히 쓰인다. 또한 자화상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렘브란트만의 명암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연출해 ‘빛의 화가’라 불린 렘브란트. 그가 빛에 민감한 이유는 그의 고국 네덜란드와 관련 있다. 무엇이 렘브란트를 ‘빛의 화가’로 만들었을까.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기수(The Standard-Bearer·旗手)’, 1636년
네덜란드 정부가 국보로 내세우는 17세기 거장 화가인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자화상 중에서도 첫 손 꼽히는 ‘(The Standard-Bearer·旗手)’(1936년)를 1억 7500만 유로(약 2331억원)에 사들일 계획이라고 영국 BBC 방송과 로이터 통신이 2021년 12월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는 평생에 걸쳐 여러 자화상을 남겼는데 ‘기수’는 서른 살 무렵의 자신감을 내뿜는 스스로를 캔버스에 옮겼다. 특히 당시는 네덜란드가 독립을 놓고 스페인과 격돌한 80년 전쟁(1568∼1648년)으로 들끓던 시기였다. 네덜란드는 이 전쟁 후반부터 황금시대를 누렸고, 전쟁 끝에 독립도 쟁취했다.
이 작품은 저유명한 유대계 가문인 로스차일드의 프랑스 혈통이 1844년 이래 소유해 왔다. 프랑스 정부는 한때 이 작품을 국보로 지정할 정도로 집착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프랑스가 구매 권한을 포기하고 공개 시장에서 거래를 허용한 이후 작품 구매를 추진해 왔다.
이 작품은 2019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전시된 적이 있으며, 고국에 돌아와도 이 미술관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잉그리드 판 엥겔쇼번 네덜란드 문화부 장관은 성명을 발표해 “‘기수’는 몇몇 나라를 순방한 뒤에 고국으로 완전히 돌아올 것”이라고 밝혔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23세의 자화상’, 1628년
〈명상하는 철학자〉, 1632, 유화, 28x34cm, 루브르 박물관 - 빛의 원조 렘브란트의 조명이 잘 표현된 작품.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Little Self-Portrai'.t 1656-58년, Oil on wood, 48,5x 40,5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
렘브란트는 특히 초상화에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담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재능을〈자화상〉에서도 발휘했다. 22세 때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은 독일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인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1749-1832)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탄생한 작품이《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이다. 괴테는 이 작품 속에서 젊은 날 꿈을 접고 우울과 방황의 날을 보내던 자신을 떠올리며, “꿈이 없는 청춘은 시체나 다름없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베드로(Peter Denying Christ)>, 1660년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루크레티아(Lucretia)>,
1664년, 120x101cm, National Galiery of Art, Washington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1653, 판화, 국립도서관 파리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문지방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 1639년, 동판화에칭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제분업자 하르멘 헤리트스존 반 레인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0년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며, 야코브 반 스바넨뷔르흐 아래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그림과 판화를 배웠다. 1624년경부터 독립 화가로 활동했으며, 1630년경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역사화가 피터르 라스트만을 스승으로 모시며 도제들을 가르쳤다. 라스트만의 공방에 있던 기간은 약 반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는 렘브란트의 화풍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라스트만의 영향으로 장르적인 구성, 완벽한 데생과 이상적인 인체 표현 등의 고전적인 회화 방식에서 탈피해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심리 묘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발람의 당나귀〉,〈토론하는 두 철학자〉.〈성 베드로의 부인〉등에서는 라스트만의 화풍이 엿보인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발람의 당나귀〉, 1626년, 파리 코냑 제 박물관
렘브란트는 미술상 헨드릭 윌렌부르흐와 함께 일하면서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고, 1632년 외과의사 조합의 의뢰로 첫 번째 집단 초상화인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완성하면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가 되었다. 튈프 박사의 공개 해부 강연을 그린 이 불멸의 명작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이 인물들의 개성을 담아내는 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 예썰 둘, ‘영 앤 리치’했던 렘브란트를 한순간에 몰락시킨 작품? <야경(夜警)>에 숨겨진 비밀
25살에 그린 집단 초상화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스타 작가가 된 렘브란트. 남다른 그림 실력과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다. 하지만 평생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영 앤 리치’ 렘브란트는 그림 하나를 계기로 몰락한다. 그 작품은 바로 <야경(夜警, 야간순찰)>. <야경>은 렘브란트의 대표작이자 네덜란드의 국보급 미술품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림을 의뢰한 민병대는 물론 미술계에서도 혹평을 받았다는데? <야경>이 ‘밤’이 아니라 ‘낮’을 그렸다는 사실부터, 작품의 모서리가 잘려나가는 수난의 역사까지. 렘브란트를 한순간에 몰락시킨 작품, <아경>의 비밀을 파헤친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아내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 1935년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932년, 캔버스에 유채, 169.5×216.5cm, 네달란드 헤이그 마우리트하우스 왕립 미술관
1634년, 렘브란트는 윌렌부르흐의 조카 사스키아 반 윌렌부르흐와 결혼했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모델로 수많은 소묘와 유화를 그렸는데, 대표적인 작품이〈플로라처럼 분장한 사스키아〉.〈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사스키아〉 등이다. 또 그해에는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하여 독립 장인의 지위를 받았다. 윌렌부르흐에게서 독립한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 수많은 부를 축적했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초상화 주문은 줄을 이었고, 많지는 않지만 성서를 주제로 한 연작과 대작 역사화들도 주문받아 화가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플로라처럼 분장한 사스키아(Saskia as Flora)’,
1634년, 캔버스에 유화, 124.7×100.7cm,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렘브란트 부인 사스키아 초상화〉, 1635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Saskia)〉, 1643년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의 다른 유대인 신부〉,1641년
렘브란트의 그림은 강렬한 명암 대비가 특징으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대비시켜 입체감을 드러내 그림에 극적인 효과를 주었다. 이를 키아로스쿠로라고 하는데, 16세기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창안한 것이다. 또한 렘브란트는 독일 화가 아담 엘스하이머의 명암법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렘브란트는 유화뿐만 아니라 에칭[Etching:동판 면에 그라운드를 입히고 뾰족한 도구로 밑그림을 그린 후 동판을 부식액에 넣으면 동판에 홈이 패여 선 형태가 새겨지는데 잉크를 발라 압착시켜 종이에 옮기면 판화가 완성된다.]과 드라이포인트 기법[Drypoint:동판 위에 조각침(彫刻針, 예리한 도구)으로 판을 긁어 만드는 오목 판화로 동판화의 기법 중에 하나.]을 이용한 판화도 많이 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판화를 독학으로 연구할 만큼 판화에 특별한 애정을 기울였다고 한다.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를 모델로 제작한〈늙은 여인의 흉상〉.〈늙은 여인의 얼굴〉과 암스테르담 시절에 제작한〈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화가가 판화에 있어서도 특출난 재능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또한 초상화가로서 자신의 자화상을 평생 그렸던 그답게 사스키아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동판화도 남겼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예루살렘의 파괴를 탄식하는 예레미야〉,
1630년,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1642년, 에칭 드라이포인트 뷰광, 27.8×38.96cm
1630년대에 렘브란트는 성서를 주제로 한 에칭을 여러 점 제작했다.〈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목동들에게 예수 탄생을 알리다〉 등이다. 그는 에칭에 있어서도 빛과 어둠의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가령 윤곽선을 진하게 그리는 경우에는 색조를 연하게 사용하거나 아예 윤곽선을 지우고 형태와 광휘를 드러내도록 색채를 사용하여 어둠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1642년, 아내 사스키아가 한 살 된 아들 티투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다섯 아이가 태어났으나 살아남은 건 티투스 하나뿐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졌으나 화가로서의 렘브란트는 완숙기에 접어들어 풍부한 작품 세계를 펼쳤다. 대표작〈야경〉은 이때 탄생했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 길드 클로베니에르 회관이 완공된 기념으로 그려진 단체 초상화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활동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렘브란트는 기존의 단체 초상화와 달리 극의 한 장면을 보듯 화면을 연출했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기 있는 표정과 몸짓, 극적 효과를 더해 주는 명암 대비로 전체 화면에 긴장감과 활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부유한 시민들의 의뢰로 그려진 이 작품은 단체 초상화로서 큰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비중이 각기 다른 점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인물이나 명암 효과로 인해 얼굴이 가린 인물이 생긴 게 문제였다. 자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항의하면서 이 그림은 후원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렘브란트의 명성도 떨어졌다.
✵ 예썰 셋, ‘빛’의 화가가 ‘빚’의 화가로, 렘브란트가 불행한 말년까지 자화상으로 남긴 이유
렘브란트가 50살이 되던 1656년. <야경> 이후 작품 의뢰가 줄면서 사치로 쌓인 빚을 갚지 못한 렘브란트는 결국 파산한다. 모든 소장품이 경매에 팔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는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끝까지 붓을 놓지 않고 자화상을 그렸다. 빛나는 전성기는 물론 불행한 말년까지 자화상에 담아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렘브란트. 렘브란트가 자화상을 통해 남기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야경;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럼 반 로이텐부르크의 민병대(The Night Watch)〉, 캔버스에 유채, 1642년, 363×438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네덜란드 국보
여기에〈야경〉의 일로 작품 주문이 줄어들었고, 사스키아가 죽기 전 무리하게 집을 장만한 데다 무모하게 투기를 하면서 렘브란트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렘브란트는 사스키아가 죽은 후 집안 하녀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재혼할 경우 사스키아의 재산을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게르테라는 하녀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겨 렘브란트의 명성은 더욱 떨어졌고, 하녀 헨드리케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여 교회 위원회에 간음죄로 소환되기까지 했다. 헨드리케는 그의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다.
채권자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렘브란트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율법의 석판을 깨뜨리는 모세〉.〈성 베드로의 부인(The denial of St Peter)〉.〈포목상 조합 이사들(Syndics of the Drapers' Guild)〉 등의 작품에서 화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보였으며, 하녀들과 아들 티투스, 자신을 모델로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신이시어, 저는 신께서 주신 소명을 다했습니다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십계명 돌판을 깨뜨리는 모세〉, 1659년, 베를린 시립박물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성 베드로의 부인(The denial of St Peter)〉,
1660, 캔버스에 유채, 154×169cm, 네덜란드 국립박물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Syndics of the Drapers' Guild)〉,
1662,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렘브란트만큼 자화상에 매료되어 있던 화가도 없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꾸준히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으며, 말년에는 더욱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자신을 때로는 화가로, 때로는 신사로, 때로는 이야기 속의 인물로 표현했다. 예컨대〈웃고 있는 제욱시스〉는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늙고 주름진 노파를 그리면서 웃음을 참았다는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미소 짓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65, 82×63cm, 독일 쾰른 발라프 리하르츠 박물관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의 빈민촌. 한 노인이 쓸쓸히 죽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의 최후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꼽혔던 그가 왜 이런 말년을 맞았을까. 빚 때문이다. 가난 속에서 죽어 간 늙은 화가의 무덤은 비석 하나 없이 초라했다. 죽을 무렵 렘브란트는 유행에 뒤떨어지고 한물간 잊힌 화가였으나,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하여 19세기에 네덜란드인이 과거의 황금시대를 돌이켜보며 네덜란드를 빛낸 천재 화가로 적합한 인물을 찾으면서 다시 부각되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돌아온 탕자(蕩子)(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69년, 캔버스에 유채, 262x205cm, 에르미타슈 미술관
신약성서《루가의 복음서》15장의 '돌아온 탕아' 이야기에서 집 떠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온 마지막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아버지는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밝은 빛으로 강조된 인자한 얼굴과 흰 수염, 하얀 손 등으로 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아들의 남루한 모습과 옷차림은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뒤에 어둡게 묘사된 사람들은 시기와 무정과 죄악을 상징한다. 역사상 위대한 종교화가인 렘브란트는 인간 내면의 사악한 마음과 그에 따른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성서에 담긴 모습을 형상화하려고 하였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돌에 맞아 죽는 성 스테파누스(Stoning of Saint Stephen)>, 1625년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캔버스에 유채, 1635~1636년, 161×131cm, 소장처 불명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아기 예수를 안은 시몬〉,
캔버스에 유채, 1669년, 98×79cm, 덴마크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돌다리가 있는 풍경〉,
캔버스에 유채, 1638, 28×40cm, 독일 베를린 국립 미술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목욕하는 여인〉, 패널에 유채, 62×47cm, 1654, 내셔널 갤러리/
〈아카디아 옷을 입은 샤스키아〉, 캔버스에 유채, 124×98cm, 1635, 내셔널 갤러리, 런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목욕하는 수잔나(SUSANNA SURPPISED BY THE ELDERS)〉,
1606~1669,1637년경, 板 油彩, 47.5×39Cm, 덴 하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간음한 여인〉, 목판에 유채, 84×65cm, 1644, 내셔널 갤러리/
〈아르테미시아〉, 캔버스에 유채, 142×152cm, 1634, 프라도 미술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Sacrifice of Isaac)〉,
163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박물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1633, 캔버스에 그린 유화, 160×127cm,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이 그림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 있었지만 1990년에 도난당하여 현재 행방불명 상태이다. 마가복음 4장에 설명된 대로 갈릴리 바다의 폭풍 을]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이다. 수직 형식의 이 그림은 고기잡이 배를 다시 통제하기 위해 심한 폭풍에 맞서 미친 듯이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거대한 파도가 활을 치고 돛을 찢는다. 제자 중 한 명이 옆으로 토하는 것이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오른쪽에 묘사된 그리스도만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렘브란트의,〈파우스트〉/ 렘브란트가 서재에 있는 파우스트를 묘사한 삽화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유태인 신부 Jewish Bride>,
캔버스에 유화, 121.5×166.5cm, 1662~1668년,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 렘브란트의 자화상 - 인간에 대한 이해와 자기성찰의 기록
화가 제욱시스로 분장한 모습, 심지어는 여자로 변신한 모습도 그렸다. Self-Portrait, c. 1641 Oil on panel... 등,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자화상에 표현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1628년, Oil on panel, 22,6x18,7cm, Rijksmuseum, Amsterdam
고금을 막론하고 화가들에게 자신의 얼굴만큼 흥미있는 소재도 드물다. 본질적으로 가장 친숙하면서 애착이 가는 대상인 동시에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캔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는 가장 값싸고 편리한 모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ca'.
1629년, oil on paneel, 37,9x28,9cm, Mauritshuis Royal Picture Gallery, The Hague
이 모델을 가장 집요하게 이용하고 탐구한 대표적인 작가라면 단연 17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를 꼽을 수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화상을 그렸다. 현재 램브란트의 그림은 대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중 가장 사랑받는 작품은 그의 자화상들이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also known as the Bust of a laughing young man)',
1629년, oil on paneel, Rijksmuseum, Amsterdam
다소 냉소적이면서도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던 그는 인기 있는 초상화가로서의 명성과 부를 누리던 젊은 시절부터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에 시달리던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자신을 그렸으며, 80여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다. 미술사를 통틀어 이처럼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는 득히 드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자화상'은 성공한 30대 화가의 지위와 야심을 보여준다. 1640년
구도에서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와 티치아노의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라파엘로, 티치아노뿐 아니라 그들의 모델과도 경쟁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궁중 대신 카스틸리오네와, 같은 시대의 시인인 아리오스토를 참조함으로써 화가는 자신이 초상화를 주문한 저명인사와 사회적 신분이 동일하고, 손의 예술로만 여겨져 왔던 그림이 정신적 예술인 시와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젊은 시절에 그린 자화상들을 보면 한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화가가 연극 배우를 능가할 만큼 다양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자세와 표정, 감정을 연출하면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십점이나 그렸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ait with Helmet,
1634년, Oil on Wood, 80.5x66cm, Staatliche Museen, Berlin
그는 다양한 인물로 변신하려고 작업실에 각종 의상과 소도구를 마련하는 등 사전 준비도 철저히 했다. 외양뿐 아니라 갖가지 표정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보면서 세밀하게 관찰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in Oriental Attire',
1631년, Oil on Panel, 66.5x52cm. Musee du Petit Palais, Paris
예를 들면 손에 하프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 술에 취한 모습, 거지와 신사, 경찰, 청소부, 군인으로 변신한 모습, 동방의 군주, 사도 바울,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로 분장한 모습, 심지어는 여자로 변신한 모습도 그렸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1641년, Oil on panel, 63.2x50.2cm, Norton Simon Museum, Pasadena
주먹코를 부각시키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근심에 잠기고, 오만하게 굴고 환멸감을 드러내고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짖는 등,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자화상에 표현했다. 화가가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이토록 예리하게 포착하고 연구하고 분석할수 있었는지 거의 경이로울 정도이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wearing a Hat and two Chains ca'.
1642-1643년, Oil on panel, 72x54.8cm, Museo Thyssen Bornemisza, Madrid
렘브란트가 숱하게 변신을 시도한 의도는 무엇일까? 자신이, 아니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찰하기 위해서이다. 아울러 시대적인 분위기도 렘브란트가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로 자화상을 그릴수 있도록 영향을 끼쳤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in military costume', 1650년,
oil on panel, 128x103.8cm, Fitzwilliam Museum at the University of Cambridge
렘브란트가 살던 시절 유럽의 지식인들은 삶의 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했다. 일기, 회고록과 같은 개인적인 기록물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지식인들은 자전적인 산물들이 철학적 성찰과 자기 탐색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렘브란트도 이런 시대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1659년, oil on canvas, 84.5x66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다양한 유형의 인물로 분장한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탐색했다. 그러나 램브란트가 말년에 그린 자화상은 젊은 시절의 자화상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젊은 시절의 호승심과 격렬한 정서가 연륜에 의해 걸러져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성찰이 배어나온다. 내면의 성찰보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담고 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as the Apostle St Paul',
1661년, Oil on canvas, 91x77cm, Rijksmuseum, Amsterdam
위 그림은 렘브란트가 세상을 떠나기 9년전에 그린 자화상이다. 화가는 비록 자신을 바오로성인으로 연출했지만, 더이상 관람객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는다. 주름이 깊게 패인 이마,. 단호하게 다문 입술, 깊고 그윽한 눈빛은 오직 자신의 내면만을 응시한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달관이나, 체념, 고독의 분위기도 풍겨나온다. 그토록 자신 만만하던 렘브란트가 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는 왜 이토록 쓸쓸한 표정을 짓는 것일까? 바로 그가 아끼는 모든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c'.
1659년, oil on canvas, 68x56.5cm, Staatsgalerie, Stuttgart
스타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렘브란트는 이 자화상을 그릴 무렵에는 생애 최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화가로서의 경력이 쌓이면서 렘브란트는 고객의 취향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림을 의뢰하는 주문자의 요구사항은 뒷전이고 예술성을 강조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1660년, Oil on canvas, 67.5x80.5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Manhattan
1679년 독일 출신의 화가 마티아스 샤이츠는 렘브란트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렘브란트는 뛰어난 예술성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생의 마지막 시기에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결국 그의 개성적인 화풍을 고객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그림의 주문이 끊기면서 화가는 파산했다. 빚더미에 앉게 된 렘브란트는 냉엄한 현실과 예술적 이상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렘브란트의 빛나는 명성도 사라졌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1658년, oil on canvas, 133.67x103.82cm,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집과 작품, 수집품들을 처분해야 했고, 자기 그림을 맘대로 팔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던 말년의 십여 년 동안 렘브란트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자화상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려진 작품 중의 하나인 1658년의 자화상에서는 아무런 가장 없이, 얼굴과 눈빛만으로 위엄을 전달하는 화가의 모습이 화면 밖으로 살아 나올 듯 생생하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with Two Circlec'. 1665-1669년, Oil on Panel, 114.3x94cm. English Heritage, Kenwood House The Iveagh Bequest, London
1642년에 죽은 아내 사스키아 대신 아들 티투스를 키워주고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던 헨드리케도 1663년에 죽었고, 1668년에는 티투스도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갈수록 심해져 1662년에는 사스키아의 묘지터까지 팔아야 했다. 화가는 가족과 재산과 명예를 잃었지만 그림을 멈추지는 않았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as Zeuxis c'.
1668년, Oil on canvas, 82.5x65cm, Wallraf-Richartz-Museum, Cologne
위 작품은 그의 나이 예순, 죽기 4년 전에 제작된 자화상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못생긴 노파를 그리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었다는 화가 제욱시스(Zeuxis)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빚더미와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처절한 시기에 문득 거울 앞에 선 노화가의 자조어린 심정이 충격적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명성을 떨치던 그의 젊은 시절에 자신감의 상징으로 등장하던 금빛 휘장과 터번이 이제 왜소하고 희극적인 늙은이의 모습과 대조되어 헛된 추억만을 상기시킨다. 화가는 웃음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휘발되어 사라져 버릴 듯한 모습이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 Portrait at the Age of',
1963-1669년, Oil on canvas, 86x70.5cm, National Gallery, London
렘브라튼의 전기를 쓴 에밀 미셀은 그의 자화상은 내면의 일기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끊임없이 창작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던 사람,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시련도 당연한 업보라는 듯 좌절하지 않고 이겨낸 사람....
오직 예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죽는 순간 까지 지켜낸 사람,
이런 진실된 성품과 천재성은 필연적으로 시대와 불화를 빚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갈등을 그림에 솔직하게 표현한 화가는 오직 렘브란트 뿐이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1669년, oil on doek, 65.4x60.2cm, Mauritshuis Royal Picture Gallery, The Hague
렘브란트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자신의 영혼을 해부하고 분석한 결과물을 자화상에 표현했다. 화가의 눈빛은 관람객에게 무언의 언어를 전달한다. 그는 인간이란 자기 성찰을 하면서 삶을 완성하는 존재라고 말하는것인지도 모른다.
Self-Portrait in a Cap, Open Mouthed, 1630, Etching; only state, 5.1x4.4cm, Norton Simon Museum, Pasadena/ Self-Portrait, 1629, Oil on Oak, 15,6x12,7cm, Alte Pinakothek, Munich/ Self-portrait ca. 1629, oil on wood. 17x13inch, Indianapolis Museum of Art, Indiana/ Self Portrait with Plumed Beret, 1629, Oil on Canvas, 89.5x73.5cm,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Boston/ Self Portrait with Beret and Gold Chainc. 1630-1631, 69.7x57cm. oil on wood,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Self Portrait with a Wide-Brimmed Hat, 1632, Oil on Wood, 64.4x47.6cm. Glasgow Museums, The Burrell Collection, Glasgow
Self-Portrait Wearing a Toque and a Gold Chain, 1633, Oil on wood, 70x53cm, Musee du Louvre, Paris/ Self Portrait c.1633, oil on wood, 56x47cm, Staatliche Museen , Berlin/ Self Portrait, 1634, Oil on Canvas, 58.3x47.4cm, Staatliche Museen, Berlin/ Self Portraitc. 1639, oil on wood, 80.5x62.8cm/ Self Portrait c.1645, Oil on Wood, 68.5x56.5cm, Staatliche Kusthalle, Karlstruhe/ Autoportret, 1652, Public Collection
Little Self-Portrait, 1656-58, Oil on wood, 48,5x40,5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 Self Portrait with Beret and Turned-up Collar c. 1657, Oil on canvas, 52.7x42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Self Portrait,1669, Oil on panel, 63.5x57.8cm. Mauritshuis, The Hague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깨달았을 때
작품은 완성된다."
ㅡ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렘브란트,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는 예레미아’, 1630년, 오일에 패널, 58ⅹ46cm
빛에 둘러싸인 노인이 지치고 낙심한 모습으로 동굴 속의 커다란 기둥 아래 앉아 있다. 그는 털을 두른 겉옷을 입고 ‘성경’이라고 쓰인 책에 기대고 있는데, 성경은 돌무덤 위에 있다. 성경 앞에는 반구 모형으로 장식된 커다란 그릇이 있고, 그 안에는 금으로 장식된 전례 용기들과 주머니가 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리고 있다. 정교하게 짜인 진홍색 양탄자는 노인의 모습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그런데 왼쪽으로 멀리 불타는 성읍 속에 성전이 보이고, 한 사람이 불길을 피해 성읍을 빠져나가고 있다. 예루살렘의 타락을 상징하는 호화로운 장식품 위에 팔을 괴고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이스라엘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계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에 귀기울이지 않고, 결국 586년 멸망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9회] 아홉 번째 주제는 빛의 화가 렘브란트, 〈한눈에 반한 서양미술관(도서출판 거인),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청아출판사, 김영은)〉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