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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초 서부유럽의 주택건축은 그 시대의 불안정함을 반영하였다.
봉건 영주와 남작의 성은 단지 두꺼운 벽체 뒤에 상대적인 안정감을
누리기 위해 견고하게 요새화 되었다. 이들 성은 아름답고 인상적이기는 했으나 현대적 기준에서 보면 춥고 안락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주로 농촌 사회에서 살았고 몇몇 영주의 농노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두막은 일반적으로 밀짚과 잔가지를 엮어 찰흙을 붙여 만들었다.
13-14세기에 걸친 백년동안 사부유럽도 큰 변화를 맞았다. 중세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여겨지는 고딕(Gothic)양식이 처음 발달되기 시작했을 때로 여전히 수도원과 중세 봉건성이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중세에서부터 19세기까지 가구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거의
없는 상태에서 풍부한 상태로, 그리고 조잡한 단계에서 매우 기술적인 단계로 발달되었다. 중세의 가구 중 현존하는 것은 아주 드물다. 이
시기의 가구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 채색된 사본, 나무나 상아, 돌등에
새겨진 부조, 그리고 당시의 기록이나 재산 목록 등에서 얻는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성을 몇 개 지닌 권력 있는 중세의 영주들은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 여행을 하는 경우 자신의 귀중품을 갖고 다녔다. 체스트는 의류나 타퍼스트리, 직물, 쿠션, 침대덮개, 작은 상자나 세면도구,
화장품 때로는 접이용 의자 끼지도 넣어 옮기는데 사용되었다. 받침대 위에 널판을 놓아 만든 긴 식탁이나 침대처럼 세련되지 못한 큰 가구들은 목재구조 틀위에 직물을 덮는 정도이며 이것과 붙박이로 된
찬장이나 벤취 같은 큰 가구들만 성에 남겨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에 주인이 없을 경우 이웃의 성주가 뜻밖의 방문을 하거나 약탈을
하는 경우에도 이들을 유혹할 것은 조금밖에 없었다. 평화시에도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 가구가 계속해서 옮겨져 갔다. 이것은 가구의 공급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으며 가구가 얼마나 비쌌는가를 나타내주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다.
비잔틴 예술은 그리스정교를 주종교적 체제로 하였던 현대 그리스나
러시아 및 그 밖의 나라들에 영향을 미쳤다. 동양의 장엄함과 동로마의 우월한 문명을 보고 온 십자군이 돌아온 후 프랑스와 영국의 고딕
예술이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360년 폰스튼티누스 2세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교회를 세웠고 불이 난
후에 415년에 데오도시우스(Theodosius)에 의해 재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532년 유스티니안(Justiniam)에 의해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해지아 소피아로 불리웠고, 그 의미는 신성한 지혜였으며 후에 성 소피아(St. Sophia)로 불렀다.
교회의 양식은 바실리카 형태로 남아 있고 지붕은 돔과 반돔의 연속물로 이루어졌다. 이 특징은 근동 회교도의 건축 특징이 되었다. 십자의 교차점은 직경 32.1m로 벽돌돔이 얹어졌다. 로마인은 원형 구조에
돔을 세우는데 익숙했으나 해지아 소피아에서는 돔이 4개의 기둥에
의해 말들어진 사각 교차 부분에 놓여졌다. 둥근 돔을 지지하기 위해
만든 이 정방형구조가 건축 구조의 새로운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비잔틴 공학자에 의해 해결되어 펜던티트(pendentive)로 알려진
새로운 건축적인 형태를 창조해 냈다. 텐던티브는 주두 윗부분에 오목하게 삼각형으로 부태가 펼쳐진 것처럼 하고 그 삼각형 윗부분 끝은 수평을 만들어서 여기에 위로부터 내려 드리운 돔 하부를 떠받치게 하면서 지주 역할을 하도록 만든 돌로된 부분이다. 네 개의 펜던티브는 돔 무게의 1/4씩 담담하고 있는데 돔의 중량이나 크기나 또는 트러스트의 거대한 것을 아무 지장없이 능히 지지할 수 가 있다는 것은
석조물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지아 소피아의 펜던티브는 18m높이에서부터 7.5m 건축술에 사용되었고 로마의 성 베드로(St. Peter)성당에 이용되었다.
비트루비우스에 의해 확립된 건축적 규준의 표준 척도는 해지아 소피아가 건립되던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아 기둥의 비율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기둥에 있는 엔타시스는 생략되었고 주두는 아칸타스 잎고
소용돌이 무늬를 미숙하게 조각한 코린트 형태를 표현하거나 동방의
리스 같은 장식으로 조각되었다. 몇 개의 기둥은 로마 사원에서 따온
푸른 벽옥(jaser)과 반암(porphyry)을 사용하였고 몰딩과 돌림띠(entableature)는 생략되었다. 반원아치를 창과 문 등 개구부에 구조적이고 장식적인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일련의 기둥들이 린텔(lintel)의 대용으로 사용되었고 반원아치는 각 기둥 사이에 사용하였다. 아치의 높이와 넓이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주택구조는 안쪽을 바라보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중앙에 그 가정의 남성용 접객 영역안 홀이 있다. 여성들과 어린이, 하녀들은 윗층에서 생활했다. 현재 그 당시 현존하는 가구가 없으며 그림으로 표현된 그 시대의 기록들과 사본의 채식, 상아로 만든 물건, 벽화,
모자이크 등에서 발견된 것들을 자료로 하고 있다. 비잔틴 예술의 위업인 모자이크는 왕궁, 수도원, 교회 등의 벽과 바닥에 쓰였는데 그런
곳은 화려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고 쿠션과 커텐, 화려한 직물, 벽걸이를 많이 써서 장식을 하였다. 모자이크를 통해 비잔틴 예술의 기초를 형성한 두 전통의 혼합 형태, 즉 동양의 근엄한 형식주의와 연결된
그리스 문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고전적인 자연주의는 점차 정적인
형식화 된 형태와 화려하고 다채로운 추상적인 무늬에 굴복하였고 상징주의가 비율, 공간감 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스타일의 혼합은
모든 장식 예술에 반영되었다.
고전주의 가구에서 나타나는 우아하고 정교한 곡선 형태는 비잔틴 왕궁과 주택의 장엄하고 형식적인 특성에 어울리는 묵직한 정적인 형태로 교체되었다. 왕궁의 가구는 특히 화려했다. 기록에 의하면 연회용
테이블을 상아와 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식사실에는 전체를
금으로 만든 탁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36개의 카우치를 충분히 놓을
만큼 큰 탁자였다. 왕궁 연회에서 손님들은 로마식으로 기대어 앉아서 금쟁반으로 음식을 대접받았다. 손님이 없을 때 왕족은 식사용 의자를 썼고 스툴과 벤치는 사용하는 가정이 많이 있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은 그들의 테이블을 조심스럽게 놓아두었다. 보통 아름답게 수를
놓은 천을 사용했다.
가장 빈번하게 예로 설명되는 가구는 옥좌와 의자다. 옥좌는 대개 장중한 목재구조로 되어 있고, 칠을 하여 장식하였고, 보통 그에 어울리는 푿 스툴과 함께 단 위에 놓여져 있었으며 위는 천개로 덮어져 있었다. 아주 화려한 것도 있어서 값비싼 재료로 만들고 보석으로 장식하였으며 호화롭다.
비잔티움은 탁월한 상아 양각으로 유명했다. 이렇게 양각된 상아판은
옷장, 보석, 귀중품 따위를 넣는 작은 상자, 성골함, 심지어 문 등에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훌륭한 의자의 한 예는 “맥시미안(Maximian)의
옥좌”로 알려진 의자이다. 이 옥좌의 받침대는 보기 드문 튜브 형태이고 등받이는 로마식으로 구부러져 있다. 그 주요 구성 골조는 새와
동물들과 더불어 산재해 있는 잎과 열매를 가득 조각하여 장식되어
있다. 훌륭하게 조각되어 붙여진 판넬에는 예수와 세례요한, 사도들의 생애를 그린 그림이 새겨져 있다. 당시 유행하는 고전적인 접는 의자와 스툴이나 X형 의자는 가죽시트를 걸친 형태로 현존하고 있다.
책상과 독경대가 함께 붙은 것을 즐겨 썼다. 책상 부분에는 보통 한쪽에 선반을 짜 넣은 찬장이 달려 있었고, 독경대에는 책걸이를 받치고
위치를 여러 곳으로 조정하는 경첩이 달린 부분이 있다. 기대어 놓지
않아도 아무데나 세워 놓을 수 있는 독경대도 있었다. 간단한 침대는
고전적인 형태를 따랐지만, 우아한 머리 받침대는 없어졌다. 정교하게 꾸며진 둥근 받침대가 있는 것도 있고, 천개와 기둥으로 건축적인
구조를 갖춘 것도 있다. 부자들은 정교하게 수를 놓은 이불잇과 베갯잇, 담요, 누비이블, 침대덮개 등을 썼다.
첫댓글 사진은 종범ㅠㅠ
예전 글이다보니..-_-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