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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 남자 친구?
강남역 노보텔 호텔
친한 동생 미리의 결혼식을 가기 위해 전철을 타고 가는 중이다.
올해가 결혼하면 좋다는 쌍춘년이 아닌가? 9월에 결혼한다며 보내온 청첩장이 벌써 5개나 된다.
미리는 전 직장에서 알고 지내던 동생. 전 직장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꺼려졌지만 수줍게 ‘언니, 나 결혼해! 꼭 와줘.’라며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꼭 가마 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결혼이 남녀 관계에 있어 행복한 결말이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할까?
사실 요즘 몇 달 혹은 몇 년 만에 결혼했던 친구를 만날 경우, ‘결혼 생활 어때?’하고 바로 물어보기가 꺼려진다.
왜냐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솔로로의 컴백을 조심스럽게 한 친구들이 간혹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가 알고 있듯이 결혼이 모든 남녀 관계의 행복한 결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현실의 시작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그래서인지 ‘결혼해야지?’라는 이야기를 간혹 듣긴 하지만 그건 꼭 다른 나라 이야기같다.
결혼. 남녀가 만나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일.
한국에서의 결혼은 단순히 남녀가 한 공간에서 같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한 개인이 다른 누군가의 가족이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남편 혹은 아내와의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형수 혹은 재수 등 또 다른 의무를 해나가야만 한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지금 누구의 무엇? 내겐 가당치도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결혼과 함께 특히 여자는 자신의 꿈이나 이상, 일에 대한 성취욕 등은 거의 포기해야만 한다.
물론 ‘아내’ 혹은 ‘주부’를 폄하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능력있던 친구가 결혼과 동시에 그냥 전업 주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개인적으로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순 없다.
친구가 내게 ‘나 결혼해.’ 라고 하는 것보다 ‘나, 승진했어.’라는 말을 듣는 게 더 편안하고 더 축하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일 테다.
아니면 한국 여성 콤플렉스 때문일지도…
차라리 동거를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한국에서의 동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여자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를 선택한 한국의 많은 여성들에게 박수를 짝!짝!짝!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강남역에 도착했다.
시티극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 멀리서도 잘 보이는 구만! 시티극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료.
검정색 수트에 앞 단추를 두 개쯤 풀고 흰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었다.
물론 넥타이는 안했다. ‘저 인간은 인생 자체가 화보구만.’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수요일쯤 료에게 전화해서 이번 주 토요일은 결혼식이 있어서 늦게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도 결혼식에 가고 싶다고 한국 결혼식이 어떤지 궁금하니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게 아닌가?
그래, 좋다! 같이 가자! 내 남자 친구라고 오해받아도 나는 모른다. 으하하하!
한국에서는 결혼식때 꼭 정장을 입어야 한다고 했더니 말도 참 잘 듣지.
이럴 때 보면 저 녀석도 참 귀엽단 말이지. 정장이 저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일부러 못 본 척 하며 나는 그와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시계를 보았다.
“아네고”
‘헉’ 누나 숨 넘어가겠다. 그렇게 얼굴을 불쑥 불쑥 내 앞에 가져다 대지 말란 말이다.
“어… 왔어?”
“걸어오면서 나 못 봤어? 난 멀리서 봐도 알겠던데…”
“미안. 너무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
“아니”
젠장! 그렇게 빨리 일본어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가자.”
“응.”
좀 걸어가더니 그가 말했다.
“핸드폰 줘.”
“왜?”
“줘.”
“그러니까 왜 달라고 하냐고?”
“핸드폰 주세요.”
이거 참 다섯 살 먹은 애랑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 떼쟁이다.
“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료에게 건넸다. 뭐할라고 저러는 거야? 폴더를 열더니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한테 핸드폰을 돌려준다.
“뭐야?”
“아무 것도 아냐.”
내 저럴 줄 알았다. 저럴 줄 알았어. 액정 화면 안 바꾸길 잘했지.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재민씨다.
“어디에요?”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물었다.
“동생 결혼식에 가는 길요.”
“아~ 주말인데 나도 나가고 싶다.”
“일하셔야죠!”
“네네… 경주씨가 우리 사장님보다 더 무섭다니까… 언제 마쳐요?”
“글쎄요. 마치고 아는 사람들이랑 차를 마시거나 술은 한 잔 하거나 할 테니…”
“그래요. 다음 주 수요일에 봐요.”
“바쁘니까 나중에 문자 보낼께요.”
“아뇨. 전화로 해요.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
“네…네. 그럼”
재민씨의 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 때 딱딱한 료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야?”
“으응? 어… 아는 오빠.”
“전에 그 남자 아냐?”
이 자식 족집게… 아니 내가 왜 이런 거에 쫄고 난리인게야? 그래, 그 사람이다. 그럼 어쩔래?
“아냐.”
“그래?”
“오늘은 내가 결혼에 관련된 단어를 가르쳐 줄께.”
나는 이렇게 얼렁뚱땅 료의 의심을 피했다. 그런데 나 왜 거짓말한거야? 아유~ 나도 날 모르겠다.
“네.”
“혹시 알고 있는 거 있어?”
“결혼식, 에… 신랑, 신부,… 에… 그거 뭐지? 결혼한다고 주는 편지?”
“청첩장”
“총…첨…장?”
“청”
“청”
“첩”
“첩”
“짱”
“짱”
“청첩장”
“이거 발음… 너무 어려워. 청… 첩…”
‘헉’ 그의 말이 멀어져 간다. 그가 멀어져 간다. 이런 젠장. 구두 굽이 맨홀 구멍 사이에 끼였다.
젠장. 내가 제일 아끼는 구두인데…
“아네고, 하하하 진짜 웃긴다.”
저 자식 정말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어느 새 와서 비웃다니…
그런데 구두 굽은 왜 이렇게 안 빠지는 거야? 구두 굽 다 망가지겠네.
이 구두를 매장에서 보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거 같았다.
들어가서 가격을 물어보니 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내게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퇴근 후 매일 매일 그 매장을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집으로 가려고 하면 그게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3개월을 고민한 끝에 큰 마음 먹고 사버린 내 마놀로 블라닉. 그것이 지금 맨홀에 끼어버린 것이다.
나는 지금 거의 울기 일보 직전. 그 때 료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깨에 손 올려봐.”
그리고는 내 손을 자기 어깨에 올린다. 내 발을 구두에서 빼더니 구두를 맨홀 구멍에서 빼냈다.
그리고 구두를 잠깐 이리 저리 돌려보더니 내 발 앞에 놓아주었다.
날 올려보며 그가 말했다.
“생각보다 구두 많이 안 망가졌어. 괜찮아.”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보고 이 구두가 내가 제일 아낀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그는 나를 안심시키고는 내 발을 구두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일어났다.
“늦겠다. 가자.”
아~ 료한테 저런 면이 있었던가?
떼쟁이, 왕싸가지, 제멋대로인 줄 알았는데 누구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구나.
하긴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애라고 생각했으니까.
“언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사진 찍게 얼른 이리로 와.”
신부대기실에 앉은 미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오픈 숄더에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하얀 드레스, 의자 저 멀리까지 뻗어있는 하얀 면사포, 그리고 파스텔톤 장미로 만들어진 부케. 9
월의 신부여! 당신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다 표현하리오!
“료. 나 신부랑 사진 찍고 올께.”
“나도 찍는 거야?”
“넌 안 찍어도 돼.”
나는 미리의 뒤에 섰다. 사진사가 목을 이렇게 해라 몸을 저렇게 해라 주문하더니 ‘자, 찍습니다.’하고는 플래쉬를 터트렸다.
“잘 살어. 알았지?”
“알았어. 근데 저 남자 누구야?”
“결혼할 때 다들 정신 없다더니… 전에 말했던 일본어 선생님.”
“아~ 너무 잘 생기셨다.”
“미리야!”
미리의 다른 친구들이 한 무더기로 미리를 에워쌌다. 나는 그 틈을 타 료에게 왔다.
“신부가 예뻐요.”
“그치? 우리는 밖으로 나가자.”
호텔 로비로 나오는데 전 직장 여자 직원들이 말을 걸었다.
“언니!”
“어머, 다들 잘 지냈어?”
“네. 언니는요?”
“나야 뭐…”
“언니 이 분은? 남자 친구?”
“아냐.”
“안녕하세요?”
“어머, 한국 분 아니신가 봐요?”
“료, 전에 다니던 직장 동료들이야. 애들아, 얘는 료고 일본인 유학생이야.”
서로 통성명을 하면서 여자 직원들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꺄르르 댔다.
귀여운 것들… 전 직장에선 내가 왕언니였다.
그래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들은 나를 찾곤 하였다.
화장실에 모여서 상사 험담하고 우는 애 달래주고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참, 언니 김부장 왔던데…”
“아~ 이래서 안 올라했건만…”
김부장.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인간.
손님이 오셨을 때 커피 심부름은 꼭 여자가 해야된다고, 여자는 결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남성 우월주의자.
일로 자신이 아끼던 남자 직원을 앞지르고 사장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내가 나간다고 했을 때 그는 만세를 부르고 싶었겠지만 사장이 직접 나서서 말리는 분위기인지라 선뜻 그 뜻을 내비치지 못했다.
그래서 하는 소리가 이러했다.
“나가서 뭐해? 결혼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다니지? 경주씨 애인도 없어서 결혼도 못하잖아. 영화? 그거 아무나 하나? 그 나이에 뭘 하겠다고?”
나의 전 직장은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다.
그 곳에서 몇 년 있다 보니 영화 제작 현장에서 직접 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영화를 전공했던 나에게 있어 단 하나의 소원은 자막에 내 이름 석 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럴 듯 해보이는 그 곳을 나오고 싶었다. 그리고 사표를 던졌다.
김부장의 싫은 소리를 참아가면서…
물론 일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내 이름이 개봉작 어딘가에 있었을 테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다들 알고 있다시피 나는 온라인 광고 제작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해 김부장과 마주치는 것도,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는 것도 모두 꺼려졌다.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무슨 그 나이에 영화냐며 날 비웃던 사람들을 향해 멋지게 ‘보아라. 나는 지금 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라며 웃음을 날려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날 수 밖에…
이런 생각을 하는 중 어디선가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린다.
“경주씨, 오랜만이네.”
돌아보니 김부장이다. 기분은 나쁘지만 내가 누구인가?
사회 경력 7년 차 서른 살의 대한민국 처가가 아니던가? 이런 상황에도 웃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김부장님, 안녕하세요? 더 젊어지셨네요?”
“그런가? 그래 회사는 어디 다녀?”
“온라인 광고 회사에 다닙니다.”
“광고? 허허허… 영화한다고 나간 사람이… 지금 이런 얘기해서 그렇지만 그러게 뭐하러 나갔어? 영화를 뭐 아무나 하나? 거기다가 여자가? 자네 나이도 많은데 너무 생각이 없는 거 아냐? 그냥 조신이 있다가 시집이나 가지. 온라인 광고면 뭐 배너나 만들고 그러는 데구만. 월급이나 제대로 받을 지… 아직도 애인 없나?”
참자, 참아. 나의 입꼬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나 나이 먹고도 정신 못 차리고 꿈입네 뭐네 떠드는 여자다.
그러다가 일 잘 못 꼬여서 니가 무시하는 회사 다닌다. 그래서 어쩌라구!
“안녕하세요? 저는 야마다 료이고 경주의 애인입니다.”
‘엉? 이게 뭐야?’
나는 놀라 료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약간 굳어졌지만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또박 또박 한마디 한마디 이어갔다.
“조만간 청첩장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경주는 인터넷 광고… 시장에서 아주 유명한 카피라이터입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하고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내 손목을 잡고 식장으로 걸어갔다.
아~ 통쾌하다. 내가 말해서 뭉개버렸으면 더 좋았을테지만. 이 정도도 대만족이다.
오늘 김부장의 말은 나름 예의를 차린다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듣는 순간 그 전에 그로부터 들었던 말들이 모두 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기억 저 편으로 보내버렸던 모든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분했고 화가 치밀었다.
아마 료가 나서지 않았다면 결혼이고 뭐고 간에 그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미리의 남편이 성큼성큼 결혼식장을 걸어나갔고 미리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뿐히 주례 선생님 앞으로 걸어갔다.
미리는 아버지가 안자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트리고 말았다.
그 때까지 료는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이 녀석 남자답게 보이는 거야?
“얼굴 닳아.”
‘이건 또 어디서 배워서…’
“니 얼굴 보는 게 아니라 손목 좀 놔달라고. 아파.”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슬며시 손목을 놔주었다. 나는 그의 귀 가까이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아까 정말 멋졌어.”
“당근”
하하하… 이 뻔뻔함에 나는 웃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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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와 경주, 그리고 재민,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다음 편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첫댓글 뭐그런 사장이 있어... 말을 함부러 하는거야.....료가 시원하게 복수 해줘서 좋네요....다음편 원츄~~~~
그러게요. 하지만 이건 어느 정도 제가 당한 일을 약간 변경해서 쓴거라... 하하하 감사합니다. 힘내겠습니다.
ㅋㅋㅋ 넘 재미 있다~~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휴우~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