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 이사 55,1-3
제2독서 : 로마 8,35.37-39
복 음 : 마태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오늘의 묵상
유청 안셀모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을 챙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는]” 까닭은
아직 배불리 먹지 못한,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이들까지
모아들이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이를 당신 안으로 불러 모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
성경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는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곧 인류 전체를 불러 모으시는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혼자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제자들의 손을 통하여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
제자들이 내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많은 이의 풍요로움으로 바뀝니다.
미사 때에도 이 모습은 되풀이됩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소소한 것들이 미사에서 한데 모여 빵과 포도주로서 바쳐지고,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이라는 빵을 내주십니다.
이 빵은 나만을 위한 빵이 아닙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제자들이 내어놓았듯이 우리도 내어놓는 일을 이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봉헌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재능 기부가 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는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바치는 간절한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 같이 풍요로워지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드리는 나의 정성이 다른 이들에게도 향하면 좋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영적 지도 신부님의 권유로 읽게 된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2022년에 성인품에 오르신 샤를 드 푸코 성인의
묵상과 편지가 담겨있는 영적 수기입니다.
이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인의 영성은 대단했지만,
그분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는 분명한 실패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 15년 동안
알제리의 타만라세트 산지에 틀어박혀 원주민들을 개종하려고 했습니다.
과연 몇 명이나 개종시켰을까요?
성인의 영성이라면 거의 모든 원주민이 개종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성인의 편지에서 “타만라세트에서 미사를 올린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개종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인의 모든 노력과 달리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완전한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16년 12월 1일, 15세 소년이 쏜 총을 맞아 58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허무해 보이는 삶이 아닙니까?
하지만 성인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죽는 순간까지도 똑바로 보셨습니다.
성인의 글을 통해 알려진 그의 정신은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고,
선교 활동이 더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실패도 괜찮습니다.
현재의 실패가 곧 미래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로 하느님을 버리면 안 됩니다.
성인처럼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하기 위해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큰 영광의 삶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날이 저물고 장소는 외딴곳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자.”(마태 15,15 참조)고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가진 한계를 깨트리고,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라는 초대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굳은 믿음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능력이나 자원도 하느님의 손에 봉헌될 때,
기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들은 분명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데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져왔기에
남은 조각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 정도로 풍성함을 가져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재의 실패도 괜찮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진정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더위가 한창입니다.
뜨거운 사랑에 우리의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박해석 시인의 <기쁜 마음으로>를 들어봅니다.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한잔 포도주처럼 찰찰 넘치게
따르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그만 틈을 벌려 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 세 편을 들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하십니다.
너희가 살리라 하십니다.
당신의 변치 않는 자애를 드러내십니다.’(이사 55,1-3 참조)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인지요!
제2독서는 결코 ‘떼어놓을 수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로마 8,35-39)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기며,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마음으로 연민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수고하려 하지도 손해 보려 하지도 않으려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하십니다.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도 없는 것으로 여기며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의탁하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실현하십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의탁을 통하여, 아버지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처럼, 그 큰 사랑과 자애, 그 큰 호의를 입고 있으면서도,
이 놀라운 사실에 감격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왜 이처럼 우리는 무감동하고 무감각할까요?
오늘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왜 놀라워하지도 감격하지도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요,
그 ‘사랑을 반겨 맞아드리는 마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눈’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의 눈’이요,
그야말로, 지금 여기 실재하여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보는 ‘관상의 눈’입니다.
진정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살짝 엿보기만 해도 얼컥 울음이 솟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반겨 맞아드리는 마음’은 벅차오를 것입니다.
<시편> 작가처럼
“내가 있다는 이 놀라움,
그 하신 일에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하나이다.”(시 139,14)
하고 탄성을 지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그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그 사랑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게 하소서.
제 행실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조욱현 토마 신부
1. 말씀의 잔치: 귀 기울임에서 시작되는 계약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강조하며,
그 핵심은 “듣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사 55,3)이라 말한다.
하느님의 잔치는 단순한 음식의 잔치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잔치”다.
이 말씀의 식탁이 없이는 성찬의 식탁도 있을 수 없다.(교리서 1346항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성찬의 식탁에 오르기 전에 먼저 말씀의 식탁에서 배불리 먹으라.
말씀은 영혼을 밝히고, 성찬은 그 영혼을 하느님과 결합시킨다.”(In Matthaeum Homiliae, 50,3 의역)
말씀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순종과 충실성의 행위로 응답될 때 계약이 성립한다.
우리가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이미 하느님과의 친교가 시작된다.
2. “외딴곳”에서 이루어진 기적: 새 모세의 표징
마태오는 기적이 “외딴곳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받은 사건(탈출 16장)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새 모세로서, 단순히 먹을 것을 주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모으신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기적을 성체성사의 예표로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빵을 축성하시고 나누어 주신 것은,
그분 자신을 세상에 나누어 주시려는 표징이었다.
빵은 하나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 빵을 먹음으로써 한 몸이 된다.”(Sermo 234,1 의역)
3.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하느님의 동참의 사랑
복음은 예수님 행동의 동기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이 단어는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자비의 깊이를 의미한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비참함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다.”(Commentarium in Matthaeum, XI,1 의역)
하느님 사랑의 행위는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동참(공감)의 행위이다.
기적은 하느님이 인간의 결핍 안으로 들어오실 때 일어난다.
4.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협력의 신비
기적의 출발점은 제자들의 작은 응답이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드러내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협력을 통하여 당신의 섭리를 완성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손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나누신다.”
(Summa Theologiae, I-II, q.113, a.7 ad 1 의역)
나눔의 행위가 곧 기적의 통로가 된다.
‘작은 것’이 ‘충만함’으로 변화되는 순간,
인간의 계산은 사라지고 하느님 은총의 질서가 드러난다.
5. “열두 광주리”: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것은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열두 제자, 곧 새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기적의 잉여는 교회의 풍요로움,
곧 성사와 말씀으로 세상 끝까지 퍼질 복음을 의미한다.
성 치프리아노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의 빵이 잘게 나뉘어도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로 결합된다.”(De Oratione Dominica, 23 의역)
6. 성체성사: 나눔의 사랑으로 완성되는 일치
예수님께서는 이제 승천하셨지만,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봉사 안에서 여전히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신다.
사도적 봉사는 그분의 말씀과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명이다.
교회는 “빵을 떼며”(사도 2,42) 형제적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낸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11항 요약)
그리고 일치 교령은 이렇게 덧붙인다.
“성찬례에서 신자들은 하느님과 서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일치를 이룬다.”(2항 요약)
7. 결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한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로마 8,35–39)에서 선언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노력 이전에 우리를 품으신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내어놓을 때,
그분의 사랑은 세상을 배불리 먹이는 성체의 기적으로 변할 수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이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었습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이 지난 3년 동안의 사목 현황을 보고하였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평균 4명에서 7명으로 많이 늘었다고 했습니다.
세례도 3년 동안 5명이나 받았다고 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큰 공동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눈으로 보면 그곳에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고타 선교센터는 주일 미사만 봉헌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본당의 미사를 도와주고, 남미에서 사목하는 선교 사제들의 쉼터가 되고,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열린 집이 되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서울 대교구의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와 연계해서
남미의 어려운 교구를 돕는 일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에 30,000불씩, 벌써 6번이나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서는 사목 현황 보고를 들으신 후에 앞으로도
선교센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센터는 남미의 어려운 교구를 돕는 거점이 될 수 있고,
선교 사제들의 쉼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공동체였지만, 그 안에는 복음의 큰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작아 보였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자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적성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본당 신자 중에서 화재로 집이 전소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본당의 공소회장도 했었고,
가족 모두가 성당의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했었습니다.
마침, 성당에 비어 있는 숙소가 있었습니다.
본당 교우들은 집을 새로 지을 때까지
그 가족이 성당 숙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제게 청하였습니다.
저는 신자들의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4개월 동안 본당의 빈 숙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성당 숙소에 머무는 동안 관리인처럼 성당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나중에 집을 새로 지어 입주한 후에는 감사헌금도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히 숙소를 빌려준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이웃에게 공동체가 마음을 열어 준 일이었습니다.
성당의 빈방 하나가 한 가정에는 위로가 되었고, 공동체에는 복음의 실천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당황하며 말합니다.
“저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오천 명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많이 가진 뒤에 나누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먼저 내어놓기를 바라셨습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셨지만,
그 시작은 제자들이 가진 작은 것을 내어놓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기적이 아니라,
작은 나눔이 주님의 손에 들렸을 때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없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보십니다.
작은 시간, 작은 정성, 작은 친절, 작은 기도, 작은 봉헌을 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일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그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이 됩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의 작은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성당의 빈 숙소를 내어준 적성 본당의 교우들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숫자와 큰 능력만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 작은 나눔, 작은 사랑을 통해서도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가르침이
마치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중풍 병자가 치유되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징과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가상현실도 아니고, 증강현실도 아니며, 혼합현실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믿고 따를 때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작은 것을 기꺼이 나눌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 바오로 사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박해와 고난, 감옥과 매질,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현실로 체험한 사람의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씀은 부담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적의 동반자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모두 바꾸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주님께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작은 기도, 작은 나눔, 작은 친절, 작은 용서, 작은 봉헌이 주님의 손에 들릴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의 작은 공동체처럼, 적성 본당 교우들의 따뜻한 배려처럼,
오늘 복음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작은 것을 내어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작은 것을 축복하시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내어놓고, 이웃과 나누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일상적으로 고백하는 사제들!
양승국 스테파노 수사
예수님의 공생활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인품, 능력에 매료된 수많은 군중이
식음조차 잊은 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그분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의 장소는 예루살렘이나 카파르나움이 아니었습니다.
‘외딴곳’이었습니다. 한적한 장소, 즉 광야를 떠오르게 합니다.
시야가 확 트인 광활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남자만 5천 명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설교 장소에는 여인들이 곱절은 많습니다.
거기다 따라온 아이들까지, 줄잡아 2만 명 남짓 되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입니다.
그 광경이 마치 출애굽 여정의 모세와 백성들의 모습과 유사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2의 모세로 등장하셔서 광야에 모인 군중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빵을 나눠주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백성들은 그 은혜로운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동반하시고, 양육하시니,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위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이 동작은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아버지와 내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유다인들은 매 식사 전에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가장들은 기도를 드릴 때, 시선이 손에 들려 있는 빵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감사 기도를 마치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후,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 한적한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의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십니다.
함께 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제대로 된 식탁도 없고, 서빙도 없는 초라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룩한 식사, 하느님 백성과 메시아가 함께 하는 놀라운 식사였습니다.
저는 요즘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정성과 사랑이 잔뜩 들어간 한 끼 식사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 한 상에 쌓인 피로와 상처,
외로움과 슬픔이 말끔히 치유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위해 친히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그 식탁에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풍요롭습니다.
비록 소박한 식사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은총의 식사입니다.
오늘 우리의 식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 자세 하나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바처럼,
주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간절히 청할 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들은 우리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힘만 믿는 사도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총과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임을 파악한 사제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 사목자들,
나는 그저 나약한 한 피조물이요, 중재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겸손한 봉사자의 삶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사랑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한 나는 아닌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에 모두 나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은 요한복음과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우선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음을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먼저 언급하시는 것에 비해 공관복음은 제자들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먹이기 위해 언급하는데
제자들은 돌려보내기 위해 언급을 합니다.
이렇게 돌려버리려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에게 줄 것이 없음을 아시면서도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의 입에서는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이렇게 가진 것이 없는 존재가 나임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가난한 존재인 것을 잘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내게 가진 것이 조금밖에 없거나 아예 없을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먹을 것이 어디에 없나 하며 찾을 것이고,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할 것이며,
그가 주지 않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찾다가 마침내 하느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에게 먹을 것이 없고 나도 가진 것이 없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때도 내가 먹을 것이 없을 때처럼 줄 사람을 찾고 하느님을 찾습니까?
오늘 제자들처럼 내가 없으니 줄 수 없다고 바로 포기해 버리고 맙니까?
가진 것이 없다고 줄 마음도 없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도 없고 마음도 없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되고 없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어 줄 마음이 없는 것이고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군중을 보시자 즉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렇습니다.
이 가엾은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종종 가엾은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인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핑계를 대며 사랑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줄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이 주신다는 믿음 부족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지녔던 야훼이레의 믿음을 우리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한 나는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이승화 시몬 신부
우리는 하느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이 믿음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전지전능함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창조자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깨닫고 고백한다면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그분이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련과 환난은
결국 우리 스스로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할 수 있습니다.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주시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는 표현으로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 알려주고
시련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붙잡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동시에 그분이 천지의 창조주이시기에
세상 모든 것을 그분 아래에 있습니다.
없는 것에서 있음을 창조하셨기에
우리가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붙잡은 희망을 더욱 굳건히 해줍니다.
환난과 역경과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과 위험과 칼이 다가와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었음을
확신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확신은 복음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죄인으로 차별받던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꺼리낌 없이 다가오셨고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귀찮다거나 불편하다고 말하기보다
가엾은 마음이 드신다고 표현되며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든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것만 해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채워
이스라엘 백성 모두 배불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행동은 단 하나였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렸을 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 이어진 기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복잡해지고 있는 요즈음
날씨까지 더워지고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요즈음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믿음을 붙잡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절망과 좌절보다 희망과 위안을 기억하며
주님을 찬미찬양 하는 가운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으며
기쁨으로 나아가는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