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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장17~27절/부활과 생명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던 나사로는 결국 죽었고 무덤에서 이미 나흘이 지났습니다.(17절)
17절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능력도 있었고 나사로를 사랑했는데 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렸을까요?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오셨을까요? 우리들의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4절에 있습니다.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의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죽음도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복과 기적을 증거하기 위해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이 다시 유대로 들어가는 것을 제자들은 반대하였습니다. 유대에서 나올 때에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후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사실을 알렸을 때 유대인들은 향하여 욕하고(요9;28)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분노하여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쫒아내었습니다.(요9;34) 예수님은 선한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거짓된 목자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믿지 않으나 자신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들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요10;26)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믿지 않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니까 이들은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유대에서 나와서 침례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에 계셨습니다.(요10;40) 그런데 다시 유대로 들어가시고자 할 때 제자들은 반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과 자신들의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 낮이라고 말씀하신 후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요11;9)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보내신 사명을 위해 다시 유대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낮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루기까지 자신은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행한 애정을 표시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리켜 ‘우리 친구 나사로’(요11;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 대한 애정을 말씀하시면서 내 친구라고 말이 아니라 우리 친구로 말씀합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오랫동안 함께 가깝게 지내며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주님의 참 사랑을 함께 하며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기가 싶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잔다’고 표현합니다. 죽음이란 종말이요 끝입니다. 죽음은 저주이자 심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은 결코 아름다움도 희망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저주의 죽음이 부활의 은혜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십니다. 죽은 사람은 깨어날 수 없지만 자는 사람은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시며 발걸음을 옮겨 무덤으로 가십니다.
18~20절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 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가 진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했을 때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었던 것이다’라고 악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절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 죽었습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잔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죽었습니다.(17) 많은 문상객이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나사로와 그 가족이 동네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네의 모든 사람이 와서 문상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품이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두 사람 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척 좋았지만 반응은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뛰어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혀 다른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며 개방적인 스타일이었고, 마리아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르다가 먼저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21절에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솔직한 감정을 예수님께 드러냅니다. 마르다의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만약 주님이 일찍 오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라는 말에는 원망과 불평이 섞여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으면’하는 섭섭함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든 자도 고치신다는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늦게 왔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이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예수님은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22절에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르다의 말을 가만히 보면 굉장한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이 말을 살펴보면 마르다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믿음이 아니고 한계가 있는, 인간적인,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을 믿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인간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 말에 다 나와 있습니다.
22절에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 믿음의 첫 번째 문제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믿음이라고 착각한 점입니다. ‘주님은 지금이라도 무엇인가 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긍정적이고 좋습니다. 희망과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주님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베풀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한테 잘 해 주실 것입니다.’와 같은 마음은 막연한 희망과 기대입니다. 본질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이런 기대는 갖고 있습니다. 이런 기대를 믿음으로 착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두 번째 문제는 마르다의 말에 있는 허점입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지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마르다가 ‘자신이 믿는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아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입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한 말입니다. 지식과 정보가 기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해했다고 다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믿습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녀의 믿음의 기초는 이성, 합리성, 지식, 정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은 좋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목마른 믿음, 기대와 희망은 있지만 결정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의 믿음에 쐐기를 박습니다.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믿음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된 희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에 기초한 사실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성과 합리성, 정보와 지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흔들릴 마르다가 아닙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지식의 믿음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지식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양문교회에서 수 없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지만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지식으로 바꿔서 재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믿음의 수준을 결코 뛰어넘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24절에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기에서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믿지만 부활은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고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말은 이성과 합리성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마르다는 종말에 모두 부활할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지금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구태의연하고 인간적인 믿음의 관점을 바꾸지 않으려는 마르다에게 두 번째 쐐기를 박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을 주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을 주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활이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죽음은 끝, 저주, 심판이 아니라 부활의 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니’라고 설명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영생’입니다. 주님이 곧 ‘영생’이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부활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습니다. 딱 한 사람, 나사로만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난 이후에 부활할 것을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고 마르다에게 기막힌 말을 하십니다. ‘네가 믿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믿느냐’고 도전을 합니다. ‘안다’는 것은 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결단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갈등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결단을 내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에 마르다는 자신의 믿음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인간적이고 제한적이며 합리적 사고에 맞아야만 믿는 믿음이 부활의 믿음, 기적의 믿음, 능력의 믿음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메시아의 부활과 연결되는 기막힌 사건입니다. 이것을 마르다가 느끼기 시작합니다.
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주여 그러하외다’.는 ‘아멘’이라는 뜻입니다. ‘아멘’은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예수님 말씀을 믿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이십니다. 주님이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기적을 지금 베풀 수가 있습니다.’라고 마르다가 말을 바꾼 것입니다. 믿음이 바뀌면 언어가 바뀝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믿음으로 변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아는 믿음에서 믿는 믿음으로, 이성의 믿음에서 결단의 믿음으로 변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메시아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믿음을 고백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기적을 만들고 능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도전합니다. ‘아는 신앙’을 졸업하고 결단하십시오.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식으로는 여러분이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의지적으로 믿습니다.’ ‘감정이 동의하지 않아도 믿겠습니다. 결정하겠습니다. 내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런 고백 위에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잠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