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필재 김종직
1. 서설 점필재선생 김종직1431-1492)은 성리 도덕의 학문으로 인격을 닦아 인륜의 기강을 바로잡고, 민본의 의리와 고유의 역사 풍토에 근거하여 문명사회의 이상 실현을 추구하였던 조선 초기 사림의 종사였다.
조선 왕조의 통치 계층은 왕권의 권위를 불가의 종교 이념으로 옹호 윤색하였던 고려조와 달리 유학을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운용하였다. 이 시대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에서부터 우주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이치를 해명하는 정연한 논리 체계를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수양과 인간관계는 물론 사회 국가의 운영에까지 도덕에 합당한 사회 이상을 구현하려 하였다.
김종직은 정몽주, 길재 등이 수립한 학문 모범을 계승하여, 일상생활의 범절과 처신에서부터 사회 국가의 경륜에 이르기까지 유자로서의 사상 이념을 실천하여 관철하려는 도덕 경세의 학문을 솔선하여,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조선조 도학의 학풍을 넓힘으로써 사림의 종사로 추앙되었다. 그는 또한 전아하고 건실하면서 웅혼한 시문을 창작하여 조선 전기 제일의 시인으로 칭송되었다. 그의 시문에는 유학자로서 성리 도덕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깊은 내면 성찰과, 민생이 유족하고 인륜의 기강이 바로 잡힌 문명사회에 대한 염원, 향토의 풍속과 물산과 인정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짙은 애정이 담겨 있어서, 조선조 사대부 지식인의 독특한 문학 전통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많은 문도들이 참혹한 화를 당하고, 김종직 자신도 무덤 속의 화를 당함으로 인하여, 왕조 국가에서 유가 사상에 입각한 인간다운 미덕의 실천과 사회 이상의 실현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지만, 김종직과 그 문도들이 추구하였던 포부와 신념은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계승 발전되어 조선조 사대부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김종직은 우리나라의 유가적 문화전통 형성에 선구자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2. 생애와 이력 점필재 선생 김종직은 조선 세종 13년(1431) 6월 8일 경자일에 경상도 밀양의 한골에서 태어났다. 점필재의 웃대 조상은 대대로 선산 (현재의 구미)에서 살았는데, 점필재의 아버지인 강호김숙자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사대부 가문으로서의 규모를 갖추었다. 강호 선생은 밀양에 세거한 사재감정 박홍신의 딸과 혼인하면서 밀양으로 이사하여 살았으므로, 점필재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밀양에서 지내면서, 강호 선생이 관직을 역임한 고령, 개령, 성주 등지로 옮겨 다니며 학업을 닦았다.
점필재는 그 자질이 본디 출중한데다가, 어릴 때부터 강호 선생의 법도 있는 훈도를 받아, 약관의 나이에 이미 문장을 이루어 뛰어난 시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점필재는 여섯 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소학』, 『효경』을 거쳐 사서오경을 배우고, 그 다음에 『통감』을 비롯한 역사와 백가의 서적을 배웠다. 강호 선생은 “활과 화살은 몸을 보호하는 물건이니 익히지 않아서는 안된다. 더구나 옛날 사람은 이것으로 덕성을 살폈다.”고 하면서 활쏘기를 익히도록 하였고, 또 “계산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의 사물을 궁구할 수 없으니, 위치 하나라도 비뚤어져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셈하는 법을 익히게 하였고, 또 글씨 쓰는 법도까지 정밀하게 익히게 하였다고 한다.
점필재는 16세 때 서울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를 지었는데, 합격하지 못했다. 시관으로 참여하였던 대제학 김수온이 낙방한 시권을 나누어주다가 점필재의 시를 읽어보고는, “이는 뒷날 문형을 잡을 솜씨인데 높은 재주를 가진 인재가 낙방한 것이 애석하다.” 하면서, 그 시권을 가지고 들어가 세종에게 아뢰었다. 세종은 이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영산훈도로 임명하였다. 그로 인하여 이웃 고을인 영산의 훈도로 부임하여 한 동안 그곳 향교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문묘에 배알하면서 학도들을 가르쳤다.
점필재는 23세 때 진사에 합격하고, 26세 때 부친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묘소를 지키며 상을 치른 다음,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점필재는 벼슬에 처음 나가면서부터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시문으로 선배 동료들로부터 촉망을 받았다. 그리하여 승문원 박사로서 왕세자빈 한씨의 애책문과, 인수왕후의 책봉 책문 등을 제진하였고, 당시 승문원의 선배였던 어세겸은 점필재의 시를 보고 감탄하여 “나는 그의 말구종이 되어도 달갑게 여기겠다.”고 까지 하였고, 나중에 성종이 그를 대제학에 임명하자 “나의 재주가 김종직만 못하다.”고 하여 그 직책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출사한 지 얼마 안되어 33세 때 사헌부 감찰로서 세조의 뜻에 반하는 발언을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한 동안 몰려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다가, 35세 때 영남병마평사로 다시 기용되어 3년 동안 경상도 각처를 다니며 직책을 수행하였다. 37세 때는 다시 홍문관 수찬으로 임명되어 교리, 응교, 이조 좌랑, 수찬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문학의 직무를 맡았다. 성종이 즉위하자 지방관을 자청하여 함양 군수로 5년, 선산 부사로 4년 간 잇달아 재임하면서 남다른 치적을 이루고, 한편으로 사방에서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를 마친 다음, 52세 때 다시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도승지를 거쳐 예문관 제학 등의 직책을 맡아 국정에 관여하면서 『동국여지승람』을 편수하는 일을 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나갔다가 1년 만에 다시 서울로 들어가 병조 참판,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형조 판서 등의 직책에 잇달아 임명되었다. 그러나 훈구 관료들의 강력한 견제로 인하여 점필재의 운신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래서 59세 때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방에서 모여드는 학자들을 가르치다가 6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성종 23년(1492) 8월 김종직이 죽자, 조정에서는 공론에 따라 문충공의 시호를 내렸다. 봉상시의 시의에 이르기를 “몸으로 도학을 책임지고 덕과 인에 의거하여 충신과 독경으로 사람을 깨우치기에 지치지 아니하고 사문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여겼으며, 왕도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를 천하게 여기며,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되 맑으면서도 편협하지 아니하고 화합하면서도 세속에 흐르지 아니하여 문장과 도덕이 한 시대에 높았다.”고 하였다. 당시 봉상시의 봉사였던 이원은 논하기를 “만약 재능이 많고 견문이 많다는 것으로 이름을 짓는다면 김종직이 정심을 근본으로 하여 몸소 사문을 책임진 공이 후세에 인멸될 것이기에 도덕박문으로 시호를 정하였다.”고 하였다.
문충으로 확정되었던 김종직의 시호는 유자광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의 이의로 인하여 그 이듬해 4월에 문간으로 고쳐졌다가, 200년이 지난 숙종 때 당초의 시호인 문충)으로 복원되었다. 이처럼 성종조 당대에 김종직을 추숭하는 사림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일부 대신들의 상반된 시각의 차이가 심각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산군 때 일부 권신들이 점필재가 지은 시문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그를 추숭하였다는 이유로 문도들을 대거 숙청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중종 반정 뒤에 그 억울함이 밝혀지고, 점필재의 훈도로 배태된 신진 사류의 학풍이 사림의 주류로 자리잡아 사림의 종사로 추앙되었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이르기를 “점필재의 문학은 쇠퇴한 기풍을 일으켜, 도를 구하는 자 그 뜰에 가득했다”고 하였다. 점필재가 심오한 학문에 기반한 건실하고 새로운 학풍을 일으킨 사실을 당나라 말엽의 한유에 견주어 칭송한 것이다.
3. 조선 초기 사림의 종사 점필재 김종직은 세조 성종조 이후 조선의 학풍을 일신한 사림의 종사로 추앙되었다. 당대의 동료로서 김종직의 신도비명을 찬술한 허백정 홍귀달은 이르기를 “덕행과 문장과 정치는 공자의 문하에도 겸비한 자가 없었는데, 문간공은 그렇지 아니하여 행실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학문은 사람들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였고, 매계 조위는 이르기를 “점필재 선생은 도덕과 문장이 한 시대의 스승이요 모범이었고, 학문 연원은 사예공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김종직의 시장을 기초한 이원은 이르기를 “김종직은 정심 의 학문을 처음으로 제창하여 후진들을 가르침에 정심을 근본으로 삼도록 하였고, 자신이 사도를 책임지고 사문을 일으키는 일을 감당하였으니, 그 공은 공명과 사업이 탁월한 자보다도 더 어진 점이 있다.”고 하였고, 『해동잡록에는 “김종직은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하여 당대 유종이 되었다.”고 하였다.
김종직이 사림의 종사로 추앙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의범절의 실천과 교육을 솔선하였다는 점이다. 김종직은 고려 말 조선 초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명망 높은 학자인 야은 길재의 영향과 아버지 강호 김숙자의 훈도를 받아 어려서부터 『소학과 『가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예의범절의 실천이 생활 습관이 되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어렸을 때 고향인 선산에 은거하고 있었던 길재에게 배웠다. 길재는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의 금오산 아래에 은거하여 평생을 야인으로 살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길재는 평소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는 일상생활의 범절과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가꾸어 나가는 도리를 깨우치는 『소학』을 먼저 가르쳐서 반드시 익숙해진 다음에 다른 과목을 가르쳤다. 길재에게서 배운 김숙자 역시 자제들에게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하게 지내는 일상생활의 범절을 먼저 가르쳐서 사람됨을 바르게 만든 다음에 다른 과목을 가르쳤다.
김종직은 이러한 학풍을 준수하여 스스로 학도를 가르침에 일상생활의 범절을 바로잡는 『소학』의 공부를 중시하였다. 『소학』은 송나라 때 주자가 학도들에게 일상생활에 있어서 원만한 인간관계와 올바른 처신의 법도를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책으로 성리학의 실천 윤리를 알기 쉽게 예시한 책이었다. 김종직이 『소학』을 중시하여 학도들에게 가르친 보람은 젊은 학도들에게 널리 파급되어 한 시대의 새로운 기풍을 이루었다. 강응정, 남효온, 신종호, 강백진, 손효조, 박연 등과 같은 사람들은 매달 모여 『소학』을 강론하고 실천하는 모임인 소학계를 결성하였다.
한훤당 김굉필은 김종직으로부터 『소학』의 공부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고서는 “글을 배우면서 천기를 몰랐으나, 소학 책 가운데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평생 소학동자로 자처하며 스스로 이를 실천하는데 힘썼다.당시 조정에서는 『소학』을 비롯한 예교 권장의 서적을 널리 보급하여 장려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문을 저술하고 경서를 익숙하게 암송하여 입신출세의 지름길을 노리는 것은 고금에 다름없는 시속의 병폐였다.
그런 풍토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덕성 높은 인격을 함양하는 것을 중시하는 신진 사류들을 소학당이라고 빈축하며 배척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종직의 영향 아래 젊은 학도들 사이에는 일상생활의 마음가짐과 언어 행동에서부터 도덕의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는 기풍은 점차 확산되어 갔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유가의 학문 이념을 존중하여 가족과 가정을 중심으로 관혼상제를 비롯한 대소의 범절에 일정한 법도를 세워 가정 내의 분란을 막고 일가 친족간에 화목을 도모함으로써 사회의 기강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런 법도를 간추린 『가례』의 실천을 사대부 사족에게 부단히 권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권장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족 집안을 제외하고 왕실은 물론 권세 있는 집안에서 제대로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종직의 집안에서는 부친 강호 선생의 세대에서부터 가묘를 세우고 3년상을 시행하는 등 『가례』의 예절 규범을 실천하는데 앞장서 당대 사대부 사족의 모범이 되었다.
김종직은 학문에 있어서 『소학』과 『가례』의 실천을 중시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인간관계의 도리를 돈독히 실행하는데 충실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그것은 가정의 생활 법도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김종직이 태어난 해 부친인 강호 선생은 한 달 사이에 잇달아 그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몸을 많이 손상하였다. 김종직은 어릴 적에 그 이야기를 듣고 「유천부」를 지어 상심하였고,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밀양의 분지곡에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늘 모부인께 문안을 하였다. 또한 선공의 평생 사적과 언행과 훈계를 낱낱이 기록한 『이준록을 편찬하여 자신은 물론 자손들의 생활 법도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
김종직은 또한 우애의 천성이 지극하였다. 한번은 맏형이 종기를 앓았는데 의원이 지렁이의 즙이 가장 좋다고 하므로, 공이 먼저 맛을 본 뒤에 먹게 하여 과연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어느 가을 날 두 형이 출타하여 돌아오지 않았는데 밤중에 비가 내렸다. 다음은 그가 두 형이 비에 젖을까 걱정하며 지은 시이다.
바람 서늘한 객지의 길에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한 벌의 비옷을 멀어서 가져다 드리지 못합니다. 어느 곳 외딴 촌에 오늘 밤 주무시는지? 말 안장에 기대 졸며 새벽 닭 울기 기다리겠지요.
김종직은 나이 46세 때는 노모를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선산 부사가 되었는데, 성종은 그의 효성을 짐작하고 매양 지방관의 직책을 받아 나갈 때마다 모부인을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김종직은 아침저녁 문안을 빠트리지 않고, 이불을 펴고 걷는 일을 몸소 행하면서 처자식이 이를 대신하려고 하면, “어머니가 늙으셨는데 뒷날 다시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다.”고 하며 자신이 행하였다.
남효온의 『추강냉화에는 “점필재 선생이 상주 노릇을 하는 3년 동안 조석 상식에 곡을 할 때면 지나가는 사람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홍여경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더니 참으로 헛말이 아니로다.’ 하였다.”는 말이 실려 있다.
김종직은 지방관을 맡으면서 가는 고을마다 향사례와 향음례, 양로례등의 의식을 정기적으로 시행하였다. 향사례는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경기를 통하여 덕성을 존중하고 사양하는 미덕을 깨우치는 의식이며, 향음례는 고을의 덕망 높은 사람을 초대하여 술을 권하고 마시면서 현자를 존대하는 미덕을 깨우치는 의식이다.
김종직은 이런 의식을 정기적으로 거행하여 어른을 공경하고 덕성을 존중하며 서로 사양하고 존중하는 예절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지역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미덕을 존중하는 기풍을 진작하고자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이 후학에게 끼친 학문 영향 중에 특히 주목할 것은 심학이다. 점필재에게 직접 훈도 받은 바 있는 한 문인은 중종 때 경연에서 이르기를 “내가 글을 배울 적에는 심학을 하는 이가 없었는데, 다만 김굉필, 정여창이 김종직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을 배워 끝내 실천하는 일을 하였다.”고 하였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는 곧 심학이고, 심학은 성리학의 본령이다.
김종직이 후학에게 심학을 권장했다는 것은 서울에서 천리 길을 도보로 걸어와 시를 배웠던 양준과 홍유손등에게 지어 준 다음 시에도 드러난다.
사마천은 젊어서 유람을 좋아하여 발자취가 온 세상을 두루 다녔기에 문장은 비록 기묘하고 훌륭했지만 도학에는 실로 어수선하였네. 장횡거는 한 칸 방 안에서도 신명을 마주하듯 경건하여서 온 우주가 내 집 문턱 안에 있으니 시어머니 며느리가 어찌 반목하리.
한나라의 사마천은 천하를 주유하며 견문을 넓혀서 훌륭한 문장을 남겼으나, 점필재는 송나라의 성리학자 장횡거처럼 고요히 마음을 다스려 물아의 대립을 극복하는 심학공부를 권장하였다. 심학은 심성의 이치를 탐구하여 도덕성 높은 인격을 함양함으로써 심신의 화평과 사회의 안녕을 실현하려는 성리학의 중요한 핵심이지만, 남곤의 지적처럼 이 시대에 심학에 주목한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김종직은 이를 학문의 바탕으로 표방하고 학도들을 훈도하였으므로, 그 문하에 정여창, 김굉필과 같은 도학자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직의 학문 기풍이 후학에 끼친 영향은 그가 죽은 지 20여 년 뒤인 중종 때 경연에 참 찬관으로 참여하여 발언한 조광조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김종직 또한 유자입니다. 그 당시 김굉필 등은 비록 당시에는 크게 등용되지는 못했지만, 근래에 그 기풍을 듣고 추모하는 자가 일어나 선행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 사람의 공입니다. 선한 사람이 국가의 원기가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종직의 아버지는 길재에게서 배웠고, 한 시대의 인사로서 제법 칭송할 만한 점이 있는 자는 모두 종직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마음과 뜻을 합쳐 서로 상종하였습니다.
중종 정축년(1517) 8월 8일 경연 검토관으로 참여한 기준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동방에는 이학이 밝지 않아 인심이 흐릿하였는데 고려 말에 정몽주가 태어나 이학의 조종이 되어 근원을 조금 열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선비들의 습속이 비속하여 향방을 몰랐는데, 김굉필이 어려서 김종직에게서 수업하여 문호를 조금 알고는 스스로 송유가 남긴 단서를 터득하여 규모를 넓힘으로써 그 언행이 정주와 일체가 되어, 비록 성인의 경전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집에 있으면서 수정하는 도리와 후학에게 끼친 공적이 지극하였습니다.
인종 을사년 봄에 태학 유생이 상소를 올려 정암 조광조의 관직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에도 “조광조는 젊어서부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에게서 학업을 전수받았고, 김굉필의 학문은 김종직에게서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버지 사예 김숙자에게서 전해 왔고,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였던 길재한테서 전해 왔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우리 동방 이학의 조종이 됩니다. 그 학문의 연원과 행신의 바름과 시행한 방법이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점필재는 참혹한 사화를 당한 직후에 벌써 후배 관료나 후학들에게 이학과 심학으로 한 시대 학문의 기풍을 참신하게 진작한 인물로 추앙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사색과 토론이 심화된 후대의 학자들 중에 간혹 김종직의 학문과 처신에 대하여 의심하는 이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조 성리학의 학문 수준이 전반적으로 가일층 제고된 뒤의 일일 따름, 소학이나 가례의 실천이 빈축을 받던 시절 이학과 심학의 궁구와 실천을 솔선하였던 김종직의 학문이 시대를 계몽하는 선각이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당대 사림의 종사로 불려졌던 것이다.
4. 조선 전기 제일의 시인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 전기 제일의 시인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조정 정책의 논의나 문학 논의에 간혹 의견의 대립을 보였던 허백당 성현도 이르기를 “선생은 시로써 세상에 이름을 울렸고, 조정 신하들 중에 붙좇는 자가 한이 없다.”고 하였으며, 100여년이 지난 뒤에 상촌 신흠은 이르기를 “점필재의 시가 으뜸으로 칭송되는 것은 실로 과장이 아니라”고 하였고, 홍만종은 이르기를 “성종 시대에 점필재가 독보였다.”라고 하였다.
김종직은 안으로 성정을 다스려 도덕을 닦고, 밖으로 세상을 경륜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것을 문학의 본령으로 보았다. 그는 이르기를 “문장은 작은 재주이나, 성정을 다스리고 풍속의 교화하여, 당대에 울리고 영원히 전하는 데는 실로 시문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구두를 떼고 글자의 뜻을 풀이하는 것으로 어찌 풍속을 교화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문장을 논하며, 글자를 아로새기고 짜 맞추는 것으로 어찌 성리 도덕의 학문에 참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라 이래 우리나라 시인들이 지은 시 중에서 “풍교를 알고 미자를 나타내어 성정의 올바른 태도를 터득한 것”을 골라 뽑아 『청구풍아』를 엮었다.
김종직의 시문은 친지와 붕우간의 정의, 향리의 인정과 풍광에 대한 깊은 애정, 국사와 풍토에 대한 치밀한 관찰, 민생의 실상과 사회 현실에 대한 세밀한 묘사, 학문과 수양에 대한 부단한 반성과 군주와 사대부의 높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 정치의 실현에 대한 염원 등을 즐겨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김종직은 문과에 급제한 직후부터 한직을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특전을 받은 9인의 문신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관각문인으로 촉망을 받았다. 그리하여 성종의 명을 받아 「창경궁기」를 짓고, 「환취정기」를 지었으며, 송나라 이학자 소강절시의 주석을 찬진하기도 하였다. 제왕에게 올리는 관각의 문자에는 대개 당대 군주의 성덕을 칭송하는 화려한 수사가 넘치기 마련이나, 김종직은 이런 글에서도 반드시 군주의 참다운 덕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길을 거론하여 우국애민의 도리를 진언하였다.
세조가 온양 행궁에 다녀 올 때 성균관 유생들을 대신하여 지은 가요에는 “부디 힘없는 백성을 보호할 생각을 하시어 추운 자 따뜻하게 하고 주린 자 배부르게 하시며, 밀린 일 일으키고 폐단을 보완하사 하루에 온갖 일을 돌보시라”고 당부하였고, 성종이 창경궁의 후원에 환취정을 짓고, 김종직에게 「환취정기」를 짓게 하자 이렇게 진언하였다.
봄볕이 화창하여 초목이 무성하면 천지가 사물을 생성하는 인자함을 느끼시고 병들고 찌들어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어떻게 하면 굶기지 않을까 생각하시며, 더운 바람이 불어 햇살이 뜨거운 찌는 더위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백성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고 골짜기 가득 서늘한 그늘을 어떻게 하면 고루 베풀어 줄 것인가 생각하시며, 낙엽이 떨어지고 추수가 끝나면 우리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지나치지 않아야 하리라 생각하시고, 옥가루 같은 눈이 떨어지고 차가운 날씨에 털옷을 껴입고서는 우리 백성의 부르튼 살결을 다시는 더 고생시켜서는 안되리라 생각하시어, 계절마다 좋은 경치를 보시면 언제나 거기서 정치를 시행함에 인자한 덕성을 베푸는 교훈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김종직이 조선 전기 제일의 문인으로 칭송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의 이치와 사회의 현실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철저한 사실성을 근간으로 하여 엄중한 법도와 전아하고 굳건한 기풍과 따뜻하고 간절한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이르기를 “점필재의 시문은 전아하여 도에 가까웠다.”고 하였고, 계곡 장유는 이르기를 “점필재의 문사가 가장 우수한 것은 문사와 이치가 잘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또 “그 시는 정심하고 온자하여 근대의 시조로 추앙된다.”고도 하였다.
추강 남효온은 이르기를 “점필재 김 선생이 말하기를 시는 성정을 도야한다 하였는데 나는 우리 스승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였다. 이처럼 점필재 시문은 논리가 치밀한 데다가 글이 잘 다듬어져 있고, 학문 수양에서 우러나온 온화하고 차분한 성정이 깊이 함축되어 있다.
김종직 문학의 탁월한 성과의 하나는 그 문학의 소재와 주제를 우리나라 역사 문화의 전통에서 다양하게 취하여 이를 훌륭한 문학 형상으로 다듬어 냄으로써 고유 문화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고 선양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유학자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민심을 현혹하는 근거 없는 미신을 타파하고, 당대의 잘못된 풍조나 사회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 문화의 전통에서 문명국의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각 지방의 풍물을 매우 자상하고 정감 있게 묘사하여 우리 국토의 풍정을 친밀하고 아름답게 인식시켜 줌으로써 문명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음은 그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명편의 일부이다.
보천탄 여울에서 도화랑 물결이 몇 자나 불어났는지 엎드린 바위 물에 잠겨 어딘지 모르겠네. 짝지어 날던 노자새는 놀던 터를 잃고서 고기를 물고는 부들 풀 사이로 날아드네.
비 온 뒤 제운루에서 빗발은 갈수록 점점 거두어지고 가벼운 우레 아직도 높은 누각에 울리는데 구름이 골짜기에 몰려들어 발이 어둡고 바람이 연못에 일렁이니 삿자리가 서늘하다. 연꽃 향기 속에 개구리는 개굴개굴 해오라기 그림자 너머 벼 포기는 반들반들 난간에 기대 다시금 두류산을 바라보니 천 길 봉우리가 옥룡처럼 치솟았네
선사사 우연히 선사사에 왔더니 바위는 비고 소나무는 가을학은 신라 시대의 우개를 뒤집고 용은 부처 세계의 공을 찬다 가는 비에 중은 누더기를 깁고 찬 강에 길손은 노를 젓는데 외로운 구름과 서대초는 펄럭펄럭 못 머리에 가득하네. 보은 신륵사 아래에 배를 대고 보은사 아래에 해 저물어 어둑어둑 닻줄 매고 중을 찾아 달빛을 밟으니, 절간 건물은 이미 새 법계를 이루었는데 강호 산천은 아직도 옛 시상을 돋구네. 상방의 종 진동하니 여룡이 춤을 추고 온갖 구멍 바람 일어 철 봉황이 나른다. 진중하여라 스님은 또 인사 차린다고 마침 채소 다발로 뱃길 안부를 묻네.
한식날 시골집 불을 금하는 날 봄 일이 많아서 봄빛을 점검하러 농가에 있노라니 비둘기 꾸욱꾸욱 아가위 잎에서 울고 나비는 너울너울 장다리꽃에 나는데 언덕 위로 나뭇짐 진 검은 소 돌아오고 울타리 가엔 나물 뜯는 아낙이 노래하네 전답 있어도 가지 않고 봉급에 연연하니 도연명의 비웃음을 장차 어찌 하려나.
의탄촌 늙은이는 볏단 쌓아 처마 높이 넘기고 송아지 밭에 들었다 아이를 꾸짖는다. 오비 감을 깎아서 냇가 돌에 널어 말리니 붉은 빛이 끊어진 다리 남쪽에 뻗쳤구나.
복룡 도중 대나무 남여 삐걱이며 맑은 시내 건너니 멀리 앞선 행렬이 산비탈 밭을 지난다. 동네 개 사람 보고 짖어 울타리에 구멍 나고 촌 무당은 귀신 맞아 종이로 돈을 삼는데, 끊어진 구름은 차가운 해를 삼켰다 뱉고 작은 봉우리 평탄한 언덕이 멀리 이어졌네. 남쪽으로 나주까지 삼십 리 길인데 가마꾼 어깨 다 벗겨질까 근심이 되네.
5. 도덕 문명의 이상과 지방문화의 진흥 조선조의 뜻있는 유학자들은 사람마다 효도하고 우애하며 충성스럽고 미더운 미덕을 닦아 인간관계의 질서가 반듯하고, 집집마다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친족 간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인류 공존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백성의 삶을 우선하는 사회질서를 구현하여, 사람들이 모두 제 생업을 가지고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덕 문명의 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학문과 경륜의 목표로 삼았다.
점필재 김종직은 젊어서부터 불합리한 관습과 제도를 고치는 일에 과감하였다. 그는 나이 24세 때 부친인 강호 선생이 교수의 직책을 맡고 있었던 성주에서 잠시 독서하며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향교의 학생들과 더불어 대성전에 참배하였는데, 거기에는 흙으로 만든 공자 이하 성현의 소상이 퇴락하여 눈이 없거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거나 의관이 퇴색하여 흉칙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김종직은 깜짝 놀라 이 사실을 글로 지어 향교 학생들을 깨우쳐, 밤나무로 만든 신주로 바꾸게 하였다. 이 일은 조정에 알려져 마침내 향교의 소상을 위판으로 개조하게 하였다.
김종직은 인류의 공존을 해치는 불의, 특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패도를 미워하였다. 그는 젊었을 때 「조의제문」을 지었다. 중국 진나라 말엽의 폭정에 항거하여 각처에서 일어난 민병들이 옛날 초나라 회왕의 손자를 의제로 옹립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진나라에 대항하였는데, 서초패왕 항우가 의제를 몰래 시해하고 권세를 차지한 일이 있었다. 점필재는 의제가 인의의 정치를 표방하였음에도, 항우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시해한 일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는 또한 동진말엽에 내란을 평정하여 권세를 차지한 유유가 황제인 공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송나라 황제가 된 다음 폐제를 시해한 사건을 두고 「화도연명술주시를 지어 비판하였다. 이런 시문은 모두 무도한 권력자의 횡포로 인간관계의 믿음이 무너지고 사회 평화가 파괴되는 비극을 애도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김종직은 한편으로 선량하고 후덕한 풍속을 선양하는 데 힘썼다. 신라 눌지왕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간 아우들을 그리워하자 그를 위해 왕의 두 아우를 신라로 돌아오게 하고 목숨을 바친 박제상의 일화를 읊은 「우식곡」 시에서는 “우애하는 즐거운 정 얼마나 깊었느냐”라고 하여, 제왕이 그 형제를 우애하는 마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근본이 됨을 비유하였고, 「도요저」 시의 소서에서는 김해 낙동강 가의 물가에서 생선을 팔아 간신히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절을 중시하는 기풍을 칭송하였다. 또한 김종직은 승지로 있을 적에 성종으로 하여금 그 사가의 형인 월산대군과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도록 극력 권장한 바 있다. 군주가 형제를 사랑하고, 신하는 바른 도리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고, 한 집안 가족은 각기 서로 의지하여 애모하는 것이 인간다운 문화의 원천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김종직은 유자로서 굳건하고 충직한 신념을 가지고서도 능히 유연하게 처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 출사하여 시문으로 명성을 떨칠 무렵, 세조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신들을 각기 천문, 풍수, 율려, 의학, 음양, 사학, 시문 등의 7학으로 나누어 각 부문에 소속시켜 익히도록 하였다. 김종직은 이 때 사헌부 감찰로서 사학 부문에 소속되었는데,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문신이 사학과 시문을 익히는 것은 그 본분이나, 그 외의 잡학을 익히도록 하는 조처는 부당하다.”고 간언하였다가 세조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잡학을 전문으로 하는 별도의 관원이 있음에도 세조가 문신들에게 이를 학습하도록 한 것은 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권위와 신념을 제왕의 권위 아래 두려는 일이었다. 김종직은 문신의 본분이 나라를 경영하는 경륜을 펴는 본연의 학문에 충실함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세조는 현실에 어두운 선비의 망언으로 치부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종직은 관직생활 30년 동안 반은 지방관으로 재직하였고 반은 중앙 관서에서 재직하였다. 그가 중앙 관서에서 맡은 직책은 대개 국가의 문물을 정비하는 교육과 문학의 책무였다. 그러나 훈구 대신들이 즐비하게 포진해 있는 중앙 정부에서 그의 포부와 신념을 제대로 펼치기는 어려웠다. 그가 그의 경륜을 제대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지방관의 직책을 맡았을 때였다.
김종직은 지방관원으로서 맡은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솔선하여 지방 행정을 개선하고 그 지역의 물산과 풍속을 면밀하게 파악하여 민폐를 덜고 인재를 양성하고 물산을 장려하며 선량한 예속을 형성하는데 힘을 써서 탁월한 행정 수완을 발휘하였다. 출사 초기에는 경상도 병마평사로서 각 고을의 군사를 점검하고 조발하는 책무를 수행하면서 「경상도지도지」를 제작하였다. 바다 건너 일본과 대치하고 있는 경상도로서는 고려 말 이래 해안에서 빈번하게 소요를 일으키는 외침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경상도의 명산대천과 주요 읍과 부락, 봉수와 역참 등의 척후와 전략의 요충지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중년에 함양 군수로 부임하여서는 「함양군지도지」를 만들었고, 선산 부사로 부임하여서도 「선산지도지」를 만들어 지역의 산천과 호구, 역참과 전리를 한 폭의 지도에 기록하여 지방 사정을 수시로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지방행정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서, 조선 중기 이후 널리 편찬된 지방 지리지의 선편이 되었다.
김종직이 함양군에 부임하여 다원을 만든 일 또한 널리 알려진 일이다. 조선 초기 남방 각 고을에서는 해마다 국가에 차를 바쳤으나 이 고을에서는 차가 나지 않으므로, 고을 주민들이 부과된 공물을 다른 고을에서 돈을 주고 비싸게 구해 바쳤다. 점필재는 삼국시대의 역사 기록을 살펴 신라 시대에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에 심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고을이 지리산 자락에 있으니 필시 신라 때에 남긴 종자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여러 노인들을 찾아 물어서 마침내 엄천사 북쪽 대밭 속에서 차나무 몇 그루를 얻어서 차밭을 일구었다.
함양 군수로서 김종직은 또한 240여 간에 이르는 관청 부속 건물인 나각의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어 건설하였다. 함양군에는 본디 243간의 나각이 있었는데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어서 매년 농사철에 지붕을 갈아 덮느라고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그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전답과 호구에 따라 재목과 기와를 내게 하여 기와지붕으로 갈아 덮음으로써 매년 반복되는 폐해를 제거하였다.
성종은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고 백성들을 편하게 화합시켜 지방 행정의 모범을 보였다 하여 김종직을 포상하고, 성종 7년 정월에 승문 원사로 승진시켜 중앙정부에 불러 올렸다. 김종직은 곧 이를 사퇴하고 다시 선산 부사로 부임하였다. 선산에서는 향중의 부로들과 친척들을 모아 인사를 드린 후에 관원들을 단속하여 추상과 같은 법도를 세웠다.
김종직이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그 지방의 사회 문화를 토대로 풍속을 개선하고 문명의 기풍을 진작하는 일이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향교의 대성전에 나아가 참배하였고, 매년 봄과 가을에는 향음례와 향사례와 양로례를 행하여 현자를 존중하고 노인을 공경하는 선량한 풍속을 계도하는 데 힘썼다. 이런 행사는 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예의염치를 존중하는 기풍을 진작하려고 조선 정부에서 진작부터 권장해 온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지방관이 솔선하여 이런 의식을 행하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았다.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전주에서 향음례와 향사례를 거행하면서 점필재는 이르기를 “읍하고 사양하는 가운데 삼대의 기풍이 남았고”, “향리의 사람들이 남아 있는 의식을 알겠네”라고 하였다. 점필재는 유향소의 설치를적극 지지하여 승정원에 있을 적에 여러 번에 걸쳐 건의하였는데, 그 역시 향촌사회의 순후한 인간관계를 토대로 선량한 사회 기풍을 진작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김종직은 문명한 세상을 실현하는 여부는 학자들의 학문 기풍과 태도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는 “향리의 풍속이 흐려지고 조정의 정치 교화가 폐색되는 까닭은 그 병의 근원이 오로지 학교의 학문 강론이 밝지 못한 데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학교의 강학이 밝으면 효도하고 우애하고 충성하고 신의를 지키는 가르침을 사람들이 익혀서, 학교에서 마을과 고을로 점차 영향을 미쳐 나가면, 인간관계의 질서가 제 자리를 찾고 여러 직업의 모든 백성들이 제 직업에 편안하여 집집마다 선량한 풍속을 이로 인하여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장인 밀양의 풍속 교화에 유념하여 “밀양이 비록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나 산천이 아름답고 땅이 비옥하고 인심이 순후하다.”고 하면서 향사당을 중심으로 풍속의 순화에 힘쓰도록 사림들의 의욕을 북돋우고, 밀양향약과 향헌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조처들은 후일 지방마다 자치 규범으로서 향약을 정하고 향헌을 제정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이처럼 김종직은 관직에 나가서나 물러나서나, 서울에 있을 때나 지방에 있을 때나 평생 후진의 교육에 헌신하였고, 지방의 교육 문화의 기풍을 진작하는 데 힘을 기울임으로써, 각 지역의 토착 사림을 중심으로 지방문화를 진흥하고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6. 후진양성과 교육 이념 김종직은 나이 열 여섯에 영산 고을의 훈도로 임명된 이후 배우러 오는 학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간 이후로도 여가만 있으면 학생들을 가르쳤다. 세조 9년 사헌부의 감찰로서 어전에서 직간하다가 파면이 된 후, 서울 집에 있을 적에 학도들을 가르쳤고, 나이 41세에 함양 군수로 부임하여 5년 동안 재직하면서 고을의 총명한 학생들을 향교에 모아 매일 교도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들어 수용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는 선산 부사로 부임한 이후에도 계속하였고, 나중에 신병으로 조정에서 물러 나와서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김종직은 학도들을 가르침에 『소학』을 익혀 행실을 가다듬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심성을 수양하고 도덕성 높은 인격을 성취하여 천하를 경륜하는 선비가 되라고 격려하였다. 그는 안시숙등에게 준 시에서 “부귀를 구하는 학문은 부끄럽고, 낙천지명의 마음가짐이 즐겁다.”고 하였으며, 원개와 곽승화등에게 준 시에서는 “요순 같은 군주와 백성을 만들자는 평생의 뜻, 가벼운 수레 살찐 말을 어찌 부러워하리”라고 하였다. 이처럼 김종직은 젊은 학도들에게 학문에 정진하되 부귀영화를 선망하지 말고, 요순 시대처럼 태평성대를 이루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김종직이 교학에 기울인 정성과 성과는 당대의 사대부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그의 훈도를 받고 문과에 급제한 유호인이 지방관을 자청하여 나갈 적에 사숙재 강희맹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선산의 김종직 공이 군수가 됨에 고을의 부로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기를 원님이 문교를 숭상하여 문교가 크게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웃 여러 고을의 의관 자제들이 양식을 싸들고 배우러 오는 자가 무려 수십 인이며, 그 중 학업이 성취되어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10여인이요, 사마시에 급제하여 대과를 기다리는 자도 대여섯 사람이 넘는데, 대과에 급제한 창녕의 조위나 고령의 유호인등은 모두 사군이 길러낸 인물로서 웅문거필로 남도에 명성을 날리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김종직의 문하에는 도덕과 학문과 문장을 겸비한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도학으로 이름이 높았고, 유호인, 조위, 김일손, 권오복, 이주 등은 문학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남효온, 홍유손, 정희량 등은 은일의 명사로 알려졌다. 그 밖에도 김종직의 훈도로 덕성과 명망을 이룬 자가 매우 많았다. 다음은 그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간략한 행적이다.
유호인 (1445-1494): 자는 극기이다. 고령인으로 함양에서 태어났다. 성종 임진년(1472)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자 찾아가 학업을 청하였다. 갑오년(1474)에 등과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의성 현령을 자청하여 나왔는데, 성종은 그의 문학을 높이 사서 해마다 지은 시를 초록하여 올리도록 하고, 그 재능을 포상하여 모친에게 음식을 내리기도 하였다. 6년의 임기를 채우고 조정으로 들어가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다시 부모 봉양을 청하여 합천 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한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나이 50세로 죽었다.
정여창 (1450-1504):자는 백욱이고 호는 일두이다. 하동인으로 함양의 덕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나, 세조 정해년(1467) 아버지 육을이 의주 통판으로 이시애의 난에 순절하자, 부친의 시신을 전장에서 수습하여 고향에 반장( 5 /)하였다.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다. 성종이 성균관에 명하여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인사를 천거하게 하자, 제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17년(1486)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였다. 성종 21년(1490)에 소격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상소하여 취임하지 아니하고, 그 해 12월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로 옮겼다가 안의 현감이 되어 지방으로 나왔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결성하였다는 죄목으로 종성으로 유배되고 갑자(1504) 4월에 적소에서 죽었다. 중종 때 신원이 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1454-1504): 자는 대유, 호가 한훤당이니, 서흥인으로 선대부터 현풍에서 살았다. 그는 단종 갑술년(1454) 한양의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자라서 김종직에게 『소학』을 배우고서는 이를 학문의 표적으로 삼아 실행에 힘을 썼다. 그는 부친상에 3년 동안 여묘를 하고 성종 11년 경자(1480) 사마시에 올라 성균관에 있으면서 척불을 논하였다. 이때부터 문하에 학문을 배우려는 후학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는 『소학』으로 행실을 가다듬는 것을 가르쳤다. 성종 갑인(1494)에 행의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임명되고 연산군 원년(1495) 전생서 참봉으로 옮기고, 병진(1496)에 다시 군자감 주부,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가, 정사(1497)에 형조좌랑이 되었다. 무오년 사화를 만나 김종직의 문도라는 명목으로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경신년(1500)에 다시 조위와 함께 순천으로 이배되어 갑자년(1504)에 적소에서 형을 받았다. 처음 김종직을 찾아 갔을때 김종직이 『소학』을 주면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도 이 속에 있다.’고 하자, 나이 30여세가 되도록 『소학』만 읽으면서 시사에 대하여 논하는 사람이 있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라고 했다 한다. 중종 때 신원이 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위 (1454-1503): 자는 태허 호는 매계이며, 창녕인으로 김종직의 부제이다. 어려서부터 감찰과 현풍 현감, 울진 현령 등을 역임한 부친 조계문 (1414-1489)으로부터 문자를 익히고, 열 살 때 자형인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다. 1471년에 생원 진사 초시에 3장 장원으로 합격하여 문명을 떨치고, 1474년에 식년과에 급제하여, 병신년(1476) 8월에 독서당에 선발되고, 홍문관 정자, 저작, 부수찬, 수찬, 사헌부 지평, 시강원 문학, 응교를 거쳐 함양 군수로 나왔다가, 1491년 신해에 검상, 장령, 동부승지, 도승지를 거쳐 1493년에는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참판이 되고, 『점필시집』을 편찬하여 들이라는 명을 받았다. 1494년에 충청 감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성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1495년에 한성부우윤, 대사성이 되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7월에 금산으로 돌아갔다가, 전라 감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모부인이 졸하여 상복을 입었다. 무오년(1498) 2월 동지중추부사로서 성절사에 임명되어 4월에 중국으로 떠났는데, 7월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그 문집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올렸다는 죄목으로 도강 즉시 처참하라는 명이 내리고, 압록강을 건너자 명이 바뀌어 의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순천으로 옮겨 김굉필과 같이 거처하다가, 적소에서 병으로 죽었다. 시학에 조예가 깊어 성종 때 『두시언해』의 번역 간행을 주관하였고, 정희량, 이종준, 이주, 박상, 이행 등 그에게서 시학의 훈도를 받은 이가 많았다.
남효온 (1454-1492):자는 백공이고 호가 추강이며 의령인이다.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김종직에게 수업을 청하였는데, 김종직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하여 예우하였다. 성종 9년(1478)에 소릉을 복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방을 유람하다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기 전에 「자도사를 지어 점필재에게 올리고, 『추강냉화 『사우명행록』, 「육신전」 등을 저술하여 학문 신념이 투철하고 기개 있고 지조 있는 당대 사람들의 사적을 두루 채록하였다. 연산군 갑자사화 때 소릉 복위의 상소를 올렸다는 일로 죄를 받아 무덤이 파헤쳐졌다.
김일손(1464-1498): 자가 계운 호는 탁영이다. 김해인으로 집의 맹의 셋째 아들로 청도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훈도를 거쳐 김종직에게 수학하고 성종 병오년(1486)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년 식년시에 3장 장원을 하고 대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갑인년(1494) 정월에 의정부 검상이 되고, 2월에 헌납, 3월에 병조정랑, 5월에 홍문서 교리, 예문관 응교, 7월에 어모장군 겸 태자시강원 문학, 8월에 다시 교리 겸 문학이 된 뒤, 9월에 이조정랑, 승문원 교리, 경연시독관이 되었고, 11월에 양관 응교와 경연시강과 춘추관 편수관, 춘방필선을 모두 겸직하여 특별한 촉망을 받았으나,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 원년(1495) 3월에 사직의 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다시 소릉복위를 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침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무오년(1498) 6월 복을 벗을 때까지 고향에 머무르다가, 7월에 사화를 만나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을 받았다. 사국의 일로 취조를 당할 적에 세조조의 일을 왜 기록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전해들은 일은 좌구명도 썼으니 나도 쓴다.”고 하여 사관으로서 직필의 정당함에 대한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박한주(1459-1504): 밀양인으로 자는 천지 호는 우졸재이다. 성종 을사년(1485)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과 헌납 등의 관직과 예천 군수를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 하였다. 연산군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봉을 아로새긴 장막을 치고 주연을 펼치며 정사를 돌보지 않자, 사헌부 헌납으로 있었던 박한주는 주연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연산군이 “용봉 장막이 네 것이더냐?” 하고 역정을 내자, 박한주는 “이 장막은 모두 백성의 힘으로 만든 것이니, 백성들의 장막이라 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어찌 상감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하였다고 한다.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도라고 벽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갑자년에 극형을 받았다.
이종준(?-1499): 자는 중균, 호는 용재이며 경주인이다. 성종 을사년(1485)에 문과에 급제하고, 의성 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으며, 1494년 사헌부 지평이 되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일본 호송관, 북평사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시는 물론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나 한 때의 풍류 명사로 이름이 났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는데, 도중에 지은 시 한 수가 조정을 비방하였다고 문제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권오복(1467-1498): 자는 향지이고 호는 수헌이다. 예천인으로 성종 병오년(148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에 들어갔는데, 김종직의 가르침을 받고 김일손 등 여러 사람과 막역한 교분이 있었다.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극형을 받았다.
이원(.?-1504): 자는 둔옹이고 호는 재사당이며 경주인으로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며 박팽년의 외손이다. 성종 기유년(1489)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호조좌랑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으로 건의하였다고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에 극형을 받았다.
문인록에는 이 외에도 김맹성, 이승언, 원개, 이철균, 곽승화, 강흔, 권경유, 이목,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노조동, 강희맹, 임희재, 이계맹, 강겸, 홍한, 이총, 정승조, 강백진, 강중진, 김흔, 김용석, 홍유손, 최부.표연말, 안우, 허반, 유순정, 정세린, 우선언, 신영희, 손효조, 김기손, 강혼, 주윤창, 양준등이 올라 있다. 문인록에 등재되지 않았지만 그 밖에도 향리의 후진으로 박형달, 안구, 박수견, 민구령 형제를 비롯한 많은 문생 후학들이 있었다.
7. 무오사화의 비극과 교훈 서기 1498년 조선 연산군 4년 7월 27일 조선 조정에서는 「조의제문이라는 글을 근거로 전대미문의 참혹한 처단을 내렸다. 이미 6년 전에 죽은 김종직에게는 이 글을 지었다는 이유로 그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의 형벌을 내리고, 그 문도인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에게는 능지처참, 이목 허반등에게는 처참의 형벌을 가하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이총,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등은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결성하여 국정을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100대의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유배하였으며, 그 밖에 이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거나 금고, 유배, 좌천된 자가 줄을 이었다. 「조의제문」은 중국의 진한 교체기에 의제로 추대되었다가 시해된 초회왕의 손자인 심을 조문하는 글이다.
이 글은 본디 김종직이 27세였던 1457년에 밀양에서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점필재 사후 성종의 명에 따라 문집을 엮어 올리면서 문집의 첫머리에 실렸다고 한다. 문집이 헌정된 성종 시대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 글이 참혹한 사화의 빌미가 된 것은,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시대의 암울한 치부를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려 획책하였던 유자광 등 일부 정치 모략가의 충동 때문이었다. 유자광 등은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사건을 풍자한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하여, 김종직과 그 문도들은 세조에 대한 반역 도당이니 징벌하여야 한다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였다.
그로부터 9년 뒤, 연산군이 추방된 이듬해인 조선 중종 2년 1507년에 예문관에서 상소를 올려 “무오년 역사를 편찬하는 관원들이 사사로운 혐의로 공론을 돌보지 아니하고 몰래 대신을 사주하여 임금의 분노를 도발하고, 유자광 등이 뒤따라 부르짖어 마침내 큰 화를 일으킨 것은, 한편으로는 만고에 떳떳한 역사가의 법도를 훼손하고, 한편으로는 임금이 신하를 마음대로 죽여도 좋다는 생각을 열어 준 것으로, 용서받지 못할 죄인데도 도리어 상을 주었으니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하여, 김종직과 김일손 등 사화에 연루된 자의 관직을 모두 복구하고, 당시에 추관이었던 윤필상, 노사신, 유자광 등에게 내린 상과 사실을 누설한 사람을 조사하게 함으로써 복원되었다.
사실 의제가 옹립되었다가 시해된 일은 대대로 문인과 역사가들의 논변 거리가 되었고, 그 사실이 세조와 단종의 일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어서, 견강부회하지 않는다면 문제로 삼을 것이 못되었다. 또한 사초에 올린 문서라도 사료로 채택하기에 부적절하면 세초하여 덮어두면 그만인 일이고, 이미 죽은 사람의 일을 다시 끌어다가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죽여야만 할 위급한 사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를 김종직과 그 영향을 받은 젊은 관료들을 일거에 숙청하는 빌미로 사용한 것은 무도한 권력의 횡포였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김종직이라는 걸출한 인물과 그 영향력에 대한 당대 권력층의 경계심과 반발의 강도를 반증한다.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에 이르기를 “전에 김종직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이 충신입니다.’ 하였더니 성종이 놀래어 낯빛을 변하므로, 김종직이 천천히 아뢰기를 ‘불행히 변고가 있으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안색이 펴졌었다. 애석하다 시신이 이러한 말로 임금에게 아뢰는 이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처럼 점필재는 바른 길로 군주를 계도하면서도 능히 변통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참혹한 사화를 겪으면서도 당대의 지식인들은 김종직을 사림의 종사로 받드는 데 이론이 없었던 것이다. 혹 논자들 가운데는 무오사화의 참혹한 피해를 끔찍하게 여겨 김일손이 사초에 「조의제문」을 올리지 말아야 하였고, 점필재가 그런 글을 짓지 말아야 하였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식인의 책무를 저버리고 진실을 호도하는 말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잘 섬기는 자는 그 잘못을 시정하여 바른 길로 나가도록 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나의 군주는 요순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군주의 덕성을 해치는 자라고 하였다. 위정자의 권세가 아무리 두렵다 하더라도 지식인은 진실과 올바른 도리에 대하여 침묵해서는 안되고, 진실을 지적하고 올바른 도리를 논하였다고 하여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일 따름이다. 지조 있는 지식인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 사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미덕이고, 진실을 논하여 올바른 도리를 일깨움으로써 불의를 자행하는 권력자의 오만을 견제하고 사회 정의를 지켜 가는 것은 양심을 가진 지식인의 영원한 책무이다.
8. 김종직의 저술 점필재 선생 문집: 점필재 선생 김종직이 몰한 뒤 성종의 명으로 매계 조위가 남긴 글을 모아 편집하여 궁중에 들였으나, 곧 이어 성종이 승하하여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연산군 정사(1497)에 초간본이 간행되었는데, 무오사화를 당하여 문집이 회수되어 불타버렸다. 중종 경진년(1520)에 강중진이 남곤과 더불어 유고를 수습하여 시 1700여수와 문 몇 편을 모아 다시 간행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개변을 거듭하였다. 김종직의 시는 대부분 정무의 여가나 여행길에 다른 사람들과 교유하며 수작한 것으로, 시를 지은 내력과 정황이 간략하게 부기되어 있어서, 이를 통하여 김종직의 사상과 관심의 소재를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사회 문화의 기풍과 역사 풍물 또한 정감 있고 소상하게 살필 수 있다. 시집23권, 문집 2권, 도합 25권과 연보, 무오사적, 문인록등이 부록으로 붙은 판목이 예림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이준록: 김종직이 그 부친인 김숙자의 가계와 평생 행적 및 관련 문헌을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는 김종직 가문의 가계도와, 강호 김숙자의 평생 행적, 강호가 평소 교유한 사람들의 이름과 약력, 강호의 평소 언행과 선행 및 공적, 그리고 사당과 집안 제사의 절차와 의물을 기록한 제의 등 5편과, 김종직의 외조부 박홍신의 전과 모친의 행장을 부록으로 첨가하였다. 이를 통하여 김종직의 가학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조선 초기에 새로 등장한 지방 사족 출신의 사대부 가문의 가계 계승과 가정의 범절, 교육 방침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회당고: 김종직이 소년 시절부터 30세 전후까지 창작한 시 331수를 수록한 시집이다. 이 책의 시는 모두 점필재시집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그 중 3수가 속동문선에 수록되었다. 여기에는 김종직이 생장하고 학업을 닦았던 소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거주 내왕하였던 밀양과 선산, 고령, 개령, 금산 등 경상도 각지의 풍정이 잘 나타나 있다.
당후일기: 성종 13년(1482) 11월 2일부터 같은 해 12월 25일까지 김종직이 경연에 참석하여 군신 간에 주고받은 대화와 중요한 정무를 기록한 일지이다. 김종직이 경연과 춘추관 기주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을 때의 기록으로, 당시 경연에서 군신 간에 이루어졌던 학문과 정치의 주요한 관심과 내용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청구풍아: 김종직이 신라 말기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한시 작가 126인의 대표적인 한시 517수를 가려 뽑은 시선집이다. 고려조에 김태현, 최해, 조운흘 등이 우리나라 시문을 모아 편찬한 바 있었고, 조선 초기에 변계량이 또한 역대시를 초록한 바 있었는데, 김종직은 이들 선집을 토대로 다시 내용을 보완하고 간략하게 주해를 달아 7권의 책으로 묶어 간행함으로써, 학자들로 하여금 시를 통하여 우리나라 역대의 역사 지리와 인물 풍속을 살펴보고 각 시대 기풍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동문수: 신라 이래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의 문인이 지은 문장을 가려 뽑은 명문 선집으로, 최치원으로부터 조선 초 이승소에 이르는 29인의 작가가 지은 135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본디 세종조 집현전 학사들이 가려 뽑은 명문 초고를 바탕으로 김종직이 다시 편집하여 간행한 것이다.
9. 점필재의 유적 추원재: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에 있다. 강호 김숙자가 처음 거처를 정하였고 점필재 김종직이 태어나 자라고 별세한 집터이다. 마을 앞에는 김종직이 만년에 제자들과 토론하고 강학하던 쌍수정이 있었고, 뒷산에는 김종직의 묘소가 있고, 마을 앞에 신도비각이 있다. 순조 10년(1810)에 사림과 후손들이 합의하여 전래하는 건물을 개조 중건하여 집은 추원재라 하고 당호는 전심당이라 하였다.
예림서원 :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다.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주벽으로, 우졸재박한주, 송계신계성을 좌우에 배향하여, 밀양 유림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에 향사를 치른다. 명종 22년(1567)에 당시 밀양 부사 이경우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 이황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 아래 영원사 옛터인 덕성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이라고 하였는데, 인조 13년(1635)에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옮겼다가 숙종 6년(1680) 묘우가 소실되어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하였는데, 고종 8년(1871)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1년(1874) 지방 사림이 강당 5칸과 동서재 등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하고, 1945년에 사액 현판을 다시 달았다. 부속 건물로는 사우인 육덕사와 정양문, 강당과 동재, 서재, 양몽재 및 정문인 독서루와 관리사가 있다. 『점필재문집』과 『이준록』 책판이 보존되어 있다.
금오서원: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남산아래에 있다. 조선 명종 22년(1567)에 송정최응룡이 고을 사람과 더불어 건립하여 야은 길재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향사하였고, 선조 금오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불탄 뒤에 선산 원리 남산으로 옮겨지으면서 점필재 김종직, 신당정붕, 송당박영을 함께 모셨다. 그후 여헌장현광을 추향하여 오현의 위패를 모셨다.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에도 철거하지 아니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렴서원: 경상북도 김천시 문당동 배천에 있었던 서원이다. 당초 김종직이 김천의 창녕 조씨 가문에 장가든 뒤에 이곳에 못을 파고 연을 심고 집을 지어 경렴당이라 하였는데, 점필재가 죽은 뒤 인조 26년(1648)에 김산 군수 조송평이 지금의 감천면 금송동 금곡에 있던 사미정을 헐어내고 그 자리로 옮겨 경렴서원이라 하고, 염계 주돈이와 회암 주자를 주향으로 하고,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하여 동대최선문, 노촌이약동, 매계 조위, 남정김시창등의 학자를 배향하였다. 1868년 대원군 때 철폐되어 없어졌다.
백연서원: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현종 11년(1670)에 건립하여 문창후최치원과 문충공김종직을 향사하였는데, 고종 때 철거되었다.
점필재 종택: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 있는 선산 김씨문충공파의 종가이다. 안채는 1800년경에 건립하여 1878년에 중수하였고, 사랑채는 1812년에 건립하였다. 김종직 선생의 불천위신주를 모신 사우가 있고, 점필재 선생이 친필로 작성한 『당후일기』와 교지, 첩지 및 모부인의 서찰, 후부인 문씨의 분재문기와 호구단자, 전답매매 명문등 성종조부터 19세기까지의 세대별 고문서 114점 및 상아홀, 성종이 하사한 필옹옥우벼루, 유리 술병, 매화연 등 선생의 수택 유품이 남아 있다.
10. 점필재 선생 연보 1431. 6월. 경자일 갑신시에 밀양의 한골에서 3남 2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에 앞서 선생의 부친인 강호 선생이 1420년 봄에 사재감정 박홍신의 딸과 혼인하여 선산에서 밀양으로 이사하였다.
1436. 6세. 선공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동몽수지?, 『유학자설?, 『정속편』을 모두 배송한 뒤 『소학』, 『효경』과 사서오경을 배웠고, 그 다음에 『통감』과 역사와 백가의 서적을 배웠으며, 활쏘기와 글씨와 계산까지 배웠다.
1442. 12세.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1443. 13세. 주역을 배웠다. 선공이 고령 현감으로 나가 있었는데, 여름철에 청사에 앉아 선생은 중형인 과당공과 함께 주역을 공부하였다.
1446. 16세. 서울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를 지었는데, 합격하지 못했다. 그 때 김수온이 태학사로서 낙방한 시지를 나누어주었는데, 그 중에 선생이 낙방한 시가 있어서 읽어보고는 기이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는 뒷날 문형을 잡을 솜씨인데, 높은 인재가 낙방한 것이 애석하다.” 하면서 그 시권을 가지고 들어가 아뢰었더니 세종대왕이 기특하게 여겨 영산훈도로 임명하였다. 당시 한강의 제천정에 시가 한 수 씌어 있었는데
“눈 속의 차가운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을 볼 때는 쉽지만 그릴 때는 어렵나니 세상 사람 눈에 안 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연지를 가지고 모란이나 그릴 걸”이라 하였다. 뒤에 김수온이 제천정을 지나다가 이 시를 보고는 “이는 필시 「백룡부」를 지은 솜씨이리라” 하였다. 탐문해 보았더니 과연 선생이 지은 것이었다.
1448. 18세. 선공을 모시고 서울에 있으면서 남학에 소속되었다. 선공의 명을 받아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451. 21세. 창녕 조씨울진 현령 조계문의 딸에게 납채하였다. 매계조위는 부인의 아우이다.
1452. 22세. 백씨와 함께 개령에서 부친을 모셨는데, 지지당 김맹성이 와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1453. 23세. 봄에 진사에 합격하고, 겨울에 초례를 행하였다. 이 해에 비로소 태학에 유학하였는데, 『주역』을 읽으며 성리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1454. 24세. 선공이 시묘살이를 하면서 몸을 많이 손상하였는데, 선생이 근심하여 「유천부」를 지었다. 선공은 성균 사예로 있다가 성주 교수로 나왔는데, 선생은 중형과 함께 문안하러 갔다가 성주 향교에 머물며 책을 읽었다. 공자 사당에 참배하러 갔다가 사성십철의 소상을 보고는 부를 지어 율주로 고치게 하였다.
1455. 25세. 백형과 함께 동당시에 합격하였다.
1456. 26세. 선공의 상을 당하여 밀양읍 서쪽 고암산 분저곡에 장사지내고, 백씨, 중씨와 함께 여막을 짓고 시묘하였다.
1458. 28세. 상복을 벗고, 몇 칸 집을 지어 명발와라 이름하고 경전을 연구하였다. 『이준록』을 지었다. 모부인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가을에 별시 초시에 합격하였다.
1459. 29세. 봄에 문과에 급제하여 11월에 백씨와 함께 사조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잔치를 열었다. 당시 선공은 원종공신으로서 중직대부 예문관 직제학 겸춘추관 기주관의 증직을 받고, 모부인 역시 영인으로 올랐다.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보직되었다.
1460. 30세. 봄에 승문원 저작으로 임명되었다. 백씨 직학공이 3월에 나이 38세로 서울에서 객사하였다.
1461. 31세. 승문박사로 승진하고, 12월에는 왕세자빈 한씨의 애책문을 제진하였다.
1462. 32세. 인수왕후를 받들어 높이는 옥책문을 지어올렸다.
1463. 33세.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었는데 어전에서 불사를 간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중추에 왕세자가 문소전에 제사하는 제문을 지었고, 선생이 대축을 맡았다.
1464. 34세. 학도들이 모여들어 가르쳤다.
1465. 35세. 영남병마평사로 기용되어 각 읍의 병마를 점검하였다. 「경상도지도지」를 지었다.
1466. 36세. 순변사의 막부에 있으면서 평사로서 절도사 진례군을 따라 다인현에 갔고, 7월에 이시애가 모반하자 절도사의 공문을 가지고 병정을 선발하기 위해 영해부에 갔다.
1467. 37세. 일을 마치고 홍문관 수찬으로 들어갔다.
1468. 38세. 이조좌랑 겸 춘추관 기주관, 교서관 교리 지제교로 임명되었다. 세조 승하.
1469. 39세. 조산대부 전교서 교리 겸 예문관 응교 지제교로 임명되었다. 10월 초6일에 임금이 본서에 『제범의 훈사를 인쇄하여 바치라는 명이 있었다. 예종이 승하하자 「시책문」을 지어 올리고 만사 3수를 지어올렸다.
1470. 40세. 성종이 경연을 처음 열면서 문학하는 인사 19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중에 들었다. 6월에 예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겨울에 경연에 들어갔을 때 모부인의 연세 71세로 노쇠하여 부모를 봉양하겠다고 사직하였는데, 성종이 함양 군수로 임명하였다. 12월 16일에 성종이 세조의 신주를 받들어 태묘에 부제를 지내는데 참여하였다.
1471. 41세. 정월 상순에 조령을 거쳐 함양의 임지로 갔다. 경내의 총명한 관동들을 모아 날마다 강독하였다. 9월에 조열대부로 승진하고 12월에 봉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유자광이 군의 누각에 새긴 현판을 떼어내었다.
1472. 42세. 춘추로 향음주례와 양로례를 행하였다.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등이 문하에 다니며 배웠다.
1473. 43세. 중훈대부로 승진.
1474. 44세. 아들 목아가 5살로 죽었다. 다원을 일으켰다.
1475. 45세. 중직대부로 승진하였다. 함양성 나각을 기와로 고쳐 덮었다.
1476. 46세. 정월에 지승문 원사로 들어갔다가 또 귀향하고 7월 1일에 선산 부사로 임명되었다. 매월 삭망에 선성의 사당에 배알하고 향음주의를 시행하였으며 춘추로 양로례를 행하였다.
1477. 47세. 9월에 「선산지도지를 만들었다. 1478. 48세.
1479. 49세. 10월에 모부인이 병석에 눕고 12월 20일에 80세로 운명하였다.
1480. 50세. 정월 초3일에 지동 분저곡에 빈을 하고 3월에 선공과 민부인 두 무덤 사이에 하관하였다. 『이준록』을 다시 정리하였으나 선공사업과 제의는 그대로 두었다.
1481. 51세. 양준, 양침, 홍유손등이 배우러 왔다.
1482. 52세. 2월에 복을 마쳤다. 김맹이 아들 기손과 일손을 보내어 학문을 청하였다. 3월에 가솔을 이끌고 배에 태워 금릉의 옛 거처로 돌아가서 경렴당을 지었다. 밀양 향교의 학도들에게 서찰을 보내어 격려하고, 학규를 만들고 「향헌」을 만들었다. 3월 11일에 홍문관 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임명하였는데, 4월 15일에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서 경연에 입시하였다. 4월 30일에 숙인 조씨가 졸하였다.
1483. 53세.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 찬관 춘추관 수찬관 지제교로 승진하고, 곧장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3월에 대행대비 정희왕후를 천장하는데 그 「애책문 」을 지어올렸다.
1484. 54세.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내반원기와 환취정기를 지었다. 8월 초6일에 가선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경연참 찬관 춘추관 수찬관 지제교 예문관 제학 상서원정으로 임명되었다.
1485. 55세. 정월 27일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홍문관 제학, 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사복 첨정 문극정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성현, 채수등과 경복궁 홍문관에서 『동국여지승람』을 수정하였다. 여름에 병으로 사직하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9월 29일에 첨지중추부사 겸동지경연 성균관사로 임명되었고, 10월에 가선대부 홍문관 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1월에 부득이 대궐에 가서 경연에 입시하였다.
1486. 56세. 3월 초3일에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여지승람』을 편찬하는 일을 다시 시작하여 이창신, 신종호등과 더불어 일을 마쳤다. 교리 이의무, 유호인, 수찬 최부가 함께 일했다. 7월 22일에 아들숭년이 태어났다.
1487. 57세. 경기도 관찰사 겸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를 하여 교체되었다. 5월에 예문관 제학으로 있다가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전주 부윤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1488. 58세. 5월에 상소하여 교체되고 병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으로 임명되었다. 10월 16일에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동지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청구풍아』, 『동문수』, 『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었다.
1489. 59세. 정월 21일에 공조참판 겸 동지경연 홍문관 제학 성균관사로 임명되었고, 3월 초1일에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지경연 홍문관 제학 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고 중추부사로 옮겼다.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동래온천에 목욕하겠다고 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1490. 60세. 원근의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1491. 61세.
1492. 62세. 7월에 서적을 살펴 다른 사람의 서책을 돌려주게 하였다. 8월 19일에 명발와에서 역책하였다. 밀양의 무량원 건좌손향에 장사지냈다. 숭년의 나이 7세로 정부인 문씨가 주상하고, 생질인 강백진, 강중진, 호조참판 조위가 호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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