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을 넘지 못했던 개구리를 먹는다는 것… 현실과의 타협일 수도
영화 ‘매그놀리아’에선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져 등장인물들을 놀라게 만든다. 뉴라인시네마 제공
그들이 개구리를 먹은 것은 미식(美食)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는 벗 유종원(柳宗元, 773~819)이 남방으로 좌천된 뒤 개구리를 먹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썼다.
두꺼비(toad)[학명: Bufo bufo gargarizans CANTOR] 두꺼비과에 속하는 동물, 더터비·두텁·둗거비라고도 하였으며 한자로는 섬여(蟾蜍)·축추(鼀𪓰)·추시(𪓰𪓿)·섬제(詹諸)·나하마(癩蝦蟆) 등으로 불린다.
‘하마(蝦蟆)’는 개구리의 일종으로 두꺼비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무렵 시인 역시 조주(潮州)로 좌천돼 낯선 풍토에 적응하느라 힘겨웠다. 뱀과 개구리를 먹는 것은 중국 영남(오령 아래 남쪽 지방)의 음식 문화였지만 북방 출신의 시인에겐 잘 맞지 않았다‘初南食貽元十八協律’. 특히 개구리는 시끄럽게 울어 잠도 방해하고 우둘투둘한 피부로 거부감을 줬다.
❁ 漢詩 영화로 읊다,
‘유종원(柳宗元)에 개구리를 먹었다는
소식에 답하다(答柳柳州食蝦蟆)’
내가 처음에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다가,
근래에 또한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지.
남쪽 변방의 풍속에 물들어,
평소 즐기는 것 잃을까 늘 두려웠네.
그대는 또 무엇 때문에,
진귀한 표범의 태반처럼 맛있게 먹었는가?
(중략)
슬푸구나 그대의 생각 깊건만,
아직 배 돌리는 일 허락받지 못함이.
余初不下喉(여초불하후),
近亦能稍稍(근역능초초).
常懼染蠻夷(상구염만이),
失平生好樂(실평생호요).
而君復何爲(이군부하위),
甘食比豢豹(감식비환표).
(中略)
哀哉思慮深(애재사려심),
未見許廻櫂(미견허회도).
조선시대 문인에게 이 시는 한유와 유종원이 개구리를 먹었던 사례로 언급되곤 했다. 성현(成俔(1439 ~1504))은 이런 음식을 안 먹는 건 편협한 일이지만, 먹는 것 또한 지나치다고 썼다‘僧魚’. 하지만 이 시는 단지 개구리를 먹는 것에 대해서만 한 말이 아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1970- )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1970- ), 매그놀리아(Magnolia)(1999)
개구리가 등장하는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로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1970- ) 감독의 ‘매그놀리아(Magnolia)’(1999년)를 들 수 있다. 끝부분에 개구리 비가 무자비하게 쏟아진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의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란 구절과 관련이 있지만 의미는 모호하다.
시에서도 개구리 먹는 얘길 주제로 삼은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영화나 시 모두 하나의 메타포로 개구리를 활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개구리가 비처럼 내릴 때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죄와 고통을 씻어냈다면, 황제의 불교 숭상을 비판했다가‘論佛骨表’ 죽을 뻔했던 시인에겐 개구리를 먹는 행위가 잘못된 세상에 타협하는 일로 여겨져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이 같은 처지의 벗 유종원을 놀린 배경에는 신념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자신들에 대한 경각심이 자리 잡고 있다. 끝내 황제의 용서를 받지 못할지라도 개구리 먹는 일 같은 현실 타협은 하고 싶지 않다는 소신일까.
영화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우화처럼 펼쳐냈듯, 시도 유머러스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어두운 면을 암시한 희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출처 및 참고문헌: < 동아일보 2023년 05월 25일(목)|문화 [漢詩를 영화로 읊다〈59〉개구리가 맛있다고?(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Daum · Naver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