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봄이었다.
취업 준비생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명동 골목의 작은 다방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이력서를 앞에 두고도 정작 나누는 대화는 어제 읽은 책, 언젠가 함께 가보고 싶은 바다 같은
것들이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밤에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웃을 수 있어 견딜 만했다.
만난 지 백 일이 되던 날, 그녀는 예쁘게 포장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오래 쓰는 물건 하나쯤은 있어야 해."
만년필이었다. 그 만년필로 우리는 자기소개서 문장을 고쳐 써 주고, 면접을 앞둔 서로에게 짧은
응원의 말을 남겼다. 그런 좋은 시간은 오래도록 계속될 줄 알았다.
각자 취업을 하고 자리를 잡아가면서 만나는 횟수는 줄었다. 보고 싶은 마음보다 바쁘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어느 봄날, 늘 만나던 그 다방에서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의무적으로 만나는 것 같지 않아?"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건 '나도 마찬가지'란 생각이었다.
우리는 오래 말이 없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세월은 빨랐다.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몇 번 했다. 첫사랑은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랍 맨 뒤에서 오래된 만년필이 굴러 나왔다.
잉크 냄새가 밴 만년필을 쥐자,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 감촉이 명동의 봄바람처럼 되살아났다.
그날 밤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 뒤, 낯선 골목에서 '이별보관소'라는 작은 간판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문을 열자 벽을
가득 메운 작은 보관함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여기, 처음이신가요?" 그 말투에 실린 묘한 무게를 무시한 채, 나는 만년필을 꺼내 보였다.
직원은 마치 자기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물건을 받아 들었다.
"그 물건에 묶여 있는 시간을 맡겨 두시는 거예요. 아프지 않게 해드릴게요. 대신 그 계절은
그 자리에서 멈춥니다. 당신의 가장 풋풋했던 시절도, 그 시절 당신의 마음도 그곳에 박제되죠."
"흐르지도, 옅어지지도 않아요.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오시는 날,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돌려받으시게
될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만년필을 보관함에 넣었다. 찰칵.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이상하리 만큼 크게 들렸다.
그 뒤로 몇 달은 신기하게도 편안했다. 비가 와도, 커피 향을 맡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날,
궁금한 마음에 그곳을 찾았다.
줄지어선 보관함사이를 지나다 한 보관함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31년째 보관 중. 매달 첫째 주 금요일, 잠시 손잡이만 만지고 돌아감.'이라고 써있었다.
문 앞에는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열지는 않았다. 직원이 나직이 속삭였다.
"문을 여는 순간, 멈춰 있던 마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요. 멈춘 그대로 전부 다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으신 거예요. 하지만 저 안에 그대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거죠."
그의 말은 묘하게 내 마음을 찔렀다. 돌아 나오는 길, 복도 가장 안쪽에서 나는 또 한 번 걸음을
멈췄다.
'17년째 보관 중'이라 적힌 명패 앞에는, 손님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직원이
서 있었다. 그 역시 문을 열지 않았다. 그저 옅게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섰다.
나는 깨달았다. 그 자리에 앉아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인과, 17년 동안 자신의 마음도
열지 못한 채 타인의 이별을 지키는 직원. 나 또한 그들처럼 '안전한 정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 보관소를 찾았다. 보관함을 열고
만년필을 쥐자. 직원의 말대로 멈춰 있던 스물일곱의 봄이 숨 막힐 만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나가는 길, 직원이 짧게 배웅했다. "잘 챙겨 가세요. 여기, 뭘 두고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오시분이 많더라고요."
집으로 돌아와 만년필을 닦고 새 잉크를 넣었다. 빈 종이를 펼치고 한참을 망설이다 한 줄을 적었다.
"잘 지내길 바란다."
펜 끝에서 잉크가 번지는 소리가 멈춰 있던 내 시간의 톱니바퀴를 다시 돌리는 것처럼 들렸다.
보내지 않을 편지였다.
그 한 줄은 그녀에게 보내는 인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멈춰 있던 내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한 문장이었다.
나는 그 문을 열고 나왔다. 하지만 안다. 아직 그 안에서, 손잡이만 만지고 돌아서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오늘의 팝송> Tonight / Elton John
Elton John이 부른 Tonight은 1976년 앨범 Blue Moves에 수록된 서정적인 발라드다. 연인 간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소통의 단절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영국가수 Elton John은 1947년생으로 Your Song, Rocket Man, Candle in the Wind,Goodbye Yellow Brick Road,
Daniel등의 히트곡이 있다.https://youtu.be/yQ5o9N2qojw
첫댓글
"잘 지내길 바란다."
그녀게게 보내졌다면...
이 쓸모없어진 이 할매도 저런 편지 한번 받으면
얼마나 즐거울까? 생각해 봅니다.
대부분 보관된 상태로 기억 나지만
다시 열어보고 싶진 않네요.
감당이 안 돼거나 겁 나서가 아니라
여전히 새 인연을 맞아야 하니까요.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글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