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사건을 떠올리는 것은 돌아가는 시국이 당시와 너무도 흡사하게 변해가고 있고 그때
내가 구입한 서적중 [1984] 라는 책이 있었는데 저자는 조지오웰 이었다.
아름회라는 사건의 발단과 고문 조작사건 등을 통한 전개과정 그리고 5공의 권력에 대한 집착 등을 생각 할 수 있는데 이 사건에는 내 가족이 깊숙이 개입되어 항상 가슴이 찡하고 무거울 따름이다.
국가권력의 오만함과 이에 숙수무책으로 국가에 의하여 사상과 생각 행동을 통제받는 시대의 예언서 같은
소설인데 국가를 통제하고 권력을 통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빅 브라더스” 였다.
한국정세와 비교하자면 MB 가 빅브라더스 같은 존제라고 표현해도 많은 무리는 아닐 듯 하다.
미네르바를 구속하는 정권을 보노라면 소설책 1984를 보는듯해 이 정권의 말로와 진로를 예감할 수있다.
이 책을 읽노라면 약 100여년전에 집필한 내용이 어쩜 그리 현시국에 맞아 떨어지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예언한 아주 유명한 저서였다.
이책을 읽기 전에 엘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 읽었는데 같은 연결하여 생각하면 도움이 될것 같다.
아래의 굵은 글씨는 인터넷의 일부를 옮긴 것이고 다른 글씨체는 내가 적성한 글이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유언비어 유포', '제2의 김대중 내란음모 기도', '전두환 대통령 시해 모의'.
1981년 8월 20일 대전지검은 이러한 3가지 어마어마한 범죄 혐의로 '아람회'라는 반국가단체 멤버 10여명을 구속 기소했다. 이들 중 7명이 1심에서 징역10년-2년을 선고받았다(82.2.11).
그러나 고등법원은 반국가단체 구성 부분을 무죄로 판결해 5명에게 징역6년-1년6월을 선고하고 2명을 집행유예로 석방했다(82.6.19). 하지만 고법의 판결은 대법원에 의해 파기(82.9.28)됐고, 고법은 다시 징역10년-1년6월을 선고해(83.2.16)
대법원에 의해 형이 확정했다(83.6.14). 5번의 재판이 끝난 6개월 후 '반국가단체 구성원 5명'은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83.12.23).정해숙(48ㆍ서울 봉천국교 교사ㆍ이하 81년 당시) 황보윤식(33ㆍ대전공업고등기술학교 교사)
박해전(28ㆍ서울 용문중 교사) 김난수(28ㆍ육군 대위) 김창근(27ㆍ천안경찰서 순경) 이재권(26ㆍ금산 신용금고 직원)
김현칠(27ㆍ대전검찰청 직원) 등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7명이 '아람회'의 회원이 된 사연은 기이하다.
모두 하는 일이 제각각인 이들의 공통점은 충남 금산. 금산 출신의 정해숙씨는 함석헌 장준하씨를 흠모했고 함석헌씨가
설립한 구하고등공민학교 교장과 금산여고 교사를 지냈다. 이후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고향에서 '씨알운동'을 하고 있었다. 황보윤식(皇甫允植ㆍ현 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씨는 과거 금산고등학교에서 역사교사로 교편을 잡을 때
박해전 등 5명의 제자들을 만났고,
이후 이들과 함께 민족과 통일문제, 광주민주화 운동의 실상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81년 5월 17일 당시 정훈장교(국민대 학군단15기)로 충남대 대학원에 수학 중이던
김난수 대위의 집에서 딸 백일잔치가 열렸다.
주범으로 몰려 징역10년을 선고받았던 박해전(현 인터넷신문 참말로 대표)씨의 증언."김 대위 딸의 이름이 '아람'이었다.
금산고교의 교지 이름도 '아람'이었다.
우리가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회합'이 필수적이었고, 사건의 피의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은 그 날의 백일잔치가 유일했다.
결국 '아람이 백일잔치 모임'이 존재하지도 않은 아람회를 결성한 회합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 최초의 공안사건으로 1달 이상의 불법구금 동안 극심한 고문으로 만들어진 아람회 사건의 핵심은 '5ㆍ18 유언비어 유포'와 '제2의 김대중 내란음모 기도'. 박씨의 증언.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 5월 23일 천주교 신자였던 김현칠이 2장의 유인물을 가져왔다.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가 만든 '전두환 광주 살육 작전'과 천주교사제단이 만든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었다.
언론보도만 접했던 우리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유인물 끝에는 '이 글을 읽은 분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려달라'는 호소가 붙어 있었다. 정해숙 선생이 직접 원지를 긁고 이재권(99년 사망)이 근무하던 신용금고 사무실에서 등사를 했다.
500여장을 만들어 금산 천안 조치원 홍성 대전 등에 있던 고교동창을 중심으로 배포했고, 이 복사물은 서울에까지 퍼졌다. 당국은 유인물의 근원지를 찾아 전국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꼬리를 잡지 못했다.
1년 뒤 황보윤식 선생의 '이상한 발언'이 신고돼 당국이 수사에 들어갔을 당시 검거된 이재권의 집에서 남아있던 이 유인물이 발견됐다."
아람회 사건이 '제2의 김대중 내란음모 기도'로 몰린 것은 정해숙씨와 박해전씨가 이른바 '서울의 봄' 기간에
연금 중인 김대중씨 집을 방문한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박씨의 설명.
"80년 2월13일 저녁 당시 동교동에 드나들던 안모씨의 소개로 정해숙 선생과 함께 김대중씨 집을 방문했다.
이 자리서 우리는 김대중씨로부터 시국상황을 설명 듣고 그에게 기대와 공감을 표하고 나왔다.
그 사실이 1년 반 뒤에 '남아있는 김대중씨 지지세력을 모아 내란을 모의했다'는 범죄의 근거가 된 것이었다.
"딸의 백일잔치를 마련했던 김난수(현재 대전서 개인사업)씨는 현역 대위 신분으로 군법회의에서 징역4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죄목에는 '전두환 대통령 시해 모의'라는 대목이 추가됐다.
황보윤식씨의 설명.
"당시 김 대위는 육본의 군사전문요원 양성 시험에 합격해 군장학금으로 80년 2월 25일부터 충남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사석에서 계엄군의 광주민주화항쟁 폭력적 진압에 대해 울분을 토했고 '전두환 일당을 용서할 수 없다.
진급해서 청와대에 갈 기회가 오면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말들이 '대통령 시해 기도'로 변했고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숨겨놓은 권총을 내놓아라'는 수사관들의 추궁에
그 역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다.
"2003년 11월 27일자 한국일보에 소개된 '아람회' 사건입니다.
아람회 사건을 자세하게 전달한 보도라고 생각돼서 소개 드렸습니다.백일 잔치를 내란 음모와 대통령 시해 모의로 둔갑시켰다니...참...
이 사건은 교사들이 "전두환은 살인마"라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한 고교생이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엮어진' 80년대 초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꼽힌다. 언론 및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 사례임과 동시에 당시 사회를 보여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80년대 초 대표적인 조작사건에 연관된 정치인이 두 명 있습니다.
족적이 뚜렷하게 다르죠.
한 사람은 이상수 노동부 장관입니다.
당시 담당판사였던 이상수 장관은 아람회 사건의 구속영장을 기각합니다.
그리고 법복을 벗어버리죠.
하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은 사정없이 유죄(?)를 선고합니다.
특히 주범으로 몰린 박해전씨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죠.
그렇습니다. 이인제 의원입니다.
이 의원은 1997년 CBS 토론회에 나와 아람회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아람회 사건 관련자들은 수사단계에서부터 문제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방위를 받느라 집에서 출퇴근을 했고 나와 4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은 대전모고등학교 3년 재학 중이었다.
어느날 동생이 “ 형 간첩신고하면 돈이 나오는데 그돈 나오면 나 얼마 줄꺼야?”
내 동생은 약간 학교에서 논다고 하던 참이어서 대전의 고교 깡패들끼리 자주 맞장뜨고 어울려 다녔는 가보더라.
어느날 학교선생이 내 동생을 유심히 지켜보던 바가 있었던지 어느 모임에 참석시켜 당시 용어대로 “불순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동지, 선생, 투쟁 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념교육의 효과를 본 내 동생이 학교담임에게 신고를 했고,
담임은 학생과장, 다시 교장, 순으로 학교에 접수가 되고 급기야 112에 접수가 되었다.
보안부대와 경찰서를 오가며 그들이 보여주는 사진을 보니 함께 교육시켰던 선생들의 얼굴이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어느 고등학생의 신고로 간첩으로 몰려 온갖 고문과 폭행에 간첩으로 조작된 것이다.
그 고등학생이 바로 내 동생인데....
당시 작고하신 부친은 신고 후 몇일만에 입을 열었는데
“ 공연히 신고해서 여러사람 간첩으로 몰려 죽게 되는구나” 라며 내 동생을 나무랬다.
그때 관련자들과 함께 자리하며 “교육“을 받았던 동생의 친구는 신고를 하지 않아 ” 불고지죄“
즉 괘씸죄에 해당하여 지금까지 취직을 하지 못하고 궁핌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다.
연좌죄가 없다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그렇더라.
아니면 말고.
고교3년 겨울 어느날 체육선생이 리어커로 학교화단을 정리하는 노역을 학생들에게 시켰는데 선생이
교육적인 차원을 떠나 애들을 삽으로 툭툭 치며 약을 올리면서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었는가 보다.
열받은 학생 중 하나가 삽자루를 집어들고 체육선생을 두둘겨 팼는데 그로 인하여 교칙에 의거 퇴학감인데 국가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자퇴라는 수순을 밟았다.
당시 선생을 팬다는 것 자체가 패륜이고 사악한 행동이거늘 이넘의 자식 유전자 역시 제 향과 비슷한가보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학생과를 찾아가니 담당선생이 우리를 교련이라는 과목으로 가르쳤던 김무운 선생이었다.
그 선생 왈 “어찌 형제간에 꼭 같냐?”
자퇴 후 건들거리고 놀다가 싸움판에서 어느놈을 두둘겨 팼는데 다름 아닌 재수없게도 경찰놈 아들을 팬 것이다.
둘둘 말려 허위진단서로 구속이 되어 진잠에 수감되었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안가?
같은 감방안에 신고한 간첩들이 함께 수감된 것이다.[미결수]
놀란 동생은 간첩들에게 철이 없어 그랬다고 사과를 했고, 그들은 내 동생을 용서했고.
그렇게 잊혀지면서 30년이 지났건만 직접 내가 신고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 메스컴에서 간첩조작사건을 떠올리면 그들이 생각나 가슴이 아프고 시린다.
결국 시대가 영웅을 만들고 호걸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들은 모두 한가락 하는 반정부 인사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들을 구속시키지 않고 기각시킨 판사는 법복을 스스로 벗고 물러났으며
또 다른 판사인 “이인제” 판사는 그들을 구속시켜 지금의 정치 반열에 올라 한때 대통령 후보로까지
울랐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