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8 주일설교
본문: 고전 2:1-5
제목: 사람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1.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야 한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절)
16세기 종교개혁의 주역인 루터와 칼빈이 강조하고 핵심으로 삼는 것이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기독교 믿음의 핵심교리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세력이 그렇게 강조한 그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고,
사람의 지혜에서 왔다면, 그 믿음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저 우리는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 받는다고 한다.
그 ‘마음으로 믿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혼 중심에서 믿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믿음은 공염불이요, 바리새인의 믿음이요 사두개인의 믿음일 뿐이다.
물과 성령으로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난 믿음이어야 한다.
교회에서 6개월이면 학습 주고 6개월 지나면 세례 주는 것,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 받느냐?
사람의 뜻과 사람의 지혜로 양산하는 헛된 구원이요, 믿음일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그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니고, 인간의 지혜의 산물이요 허황된 믿음일 뿐이다.
우리는 개신교 5백년 동안 그렇게 믿고 안심하고 있다. 깨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오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또는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이 변화는 “영적인 변화”이다.
이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 내부에서 발생되는
영적 변화’이다. 이것은 내적이며 영적인 혁명을 뜻한다. 지성을 비춰주고 양심을 각성시키며,
그 의지를 복종케 하고 그 감정을 정련하고 정화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으심’을 받게 하는 지성과 마음의 온전한 변화를 뜻한다.
이 변화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곧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된 것이다.
엄청나게 위대하고, 영적이며 완전히 전인적인 변화가 거듭남이요 회심이다.」(제임스 뷰캐넌)
이러한 변화가 내적으로 없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이고,
사람의 지혜에 따라서 거짓으로 유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이다.
5백년 개신교는 이런 영적인 변화를 절대로 가르치지 않고, 쉽게 세례 주고, 구원의 확신 주고, 전도 전도 하면서, 배나 지옥 자식들을 양산하는 데 급급하여 왔다.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이들의 말만 믿고 죽은 영혼들은 지옥문 앞에 가서야 소스라치게 놀라 기절할 것이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2)
하나님의 능력과 사람의 지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고 전혀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도 사람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고 다른 것과 같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하나님의 능력은 없고 오직 사람의 지혜로만 전하고 받은 믿음은 땅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알게 하지 아니한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낳고 사람의 지혜가 알게 한 믿음일 뿐이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1-13)
믿음은 생각의 결정이 아니고, 그 이름을 믿고 그분을 마음 중심에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믿음을 가진 자이다.
몇 대째 믿는 믿음,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난 것, 다 혈통으로 난 믿음일 뿐이다.
육정은 사람이 감정과 의지로 결단하는 믿음이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더라도 그것은 사람의 뜻으로 난 자이고 믿음일 뿐이다.
우리 주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 것’도 하나님이 알게 하셔야 한다.
신학 지식으로 교리로 아무리 알아봐야 그것은 먹으로 머리 돌판에 쓴 것일 뿐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2. 사람의 지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2:1)
개신교 5백년 동안 교회는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무엇으로 하였는지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였느냐?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였느냐?
영으로 마음판에 썼느냐? 먹으로 돌판에 썼느냐?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느냐?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였느냐?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셨다.
초대교회의 실상과 발도인 교회의 역사를 보면서 내가 깊이 깨닫고 충격을 받은 것은
로마교회도 개혁교회도 현대교회도 유대교회를 본받아서 그 누룩을 재현하여 왔다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사람의 지혜(스콜라 신학)로 교리조문들을 만들었고, 철학조문들을 만들었다.
개혁교회도 사람의 지혜로 바리새인 누룩인 신조와 교리조문들을 만들었다.
현대교회도 교리를 싫어하며 사람의 지혜로 사두개인의 누룩인 철학조문들을 만들었다.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는 교리조문도 철학조문도 만들지 않았다.
성경을, 특히 주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믿고 실천하였다.
영적인 변화가 없으면 결코 세례 주지 않았고 성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3년 정도의 가르침과 삶의 모본을 통해 변화가 없으면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전도니 선교니 하는 것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된 심령과 목숨 바치는 믿음과 삶의 실천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감동을 받게 하였고, 그 매력에 끌리어 교회로 사람들이 오게 만들었다.
그들은 빛과 소금의 제자들이 되었고, 전 유럽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이 13세기의 폭발적인 교회개혁이었고 14세기 15세기의 르네상스를 낳았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바탕 위에서 인쇄술의 발달로 교리책들만을 양산하고 보급하였다.
발도인들이 세운 교회 지역과 교리책들이 팔린 지역이 그대로 일치한다고 한다.
개혁교회와 현대교회가 맺은 열매와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가 맺은 열매는 너무도 다르다.
왜 이렇게 다르냐?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회는 그 열매를 보고 알라고 하셨다.
사람의 지혜로 맺은 열매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맺은 열매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못된 나무이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찍혀 불에 던져질 운명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5-20)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한다고 하였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혼잡하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가르치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
그것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힌 것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 스승은 많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써 생명을 낳는 사람이 아버지 스승이다.
일만 스승은 그리스도 안에서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생명을 낳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되, 자기들의 옳은 것을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그 이유로 인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현대판 ‘나라의 본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목사들이 거짓을 설교하고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교인들은 그것을 좋게 여긴다.
하나님은 이를 무섭고 놀라운 일이라고 하신다. 너희가 마지막에는 어찌 하려느냐 하신다.
유대교회가 로마 교회가 그러했고, 개혁교회도 현대교회도 마찬가지로 그러하였다.
여러분, 초대교회의 실상과 발도인 참 교회 역사에 대해서 더 늦기 전에 눈을 뜨기 바란다.
이제까지 교회와 교단들은 로마교회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면서 이들을 이단으로 몰고 있다.
초대교회의 실상에 대해서 어느 교회사도 제대로 쓴 책이 하나도 없다.
그저 교리의 역사로 읊조릴 뿐, 그 실상은 전혀 다른 곳에서 캐내서 알려주고 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놀라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들이 평강하다 평강하다 해도 평강이 없다. 천국에 간다 해도 지옥에 갈 뿐이다.
3.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한다. 영 줄기와 뿌리가 전혀 다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
영적인 것과 영적인 일은 오직 성령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의 지혜와 전통을 좋아하여,
바리새인처럼 성경을 율법화하고 교리화하고 지식화 하는 것에 빠진다.
사두개인처럼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학에 빠지고 상담학과 철학에 빠진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받아야 한다.
말씀을 사람의 지혜로 혼잡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전하고 받는 것이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바로 이 작정 유무에 따라 분별되고 드러난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이다.
초대교회로, 발도인 참 교회로, 속히 돌아가야 한다. 거짓 교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우리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