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申琦澈(1922~2003)】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으로 항일의식 고양"
922년 1월 24일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신북면(新北面) 용산리(龍山里)에서 사법서사(司法書士)인 아버지 신구현(申九鉉)과 어머니 이승자 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송산(松山)이다.
1934년 4월 춘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36년 3학년 무렵부터 맏형 신수철(申瀭澈)로부터 민족주의 영향을 받았고, 셋째 형 신영철(申瑛澈)로부터 민족주의 관련 서적을 접하면서 민족주의와 독립 사상을 품게 되었다. 신수철은 1935년 연초에 보낸 연하장의 내용에 “조선아 일어나라. 화살을 날리어라. 조선혼 잠긴 그 살, 돌인들 두려우랴. 시위를 당겨 쏴라. 동방을 향하여!”라는 글귀가 담겨 있다는 이유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 한국 민족이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일왕(日王)이 있는 곳을 향해 쏘라는 뜻으로 풀이된 것이다.
1938년 2월 춘천고등보통학교 이연호(李淵湖)의 권유에 동급생 최상기(崔相基)·박태주(朴泰株) 등 3명과 함께 상록회(常綠會)에 가입하였다. 상록회는 1937년 3월에 결성한 항일조직으로, 선배들이 졸업 후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후배들이 그 해 9월 다시 결성한 것이다. 1938년 2월 25일 새롭게 상록회의 부서를 정하였는데 서적계의 일을 맡아 신입회원을 가입시켰다. 그 후 회원들의 탈퇴가 이어졌고 신입 회원들로 그 자리가 메워지곤 하였다. 1938년 6월 상순 회원 최상기·박태주·전인목(全寅穆) 등과 모여 일본 수학여행의 감상 담화회를 열고 당시 한국인의 무자각(無自覺)을 설명하면서 민족의식을 앙양시켰다. 또한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일제의 한글 폐지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고 일본어는 학문으로서는 배울 필요가 있지만, 회원들 간에는 한글을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10월 상순 간부진을 개편할 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상록회의 주요 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개최와 귀농운동 등을 전개하였는데 주로 독서활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봉채(李鳳采) 등과 함께 졸업한 선배회원 신영철·이홍래(李鴻來)·박우홍(朴禹弘) 등과 우두산(牛頭山)·봉의산(鳳儀山) 등지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토론과 강좌를 열기도 하였다.
1938년 말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붙잡혔다. 1년 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해방 이후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내다가 1950년대 초 교단에서 물러난 뒤로는 국어사전과 한국문화사전 편찬에 몰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