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크리스마스이브.
어릴 적에 내가 다니던 시골 장로교회는 교인이 4-50명쯤 됬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저녁부터 모여 찬송 부르고 선물 교환하고 자정에 떡국 먹고 새벽에 집집 마다 다니며 크리스마스 캐롤을 불렀다. 선물 교환은 각자 선물을 가져와 제비 뽑기를 해 가져갔다. 고등학생인 나는 내 선물이 내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뽑아 가져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카드에 서툰 순정을 적어 두근거리며 제비뽑기를 기다렸으나 매년 내 선물은 마음에도 없는 다른 여학생에게 뽑혀 그 여학생이 미소를 지으며 내 주변을 서성거리곤 했었다. 아이고 보고 싶어라. 그 소녀들!
새벽에 시골집들을 다니며 찬송을 부르면 교인들은 과자 같은 먹을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다 주셨다. 나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자루를 매고 다니다 그 집 어린아이들이 나오면 자루 속에 있는 선물을 나누어 주곤했다. 돌아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에는 개들도 성탄을 축하하는듯 기뻐하며 따라다녀 나는 개들에게도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하고 목사님에게 개들도 천국에 가나요 라고 물었다가 야단 맞았던 기억이 난다.
천국에 개나 고양이가 없다면 하느님도 쓸쓸하실 것이다. 나는 황금 보석이 가득한 왕궁 같은 천국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시냇물이 흐르고 개울가에는 찔레꽃이 피고 아담한 시골집에 순박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쁜 강아지를 키우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그런 천국을 나는 상상한다. 천국에 가서도 늘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만 드린다면 나는 그런 천국은 사양할 것이다.
딸이 크리스마스라고 함께 밥 먹고 영화 보자고 해 서울에 다녀왔다. 사실 요즘은 딸 보다는 손녀가 보고 싶어 서울에 간다. 딸 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나는 손녀 볼 생각에 가슴이 뛴다. 문간에서부터 큰 소리로 ‘하진아 하비 왔어’라고 소리치니 문이 열리자마자 손녀가 달려와 품에 안긴다. ‘하비. 하비, 하비!’
백화점에 가서도 딸과 사위는 무얼 사느라고 둘이서 여기 저기 매장을 다니고 나는 하진이와 놀았다. 아이가 성격이 좋아 만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가 어루만지기도 하고 깔깔대며 웃는다. 나는 이쁜 하진이를 하늘 높이 들었다 놓았다 하고 빙글빙글 돌린다. 하진이는 무서움도 없이 깔깔대며 연신 ‘또’ 그런다. 백화점에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광대가 되었다. 손녀가 무엇인지?
25일
새벽에 일어나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며 이웃사촌 카페에 글 한편 올렸다. 창녀등 죄인들의 친구였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죄 많은 나를 용서하고 친구로 삼아주신 예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다. 나도 예수님처럼 힘들게 사는 이들의 친구로 살고 있는지? 나에게는 창녀 친구 하나 없고 문둥이 친구도 없고 정말 가난한 친구도 하나 없다. 어쩌다 내 주변에는 먹고 살만한 이들만 득실거리는지. 나는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머리 속으로만 예수를 믿고 산다. 이런 놈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기가막힐 노릇이다.
외포리의 티파니라는 카페에서 유진박 초청 바이올린 감짝 공연이 있다고 해 십여명의 친구들을 초청해 함께 참여했다. 번개 모임이었는데 백여분이 오셨고 유진박의 연주가 환상적이었다. 천재의 연주를 직접 현장에서 들으며 사진도 찍고 흥에 겨워 함성도 지르고 몸도 흔들고 나니 땀이 흥건하다. 조금 과장하면 내 생애에 이런 환상적인 공연은 처음이다.
공연 끝나고 길선생님, 조광호 신부님, 김신형님 부부, 배오식님 부부, 박진화님 부부, 김기훈님 부부, 강복희, 이종남, 송병란님등과 함께 그곳가에서 한잔 하며 뒷풀이 하고 그것도 모자라 몇분은 심도학사에 가서 포도주 마시며 밤 늦도록 정담을 나누었다. 이런 공연을 무료로 준비해주시고 우리에게 식사까지 대접해 주신 이명숙 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오늘 유진박은 심리적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연주는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우울증에 대해 심도있는 얘기를 했다. 샤이니 종현의 유서 얘기도 하고 몇분은 자신의 아픔도 직접 얘기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이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날 미워했다.--난 오롯이 혼자였다--난 도망치고 싶었다. 나에게서, 너에게서. 난 나 때문에 아프다. 전부 다 내 탓이고 내가 못나서다---살아있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고 나보다 약한 사람은 없다—무슨 말을 더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고생했다고 해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안녕’.
이렇게 외롭고 아픈 사람 곁에 정말 그를 이해하고 안아줄 사람 하나 없었는가?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무정한 나는 가슴이 아프다.
26일
아침부터 종일 계룡돈대 해변과 장구너머항에 가서 한국의 명수필과 한국단편소설집을 읽었다. 책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바다나 섬들을 보고 찬바람 맞으며 걷는 기쁨이 크다. 혼자라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 없다. 누구 눈치를 보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남이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빠지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만나는 모든 이들의 정서적 하인이 되었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화낼 줄 알고 나도 기분나빠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사람 앞에서면 나는 털 깎이고 있는 순한 양처럼 얌전하다. 나는 진작 거세되었다. 野性(야성-들사람 얼)이 사라진지 오래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내시다.
첫댓글 홍 선생님..멋진 성탄절을 보내셨네요. 티파니에서 그런 공연이 있었군요. 상상만 해도 멋진 시간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저는 지난 성탄절..2박3일..시골 고향 마을을 다녀오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유유자적..유년의 추억을 반추했던 시간..너무 행복했지요. 우울증, 그리고 자살..우리가 해야 할 사역이 참 많은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