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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6주)
에카-에무나테카
애가3:22~25; 고후8:7~9; 막5:21~43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은 예례미야 애가입니다. 예례미야 애가는 구약의 여러 시편 중에서도 가장 절절하게 인간 고통의 심연을 노래한 시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주전6세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슬퍼한 시편이지만, 시의 내용을 보면 단지 성전 파괴에만 해당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절망과 탄식을 노래한 시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파괴란, 사실은 자신들의 근본이 무너져 내린, 파멸해버린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시는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과도 깊이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디 이 시의 제목은 예레미야 애가가 아니었고, 그냥 <에카>(아, 슬프다!)였습니다. <에카>는 애가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는 인간의 탄원과 부르짖음이 수없이 울리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절정은 바로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그런데 5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편의 한 복판에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19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내가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가면, 오히려<알-켄> 기다림/희망이 있다. 주님의 선함/신실함<헷세드>으로 우리가 아직 끝장나지 않았고, 그분의 자비<라하밈>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당신의 신실(<에무나/에무나테카>견실함, 확고하게 붙잡아 주는 힘)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나의 분깃), 주님은 나의 희망(내가 그분을 기다린다)!’”
이 구절은 마치 모든 것이 멸망해버린 시커먼 폐허에서 속에서 푸른 새싹 하나가 빠끔히 올라오는 것만 같은, 그런 구절입니다. 애가의 거의 대부분이 슬픔과 절망과 탄식으로 가득차 있는데, 애가의 가장 중심 3장의 이 자리에 이런 구절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우리도 이런 저런 큰일 작은 일로 이렇게 저렇게 난타를 당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도 슬픔과 탄식, 아픔이 크게 자리합니다. 큰 변고를 맞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하루 중에 이런 저런 모습으로 잔 펀치를 맞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남이 날리는 잽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도 자신을 향해 자주 잽을 날립니다. 어떤 때는 그런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게 당하고, 내가 했는지도 모르게 그런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잔 펀치가 무서운 법이라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뭔지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녹초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는 일 자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잔 펀치를 많이 맞은 날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고 일어나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한 다음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상이 되어 만성피로와 깊은 낭패감으로, 또 우울감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맞는 잔 펀치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우리 안, 시커먼 폐허 속에서도 올라오는 새싹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고 그것을 내 삶의 중심에 놓는 일입니다.
오늘 애가의 말씀 중에 이 말씀을 기억하고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내가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가면, 오히려<알-켄> 기다림/희망이 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주님의 선함/신실함<헷세드>으로 우리가 아직 끝장나지 않았고, 그분의 자비<라하밈>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당신의 신실(<에무나테카>견실함, 확고하게 붙잡아 주는 힘)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나의 분깃), 주님은 나의 희망(내가 그분을 기다린다)!’”
여러분 안에 이 “중심”,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밖은 폐허가 된 것처럼 엉망진창이 된 것 같고, 수많은 상처와 멍으로 끝장난 것 같다 하더라도,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가면, 거기엔 기다림/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끝장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님의 <헤세드>가 있고, 그분의 <라하밈>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헤세드>와 <라하밈>이 아침마다 새롭고, 당신의 <에무나/에무나테카>가 큽니다. 주님은 나의 분깃, 주님은 나의 희망!”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이런 신뢰와 희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삶에 대한 신뢰와 희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나를 보게 되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둘이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진정으로 깊이에서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생긴 작은 힘으로 우리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은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 에티 힐레숨이라는 유대인 여자가 쓴 일기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불안과 공포, 증오와 절망에 압도당하던 ‘신 없는 세상’ 한복판을 지나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과 세상을, “희망 가운데서” 다시 보게 됩니다.
“... 슬픔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이 짓누르는 것 같을 때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매우 강하고, 틀림없이 슬픔은 우리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슬픔으로부터 도망가면 안 되고 어른스럽게 슬픔을 견뎌야 한다. 증오를 통해 슬픔을 줄이려 하지 말고, 모든 독일 어머니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지도 마라. 그들도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살해당해서 슬픔을 겪는 어머니일 뿐이다. 우리 안에 슬픔을 담기에 마땅한 공간과 안식처를 마련하라. 모든 사람이 슬픔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견디면, 세상을 가득 채운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반면에 슬픔이 있을 수 있는 적절한 안식처를 준비하지 않고 내면의 대부분을 증오와 복수할 생각으로 채우면, 거기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슬픔이 생겨날 것이고, 이 세상에 슬픔이 결코 그치기는커녕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 안에 슬픔을 담기에 마땅한 공간과 안식처를 마련하라” 슬픔이 머물 수 있는 마땅한 안식처! 그것은 슬픔이 머무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슬픔이 관용으로, 자비로, 연민으로, 용서로, 수용과 감사로 바뀌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마치 흔하고 가치 없는 물질이 귀하고 가치 있는 물질로 바뀌는 연금술의 용기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슬픔을 위한 적절한 안식처를 마련하지 않으면, 그 슬픔은 자신과 남을 찌르는 날카로운 무기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오늘 애가의 시인은 슬픔 한 복판에서도 “슬픔을 담기에 마땅한 공간과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애가의 시인에게 그 공간과 안식처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가” “그분의 <헤세드>”, “그분의 <라하밈>”, “당신의 <에무나>(에무나테카)”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희망을 지닌 기다림”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거처로 인해 <에카>가 <에무나테카>로, 오늘 우리 시편에서도 노래한 대로, “통곡이 기쁨의 춤으로, 슬픔의 상복이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이런 공간과 안식처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슬픔이 “당신의 신실함/견고함”으로, 고통이 기쁨으로 춤으로 바뀌는 자리 말입니다. 그것은 슬픔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 하며, 그러면 그 공간과 안식처는 마침내 그분의 헤세드, 그분의 라하밈, 주님의 견고하게 잡아주시는 힘<에무나테카>으로 인해 슬픔이 자비와 연민(사랑과 긍휼)으로 변용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슬픔이, 미움이, 질투가, 분노가, 상처와 아픔이 여러분 안에 있는 공간과 안식처에 머물 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공간과 안식처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슬픔을, 미움을, 질투를, 분노를, 상처와 아픔을,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수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시 말해, 무시하고 마음속에 묻은 채 내버려두고 곪게 하고 응답하지 않으면, 슬픔과 미움과 질투와 분노와 상처와 아픔은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것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파괴하거나 인격을 왜곡하는 흉악한 힘을 발휘하여 비통함과 증오를 부채질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공간과 안식처가 있어서 이런 것들을 담을 수 있다면, 슬픔과 미움과 분노와 상처는 오히려 연금술의 신비를 드러낼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구별하십시오. 슬픔을 담기에 마땅한 공간과 거처를 마련하라는 것은 슬픔과 미움과 분노와 상처 속에 매몰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무시하고 마음속에 묻어둔 채 내버려둬서 곪게 하고 마땅한 응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폐허 속에 솟아난 여린 새싹처럼 여러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여린 자비와 연민, 용서와 수용으로 슬픔과 미움과 분노와 상처를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상처를 입었을 때 자신의 혀으로 상처를 핥아주듯이, 여러분 자신들이 여러분의 상처를 핥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비와 연민, 용서와 수용은 점점 그분의 <헤세드>, 그분의 <라하밈>, 당신의 <에무나>(에무나테카)가 되어, 여러분이 여러분을 보는 눈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는 눈으로 바뀔 것입니다. 만일 스스로 핥아주는 일이 어렵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더욱 구하십시오. 많이 울고 많이 아파하십시오. 단, 그 슬픔과 아픔을 자신과 다른 이들을 치는데 사용하지 말고, 그냥 울고 그냥 아파하십시오.
이런 일을 위해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늘 마가복음의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걸린 여인처럼, 절박함/간절함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뵙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발아래에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면서 “무리 가운데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두 사람의 절박함이 보이시나요? 당시 회당장은 도시의 회당을 책임지는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무리 백성들의 호응이 있었더라도 떠돌이 설교자에 불과한 젊은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그 발 아래 엎드려 청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절박함이 없으면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열 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 여성의 하혈은 율법 관례 상 부정한 경우로 적시되어 있던 때에, 그런 몸으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는 것”은 사실 당시의 관례에서 보면 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절박함으로 인해 그 일을 감행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고치려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혈루증 여인은 일종의 새치기를 한 셈이 되었고, 그로 인해 야이로의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런 간절함으로 인해,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간절함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새싹을 발견하는 원천이고, 슬픔을 담을 마땅한 공간과 안식처를 마련하는 원천입니다. 간절한 마음은 우리를 깨우고 예수님을 깨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라고 하신 그 삶을 살아내려는 간절함, 지금까지 살아왔던 지긋지긋한 삶을 끝장내고 싶다는 간절함,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그런 혈루증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엿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오늘 애가 3장 31~33절을 읽으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두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