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가는 길에 보이는 월출산무위사로 가는 길 왼쪽으로는 월출산의 동남쪽 능선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막상 무위사 안으로 들어서면 낮은 능선들이 절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여기서 부터 기록사진을 등재시켰습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자연스러운 계단으로 조금씩 높아진 절 안 정면에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 보인다. 한 점의 허세나 치장,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그 모습은 무위사(無爲寺),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는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절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서쪽에 선각대사 부도비(보물 제507호)가 있고, 그밖에 무위사 안에는 명부전, 미륵전과 산신각, 천불전, 삼층석탑이 하나, 마당 건너 입구 쪽에 벽화보존각 그리고 소박한 요사채가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선각대사 부도비와 삼층석탑이 고려 시대 것이고 극락보전이 조선 초기의 건물이며, 나머지는 대개 근래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위사는 깊은 감명을 준다. 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담담하고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을 어느 곳보다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절 이름을 관음사라고 했고 그후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갈옥사(葛屋寺)로 바꿨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대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명,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비로소 절 이름을 무위사로 고쳤다는 내용이 『무위사 사적기』에 나온다. 이 사적기는 영조 15년(1739)에 당시 주지였던 극잠이 절을 보수하면서 쓴 것인데, 당시까지 전해 오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우선 진평왕 39년에는 이 부근이 백제의 영토였고 또 원효는 바로 그해에 겨우 태어났을 뿐이었다. 도선국사가 중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효공왕 9년(905)부터 선각대사가 주석했다는 것으로 보아 도선의 중창설도 의문시되고 있다. 도선국사는 동리산문에 속하며 선각대사는 가지산문에 속하는데, 사찰의 소속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바뀌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또 정종 원년은 선각대사 부도비가 세워진 해이고 선각대사가 죽은 지 이미 28년이 지난 때이므로 그 해에 그가 절을 중창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절 이름에 대해서도, 지금 절 안에 있는 선각대사 부도비의 제목에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적혀 있고 비문 속에도 신라 효공왕 9년(905)에 왕건이 선각대사를 무위갑사에 머물도록 청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그 이전부터 계속 무위사로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무위사는 무위갑사라는 이름으로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신라 말에 왕건과 가까웠던 선각대사가 머물던 기간에 사세를 키웠다. 조선 시대 들어와 태종 7년(1407)에는 각지의 명찰을 골라 여러 고을의 자복(資福) 사찰로 지정하는 가운데 천태종 자복사의 하나로 꼽혔다. 이전에 선종 사찰이었던 무위사가 어느 때부터인가 천태종 절이 된 데는 고려 후기에 백련사에서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히 활동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한다.
세종 12년(1430)에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극락전이 지어지고 성종 7년(1476)에 극락전 안에 아미타삼존도, 아미타여래내영도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는 당시 무위사가 수륙사(水陸寺)로 지정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서는 죽어서 제 갈 길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을 불력으로 거두는 수륙재를 자주 지냈을 것이고, 아미타불은 서방정토를 주관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극락보전 앞 좌우에 벌여 선 괘불 걸이는 수륙재 야단법석(野壇法席)을 펼 때 괘불을 걸었던 자취이리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화를 입지 않아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한 도에서 으뜸이었다던 무위사는 그후 점차 퇴락하여, 앞의 사적기가 씌어진 영조 15년(1739)에 이르면 미타전(지금의 극락보전)·천불전·시왕전만이 남았다. 일제 시대에 극락전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 내어 벽화보존각에 따로 모신 것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벽화보존각 안에는 아미타불이 8여래와 8보살을 이끌고 죽은 사람을 맞으러 나오는 광경을 그린 아미타여래내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휙휙 그려 낸 너울과 옷자락이 멋있는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의 비천선인도 등 모두 30점이 유리장 안에 보존되어 있다. 모두 고려 불화의 전통을 보이는 그림들이며 극락보전 안에 있는 아미타삼존도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다만, 보존각을 보관고라고 불러야 되지 않을까 할 만큼 내부가 몹시 옹색하고 어둠침침해서 그림들을 잘 볼 수 없어 아쉽다.
극락보전에서 북서쪽으로 비켜 선 미륵전에는 아줌마 머리를 한 석불이 모셔져 있다. 인근의 수양리 수암마을에 버려져 있던 것을 어느 독지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입술이 두껍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뜨렸는데 왼쪽 어깨가 움츠린 듯 좁다. 무릎 아랫부분은 마루 밑으로 들어가 있어서 보이지 않고, 목의 삼도나 옷주름 등 모든 표현이 형식적이다.
검박하고 단정한 건물이다. 이 집에서 풍겨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절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다. 고려 시대 건물인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많이 닮은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 집인데, 1983년에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명문에 따르면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당시 극락전 건립 공사는 나라의 인정을 받은 고급 기술자들이 참여한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루어졌고 효령대군이 공사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비탈진 지세를 따라 앞쪽에만 얕은 축대를 쌓은 기단 위에 아무 조각도 없는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 기둥을 세워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이다. 정면의 가운데 칸이 양옆 칸보다 오히려 조금 좁은 것이 특징이다. 또 전체적으로 보아 기둥 높이에 비해 기둥 사이 간격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조선 중기부터는 다포계 집이 주류를 이루므로 이 집은 사실상 주심포 집의 전형적인 규범을 유지한 완성기의 건물로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주심포계 건물의 특징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구조체계가 한결 간결해졌다. 기둥과 들보들이 드러나 보이는 옆모습은 꼭 필요한 부재만이 사용된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건물의 면모를 눈으로 실감하게 한다. 나뭇결이 드러난 소슬빗살문 또한 소박하면서 단정하고, 부드럽게 처져 내려온 지붕마루가 건물에 온기를 준다.
지금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그 뒤편 벽에 역시 아미타삼존도가 있으며, 부처 등뒤로 돌아가서 뒷벽에 수월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부처상이자 그림이다. 원래는 법당 안 벽마다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위의 두 그림을 뺀 나머지는 대부분 벽째로 뜯어 내어 1974년에 지은 벽화보존각으로 옮겨졌고, 동쪽 벽에 있던 석가여래설법도와 서쪽 벽의 아미타여래내영도도 1979년에 마저 보존각으로 옮겨졌다. 지금 법당 안에 있는 설법도와 내영도는 원래의 그림을 본떠서 그린 것이다.
아미타여래내영도벽화 보존각 안에는 극락보전에서 떼어 낸 조선 초기의 벽화들이 보존되어 있다. 아미타여래내영도를 비롯해 석가여래설법도, 해수관음좌상도 등 모두 30여 점이나 있다.
이 법당 마루 아래에는 전돌이 깔려 있다. 1983년에 해체작업을 하면서 전돌을 걷어 냈더니 기둥이나 벽화에 습기가 잔뜩 차서 부랴부랴 다시 깔았다는 일화는 옛사람들의 집 짓는 지혜가 뛰어났음을 다시 한 번 말해 준다. 이 건물은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호회 회원이 무위사에서 몰카로 찍어 보내준 사진 입니다.
※무위사에 대한 더 알고싶으시면 이리로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8161&cid=42840&categoryId=42849
첫댓글 초지형님이 이번에 소개하는 무위사 역시 신라때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라니 천년고찰 이로군요.
불교 전성기에 세워졌으니 그 크기와 웅장함이 대단했을것 같았다는 느낌이 옵니다.
아름답고 사적 가치가 훌륭한 무위사 가을사진을 올려주신 초지형님꺼 감사해야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용~~^0^
잘 알려진 사찰은 아니지만
고려 태조 왕건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있네.
왕건의 둘째 왕비가 월출산 인근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적도 있지만, 나주골 귀족의 딸이 아니였나 싶네.
@草 地:문영식,7 전국 이곳저곳 호족들과 정략결혼 일삼아서 많은 마눌님 거느렸던 고려 태조 왕건께서 나주 호족 따님도 취하셨었나 봅니다.ㅎㅎ
무엇고다 청명한 가을하늘과 화려한 단청이 어우러진 초지형님의 스냅사진이 멋집니다.
나는 그런 사진 몰래 찍어주는 찍사님도 없고~~ㅋㅋㅋ
월출산의 또 다른 모습이군요 종루의 단청과 함께 참선으루 내려앉은 사찰 기와 위로 가을 단풍이 꽤 아름답구요 한 장 한 장 음미하는 영상여행,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
이 곳에 살면서도 경포대가 영암군에 속한줄 알고, 말하는 분들이 많아 영암 경포대 가자고
말할 때가 많은데, 월출산을 기준으로 북쪽 방향은 영암군이고, 남쪽 방향이 강진군으로 되여있네요. 이쪽으로 월출산에 오르면 코스가 바람재, 구정봉, 천황봉 정상으로 가는 등산길이 되여있으며 여름에는 계곡물이 많아 관광객둘이 찾는 곳 중 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