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溪驛(임계역)
어세겸(魚世謙:1430~1500)
본관은 함종(咸從:지금의 평안남도 강서군).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
조선전기에 문신으로 경기도 관찰사, 병조판서, 우참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
학식이 뛰어났으며,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형조판서로 있을 때 출퇴근 시간에 개의하지 않아 ‘오고당상(午鼓堂上)’으로 불리었다.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내외치(內外治)에 많은 업적이 있으며, 1498년 무오사화 때는 사초(史草) 문제로 탄핵을 받아, 좌의정을 물러나면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고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저서로는 『함종세고(咸從世稿)』 ·『서천집(西川集)』 · 『진법(陣法)』 등이 있다.
우연히 시를 지어 서재 창문에 붙였는데
得句偶書窓 득구우서창
종이가 찢어지니 시 또한 찢어졌네
紙破詩亦破 지파시역파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뜻을 헤아리겠지만
好詩人必傳 호시인필전
시를 싫어하는 사람은 필히 침을 뱉으리라
惡詩人必唾 오시인필타
남이 전하든 찢든 무슨 상관하랴마는
人傳破何傷 인전파하상
남이 침을 뱉고 찢어도 나는 개의치 않다네
人唾破亦可 인타파역가
한 번 크게 웃고 말을 타고 돌아가노니
一笑騎馬歸 일소기마귀
천 년 뒤에 누가 나를 알겠는가?
千載誰知我 천재수지아
*
시가 좋아서
내 방식대로 다시 헤아려본다.
함련(頷聯) 1행에 있는 전(傳)의 뜻을 ‘전한다’는 말대신
‘헤아리다’로 풀어봤다.
염화미소(拈花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 같이
마음과 마음으로 흐르는 것이 ‘詩’이기 때문이다.
요즘, 글도 詩도 넘쳐나는 시대가 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글을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언제부턴가 시(詩)가 자기 자랑같이 등급을 매겨가면서
여러 지면을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이 많으면 죽(粥)이 되고
물의 양에 따라 진밥이 되고
된밥이 되고
누룽지도 되고
아예 밥이 되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옛 선비들은
다양한 소재(素材)로 시를 쓸 수 없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형식면에서도 ‘압운(押韻)’과 ‘평측(平仄)’ 법을 따라야 했다.
시의 내용면에서도
자연과 일신(一身)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 외에
그 어떠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자획(字劃)은 물론 한 글자 때문에
목숨은 물론 삼족(三族)이 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시를 읽다 보면
종종 그 시대의 아픔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이 시가 좋은 이유는
그 시대에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색다르게 표현한 시를 찾기란 힘이 든다
타향 객사에서
적적하게 보내는데
문득 시가 찾아왔다
급하게 지필묵을 준비해서
시를 썼다.
혼자 볼 겸
내심, 이 서창(書窓)에 찾아올 다음 사람을 위하여
떡, 하니 시를 창문에 붙였놓았다.
본인의 실수로 종이가 찢어졌는지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말하면 무얼 하랴
종이가 찢어졌으니
시 또한 찢어지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침을 뱉을 것이요
아는 이가 보면 분명 외어서라도
그 시를 가지고 가려고 할 것이다.
화자는 시를 보고
남이야,
찢어버리든, 침을 뱉든
상관하지 않는 초월적인 마음을 가졌다.
어차피 시는 나를 떠나면 내 것이 아니라,
독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한번 크게 웃고서는
말을 타고 가면서
세상에 대한 무심결에 일갈(一喝) 한다
“천 년 뒤에 누가 나를 알겠는가?”
한마디로 상(相)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애써 힘쓰지도,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詩가 좋으면, 사람이 좋으면,
무엇보다 사람 따라
천 년 만 년 남는 게
사람이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