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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근이나 되는가?
고찬순 당호(普化堂, 보화당) 남해교구
경남 남해 고현 도산 출생.
1931년 3월 25일 생
남해 지부회장
천도교 신앙하면서 ‘이렇게 좋은 교회운수를 어떻게 받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삽니다.
천도교를 안 했으면 한글도 몰랐을 것이고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서 얄궂은 말과 행동을 하고 살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정암장(고정훈 종법사)님이 검은 천을 두르고 염주를 돌리면서 사촌오빠 두 분과 방에서 청수 모시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가 태평양전쟁 때였는데, 그 모습이 신기해 무엇이냐고 물으니 사촌오빠가 좋은 공부라고 했습니다. 어린 생각에도 좋은 공부라면 글을 써야 되는데 물을 떠다 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궁금했어요. 고종 오빠가 책을 한권 주시면서 「교훈가」를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경전 초창기 때의 조그만 책이었어요. 한글을 잘 모를 때라 한자 한자 천천히 읽어보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한 사흘 하다가 “좋은 공부라고 했는데 읽어 보니 하나도 재미가 없다”면서 도로 주니 오빠가 웃어요.
그때는 전쟁 중이라 삼엄해서 사촌이라도 서로 도를 권하지 못하고 아는 사람만 몰래 했어요. 우리 정암장님은 효자고 부모님께 지극한 분인데 천도교 신앙만은 몰래 다녔어요. 해방 후에는 교당 나가신다고 나가시더라고요.
전 교당이 뭔지 모르다가 19세 때 설천면 문의리 윤씨 양반집으로 결혼했어요. 여자는 사립문 밖 출입도 못하던 때에요. 한번은 버스를 타고 친정에 가는데 오빠 차림하고 비슷하게 하고 사람들이 가기에 천도교 가는 것 같아서 무조건 따라 내렸어요. 교당에 들어가니 당시 사오십 대 되신 돈암장님 사모님께서 민망하게 절을 하며 반가워해요. 그때 나는 이제 애기 낳은 새댁인데요. 뒤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친정에 갔어요. 그런 적이 서너 번 있었는데 어쩌다가 시아버님 귀에 들어갔어요. 저녁 먹고 저보고 앉으라더니 “우리 집안에는 ‘교’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교에 발을 담그려면 절대 우리 집 식구가 될 수가 없다”고 엄하게 하셔요. ‘이제 틀렸구나’ 생각했어요. 교인들이 반갑게 대해줘서 일요일에 친정 들리면서 교당에 가려고 생각 했는데 그만 틀려버린 거예요.
그 뒤로 가정이 안 편했어요. 남편은 사남매의 막내인데 부모를 모셨는데 누구든지 아픈 거예요. 한 사람이 아프고 나으면 또 다른 사람이 아프고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또 삼년 있다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또 삼년 있다가 남편이 돌아가셨어요. 그런 중에 아이들 5남매 키우느라고 나는 정신없었어요. 잘 사는 양반집 선비였던 남편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서 돌아가실 땐 살림이 많이 줄었어요. 큰아들이 14살 때 내가 34살에 혼자가 됐죠.
그런 풍파를 겪고 친정에 가는데 어느 날 교당이 다시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제는 누가 혼낼 사람도 없으니까 들러봐야겠다 했죠. 다시 가 보니 죽암장님(정세기), 관암(백남출) 도정님의 설교말씀과 강좌말씀이 너무 가슴에 와 닿고 사람이 배우면 저렇게 진짜 사람이 되겠다 싶어요. 우리 팔촌 시숙이신 신암장님 전교로 111년 1월 25일에 입도를 했어요.
해방이 된 후, 남해에 포덕이 많이 됐어요. 나는 능력이 없어서 우리 아들에게 사관학교라도 가라고 권했죠. 아들 군대 보내고 마음이 허전하고 의지할 때가 없어서 곧 바로 입교했어요. 내가 입교할 때가 나이가 마흔이었어요. 군대 간 아들이 건강하고 무사히 오기를 빌며 수련했죠. 수련을 하니 내가 참 좋은 운수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입도한 후로는 마음이 편하고 우리 아이들도 병원 약 한번 안 먹이고 잘 키웠어요.
그때 부회라는 게 있었어요. 부회 하면 9시 기도식 하고 주문도 하고 좋은 이야기도 나눴어요. 우리 동네에선 화요일 날 부회를 했는데 아무리 멀어도 부회 날 저녁이면 꼭 참석했어요. 경화당(정영점)님 댁에서 했는데 경화당님이 참 지극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좋아서 저도 그렇게 돼야겠다는 마음으로 수련을 했어요. 수련을 하면 참 편안해요. 다른 잡생각이 안 나고요. 나는 오직 5남매 잘 키워주셔서 한울님께 감사하다고 심고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수련간 곳이 경주 용담정입니다. 너무 좋더라고요. 그 후로 사촌오빠(고정훈)가 용담수도원에 원장으로 계실 때 1년에 2번씩 꼭 갔습니다. 김경렬 원장님이 포덕사로 있을 때에요. 그때는 천도교 일에는 꼭 참석해야겠다는 정성이 있을 때입니다. 시일도 부회도 기다려지고 재미가 났어요.
나는 청수를 개울 옆 우물물이 참 좋아서 그 물을 길어다가 모셨어요. 하루는 비가 많이 쏟아져 물이 크게 불었는데 깜깜한 새벽에 전등이나 호롱불도 없이 개울을 건넜어요. 아는 길이라 조심해서 살살 가는데 마지막 몽돌을 밟다가 미끄러졌어요. 그러다 청수 물 뜨는 주전자를 빠뜨렸어요. 멍하니 섰다가 다시 집으로 가서 다른 그릇에 물을 떠서 새벽 기도식을 했죠. 내가 그날 저녁 부회에 가서 그 말을 했더니 경화당(정영점 선도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정성 드리는 그릇은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어디 근처에 있을 것입니다” 하세요.
이튿날 가니 물이 많고 탁해서 보이지 않고 삼일이 지나서 가니 물이 맑아지고 보였습니다. 유심히 찾아보니 어떻게 그 많은 물에 그 주전자가 딱 바르게 앉아 있는 거예요. 신기하지요. 내가 우물에 가서 깨끗이 씻으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주전자가 안 내려갔습니까?” 하면서 깨끗이 씻어서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빈주전자가 그렇게 바르게 가라 앉아 있었을까요? 다시 생각해도 신기해요. 그 주전자를 계속 쓰다가 한 10년 전에 좋은 스테인리스 주전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그 주전자는 보관하지요. 마음으로 ‘이 좋은 운수를 내가 받았는가’ 늘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경주 용담정도 가고 복호동에도 가고 수도원을 많이 다녔어요. 정성으로 청수를 모셔서 ‘내일이면 좋은 일이 있겠구나’ 하면 다음 날 아들이 오더라고요. 내가 한참 수련하고 정성 드릴쯤에 어쩌다가 지부회장이 됐어요. 사양했지만 어쩔 수가 없이 중책을 맡게 됐어요. 참으로 민망하고 걱정스러워 집에 와 청수를 모시고 가만히 생각하니 그런 맘이 들어요. ‘우리 천도교는 많이 배웠다고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수련 열심히 하고 경전 많이 보고 정성이 있으면 임기 동안 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회장, 총무님 덕분에 내가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설교 중에 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당암(박몽상) 도정 선생님 말씀입니다. “염주를 무조건 돌리지 말고 하나하나에 정성을 모두 실어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개개인의 마음을 두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두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생각에 마음을 두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가리산 수도원장님께서 남해교구 강도회 하실 때 “좋은 스승님을 모시는 것보다 경전을 세밀하게 보고 터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경전 속에 큰 스승님이 계신다. 주문을 읽을 때도 그 뜻을 새기면서 지극히 읽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도 제 가슴에 딱 남아 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께서 치매 중풍에 걸리셔서 3년을 걸려서 대소변을 받아냈습니다. 요즘에는 비닐도 있고 장갑도 있고 옷도 좋지만 그때는 무명옷이라 많이 힘들었지요. 나는 부모한테는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 귀찮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우리 애들이 지금 내게 너무 잘합니다. 좋은 신앙을 해서 이런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천도교 신앙하면서 ‘이렇게 좋은 교회운수를 어떻게 받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삽니다. 천도교를 안 했으면 한글도 몰랐을 것이고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서 얄궂은 말과 행동을 하고 살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제시절에 학교를 조금 다녔는데, 송충이 잡고 부역 나가면서 일본어만 조금 배우고 공부를 못 했어요. 마을회관에 며칠 다니면서 이름자 알고 ‘가나다라’ 겨우 했는데 천도교를 하면서 경전을 줄줄 읽지요.
중앙교당에서 4개 교구가 모여서 암송대회를 했는데 글자 하나 안 틀리면 경전 한 권, 염주 한 줄을 받아요. 그런데 나는 한 열 권을 받아서 교당에도 주었어요. 노량에 회암장(하준천)님께서 지으신 「내성단 서사」도 참 좋지요. 「소년의 서사」는 시일날 아이들에게 시키곤 했어요. 다 회암장님께서 지으신 거죠. 모두 사람이 살아가는데 좋은 교훈이 되는 내용입니다.
해월신사님 독공을 읽으면 참 가슴에 와 닿아요. ‘독실하게 공부해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내가 신유년 여름에 도를 받은 뒤로부터 독실하게 공부할 뿐이더니 얼음물에 목욕해도 따스한 기운이 돌고 불을 켜도 기름이 졸지 아니하니 정성 드려야 할 것은 도학이니라’ 이 내용이 참 가슴에 와 닿아요. 내가 주전자가 떠내려가지 않은 것도 그때 독실하게 공부를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남해는 해마다 강도회를 꼭 합니다. 중앙교당이 없을 때는 4개 교구가 집을 빌려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서 강도회를 했습니다. 남해교구가 천도교 본 토막입니다. 남해 삼일 독립만세운동도 천도교가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솔곡(설천면 문항리)에 탑도 세우고 공원이 돼서 그곳에서 3.1절 기념식을 봉행합니다. 원래는 우리 천도교가 했는데 지금은 행사 범위가 커져서 군수도 오고 부군수도 다 참석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해서 참석하신 분들 나누어 드리고 했는데 작년부터 부쩍 행사가 커져서 음식하기가 힘에 좀 부칩니다. 옛날 남해 천도교 쨍쨍했죠. 천도교 왕국이라는 얘길 들었어요. 남해는 시일날이 되면 동네가 온통 궁을꽃밭이었어요.
내가 경주에 수련하러 갔을 때 남해 지도자급 수련회가 있었지요. 30분 정도만 쉬고 맹훈련을 시키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특별기도 주간에는 9시 기도식 시간을 지키는 게 중요해요. 예전에 묵암장님도 그렇게 말씀했어요. 다만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여 청수 모실 때는 식사하고 바로 청수 모시는 것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가족은 한번 흩어지면 모이기 어려우니, 특히 아이들이 있을 때는 그렇게 기도식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지요. 우리 여성회 수련을 할 때도 기도식 하기 5분 전에는 조용히 앉아서 준비하는 모습으로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것이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잡담을 많이 해요. 그런 점이 좀 아쉽게 느껴져요.
우리 남해지부 여성회는 수련복을 맞추어서 그 옷을 입고 수련 강도회를 해요. 여성자체 수련회를 올해로 4회째 실시합니다. 여성회장(이종애)님이 제안해서 시작했어요. 여성회본부 수련회 때는 참석하는 인원이 많이 참석하면 10명 정도 밖에 안 돼요. 나이 많은 분들이 멀리 못가시니 많이 아쉬워서 회장님이 자체 수련회를 실시하자고 했어요. 교구장님(욱암 박석주)께서 지도 선생님을 모시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천덕송강사님도 모시고 또 수련복도 맞추고 구색을 맞추게 됐죠. 첫 회 실시해 보니 성과가 참 좋았어요. 평생 수련 못해 본 분도 참석하셨고 나이 드신 분도 참석 하실 수 있고 첫 회에 31명이 수련했습니다. 일주일 수련하고 폐강식을 한 후 앉은 차례대로 소감 발표를 하는데 대 감동이었습니다. 멀리 수련 안 가도 이렇게 수련이 잘되는구나. 한 번도 수련 안 가본 사람도 신앙체험을 감동적으로 했어요.
그때 힘을 받아서 지금까지 실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신앙인데 일반사람들이 안 알아주니 너무 아쉽고 요즘 젊은 사람도 우리 교회 말을 하면 안 들으려고 하니 참으로 아쉬워요.
풍암 전 도정(박재성)님이 설교 말씀 중에 “내가 천도교 신앙저울에 몇 근이나 되는지 달아 보라”고 하시는 말씀에 내가 내 자신을 돌아 봤습니다. ‘내가 몇근이나 되는가?’ 지금 박충남 의창수도원장이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씀에도 고개가 끄떡여졌습니다. 일반 결혼식장에 가면 일반사람들은 뒤에서 수다를 떨며 예의를 지키지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 천도교인은 그런 자리에 가면 좋은 자세로 경청할 줄 압니다.
그리고 해월신사님이 “산이 검게 변하고 길에 비단이 깔 때가 때다” 했는데 지금이 때인데 우리가 부족해서 천도교가 포덕을 크게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경주 수련회 가니 중학생이 내 옆에 앉아요. “어떻게 여기 왔니? 고맙다”고 하니 학생이 말하길 “옛날에 할아버지가 말씀 하신 게 생각나서 여기에 왔어요” 하더라고요. 그런 것 같아요. 부모가 정성을 많이 드리면 자식들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 같아요. 지금 아이들은 현실적으로 공부한다면서 청수자리에 앉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취직도 잘 안 되서 천도교 들어오기가 힘든 현실이지요.
옛날엔 우리 가정에 아픈 사람이 안 떨어졌는데 지금은 모두 다 건강하고요. 아들들 군대도 잘 갔다 오고, 돈 벌거라고 외국까지 가도 별 탈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그것이 다 천도교를 열심히 한 공이라 생각하며 언제나 한울님께 감사해요. 우리 아들, 손자들에게 말해요. 열심히 하라고. “천도교는 우리나라 종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종교를 믿어야 하고 내가 천도교를 해서 혼자 몸으로 너희들 다 대학까지 마치게 했다. 그것이 다 천도교 덕분이다. 그러니 천도교를 꼭 해라. 지극한 정성을 드리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천도교다” 꼭 유언으로 남길 것입니다.
참말로 좋은 공부인데 세상 사람들이 못 느끼니까 아쉽고 또 안타깝습니다. 나는 스승님의 말씀을 꼭 믿습니다.
개벽의 운수가 꼭 올 것입니다.
열심히 준비하시고 정성을 다하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스승님 말씀을 가슴에 꼭 지니고 특히 여성들이 꼭 단합해서 잘해야 합니다.
다 잘될 것입니다.
(구술일: 포덕 10(2009)년 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