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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역사 교과서 왜곡문제
1. 서론
2. 본론
Ⅰ.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의 원인
Ⅱ.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단체
⑴. 이 단체의 성격은?
⑵. 이 단체의 역사인식은?
Ⅲ. 후소샤란
Ⅳ. 우리는 어떠한가?
Ⅴ. 왜곡문제에 대한 한국의 대응의 역사
3. 결론
Ⅰ. 앞으로의 방향
Ⅱ. 나의 생각
1. 서론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빠른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개개인이 있기 때문에 나라가 있고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국에 대한 정체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각국은 세계에서 자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국에 대한 긍지를 높이고 자국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계에 변화하고 대응해나갑니다. 일본이 지금 하고 있는 교과서 문제도 그렇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애국심을 높이고 긍지를 키우겠다는 신념하에 역사를 자국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교과서 문제가 파문시 되는 것은 바른 역사가 아닌 왜곡된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심각한 사실왜곡이 국내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8월경부터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의 언론과 학계에서는 그 심각성에 적극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교과서의 왜곡내용이 어떠하다는 정도의 개괄적인 보도기사만 나왔을 뿐이며 극히 일부의 연구자와 학회에 의해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는 2001년도 2월 말경 검정통과가 확실해지면서부터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 일제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가해행위를 축소 은폐하고자 한 2002학년도 일본 중학교용 역사교과서 8종이 한국과 피해국들의 우려와 항의는 불식한 채 결국 일본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하였습니다. 사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철저한 황국․식민사관으로 무장돼 있는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앞장서고, 식민사관으로 무장된 학자들이 추종하는 형태로 역사왜곡이 진행되었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를 만드는 단체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란 단체입니다. 특히 이 단체에서 만든 후소샤판 중학교 사회과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교과서의 문제점은 현재 여러 각도에서 각종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서 우선 교과서 왜곡문제가 왜 일본에서 발생되었는가에 대한 교과서 왜곡문제에 관한 전문가들의 원인을 알아보고 이러한 왜국문제를 만들어 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단체의 성격을 알아보며 다른 개정교과서과는 다른 후소샤판이 무엇인지, 그리고 일본은 과연 무엇을 왜곡였는지를 교과서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우리는 앞으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를 어떻게 다루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강상중은 전쟁책임을 묻지 않은 미국의 전후처리와 그에 따른 천황제 온존 및 보수∙우익 세력의 활개, 아시아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호, 그리고 일본의 정치혼란과 경제불황이란 점에서 역사왜곡 파동이 반복되는 원인과 2001년도 역사왜곡 문제가 발생한 근인을 찾고 있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 일본의 과거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인류에 끼친 제국주의적인 죄악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그때 당시 전승국인 연합국의 패전국 처리에 있어서 독일과 일본에 대한 처리 방식의 차별 성에서 비롯된 측면을 우리는 주목해 필요가 있다. ⋯⋯ 미국의 일본에 대한 종전 처리 과정에서 보여줬던 일본에 대한 전쟁책임의 사실상 면책에서 오늘의 일본국민과 일본정부 그리고 학자들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싹텄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2)⌟ 이렇듯 역사왜곡의 문제의 본질의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단체란?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일명 쓰쿠루카이)은 지난 1997년 1월 도쿄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와 전기통신대 니시오 간지교수 등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기존의 중학교과서가 일본의 치부를 기록하고 있다며 건전한 내셔널리즘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밝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자학사관'이 제거된 새로운 교과서 집필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 사실을 중학교 교과서에 담는 것은 일본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역사교과서에 난징 대학살과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삭제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들의 사상은 니시오 간지의 `국민의 역사',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 등에 그대로 투영돼 있었습니다. 특히 니시오 간지의 `국민의 역사'는 일본의 역사가 얼마나 훌륭한 지를 선전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쿠루카이가 자신들의 사상과 논리를 일반인에게 전파하고, 급기야 이번 문부과학성 검정에 통과하기까지는 자민당내 우파 정치인 및 언론의 지원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민당은 쓰쿠루카이의 태동기인 지난 96년 8월 당내에 `역사검토위원회'를 만들었고, 모리 요시로총리 등 현 내각의 각료다수가 이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쓰쿠루카이에게 자생할 토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 산케이신문은 지난 96년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라는 연재물을 통해 이른바 `자학사관'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사관' 옹호론자들의 발언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쓰쿠루카이는 이런 산케이신문의 계열사인 후소샤를 출판사로 정해 이번에 자신들만의 사관을 담은 역사교과서를 편집했고, 문부성 검정과정에서 표현의 양보를 통해 제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 단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인식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중학교 현행 역사 교과서의 한국 관련 내용보다 검정 합격본이 상대적으로 보다 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는 수업시수가 줄어들고 전반적으로 교과서의 양이 줄이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1982년 '교과서 파동' 이후 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관련 내용의 분량과 서술의 깊이가 심화되었다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출판사(기존 7종)에 따라 한일 양국의 의견 차이가 심한 고대사 부분에서 한반도 문화가 일본문화 발달에 기여한 점, 근대 이후 식민지화 과정, 그리고 식민통치의 피해 등에서 어느 정도 개선된 점이 확인되기도 합다. 그리고 식민지화 과정을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연결하여 조선 및 한국과 맺은 각종 조약의 불평등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노동력 동원의 강제성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고대사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간접적으로 서술하고 있거나 근대사 부분에서도 사실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거나 특정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킴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상을 축소시키는 등 여전히 오해의 소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동일한 주제라도 교과서 저자들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출판사별로도 서술의 차이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모임'측에서 검정을 신청하여 합격한 후쇼샤중학교 사회(역사)교과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과 관련된 다른 나라의 역사는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교과서가 137곳을 수정하였다고 하지만 표현 형식만 완화하고 자구만 고쳤을 뿐 침략전쟁을 일으킨 국가체제를 옹호하고, 일본의 황국사관, 군국주의 부활 내용 등은 본질적으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 예컨대 형식과 절차가 무시되고 강요에 의한 국권 침탈을 '한국 내에서 합방을 수용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라든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라고 하여 침략을 정당화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표현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새 교과서가 채택되어 역사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일본을 비롯한 당시 제국주의의 제 3세계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강점이 합법적이고 당시 국제사회가 승인했으며 일본에 이익된 것만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한국민의 저항이 불필요했던 것으로 치부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후 국가간의 정상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 군대위안부나 강제 동원을 당한 당시 조선민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조선민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끌려가 수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것에 대한 보상에 대한 문제를 넘어 그러한 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왜곡한 역사 교과서를 인정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왜곡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될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만든 후소샤판의 역사교과서는 어떠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겟습니다. 새 역사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인식은 후소샤판에 그대로 깃들어 있겠지만 후소샤판 역사교과서를 살펴보면서 교과서에서 어떤 부분에 어떠한 역사인식을 부여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교과서는 군사적 정복에 의한 지배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임나일본부설’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남이 한일 역사학계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과서에서는 이 설이 한일관계사 서술에서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잘못된 인식의 틀로 작용되고 있습니다. 둘째, 일본의 역사를 미화시키기 위해 한국사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이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반면 일본과 관련된 다른 나라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사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비교대상으로 한국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사를 언급할 때 조공․종속․복속국․속국․종주권 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셋째, 일본군에 의한 군대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고의로 누락하여 태평양 전쟁 당시의 반인륜적 잔혹행위의 실체를 은폐하였습니다. 이 교과서는 태평양 전쟁시 일본군이 조선에서 군대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고의로 누락시킨 것으로 태평양 전쟁시 일본군의 비인도적 가혹행위의 주요부분을 은폐해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이는 객관적 사실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넷째, 양국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의 책임소재를 모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교과서에서는 양국 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설명에 있어 일본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사건의 원인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강화도사건, 한국강제병합등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점에서 알수 있습니다. 다섯째, 일본이 한국 등 타국에 입힌 피해를 축소 내지 은폐하였습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저지른 만행이나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입힌 피해상을 서술하지 않거나 축소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나라를 모독하는 가학사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습니다. 이 교과서에서는 식민지지배 자체에 대한 반성이 없이 오히려 시혜를 베푼 듯이 서술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철도와 관개시설 등의 수탈시설을 마련한 것이 마치 조선을 개발하기 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일본이 이웃나라와 평화적인 교류협력을 해 온 사실을 경시하였습니다. 일본위주의 국가주의에 입각하여 외국과의 갈등 및 전쟁사를 중심으로 서술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의 우호협력이나 상호이해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가야 제국과의 평화적인 교역, 조선시대의 통신사 왕래 등을 왜곡하고 있음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여덜번째, 인종주의적 시각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서양의 백인종과 동양의 황인종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습니다.예를 들면 한국침략이 목적이었던 러일전쟁을 마치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하여 백인종과 싸움것처럼 서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홉 번째 학술연구 성과의 반영이 미흡합니다. 한국에서의 역사연구 성과는 물론이고 일본에서의 연구 성과도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연구성과는 거의 무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교과서는 사실의 서술과 해석에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뚜렷하게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되돌아보려는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파동이 역사교과서와 서술로부터 제기된 사인이었기 때문에 특히 ⌜국사⌟ 교과서의 내용과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실시되는 국사교육에 관한 문제제기가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비판자들은 제7차 교육과정의 실시에 따라 중학교의 국사 수업시간을 축소하고 고등학교의 한국 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바꾼 조치로 인해 역사교육이 부실화될 우려를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국사교과서가 수난과 투쟁의 역사, 한일관계에 지나치게 편중된 역사, 민족주의의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수업시간 등에서 국사교욱의 비중이 제6차 교육과정에 비해 낮추어진 것이 아니며 일본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반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국사교육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는 반박도 있었습니다.
자라나는 학생들의 교육과정을 어덯게 구성해야 하는가는 특정 교과서의 관련에서만 볼 수 없다. 역사학계의 입장에서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고,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현대사의 중요한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사의 많은 부분은 역사과목보다도 정치⋅경제⋅사회⋅문화 영역을 다루는 사회과목에서 다루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교육과정은 특정 교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 가장 타당한가’의 관점에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3)
3)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한 한국측 대응의 역사
일본 역사교과서의 내용이 국제사회에서 처음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1982년입니다. 이후 모두 세 차례 국제사회에서 파동이 있었으며, 한국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적 반발의 중심에 있었을 지는 몰라도 본질에서 언제나 비켜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응과정이 이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한국 사회는 1982년에 교과서 왜곡문제가 처음 국내 여론에 제기되었을 때 극일의 자세로 임하였습니다. 이 때는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탐구하는 작업은 극히 미미했으며, 국내의 연구역량만으로 근현대사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어 재일한국인 연구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오히려 1982년의 교과서 파동은 정치적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경제안정 자금을 받아야만 했던 군사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곤란한 입지를 회피하기 위해 여론을 호도하며 독립기념관 건립을 내세웠습니다. 반면에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재야세력은 1980년 ‘서울 봄’ 이후 위축된 투쟁역량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하였습니다. 그 틈새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똑바로 인식하고 교과서 왜곡문제를 본질적으로 접근하며 장기적으로 탐구하고 대응하려는 자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2001년 교과서 왜곡파동이 제기될 때 나타났습니다. 그 동안 극히 소수의 연구자에 의해 일본 역사교과서가 꾸준히 검토되어 왔지만, 학계에서조차 역사교육에 관심 있는 한국근대사 연구자 몇몇의 학문적 호사로만 간주되었을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대응과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대응 모두 뒷북을 치고 있는 형국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정부에 기대하던 관행, 모든 잘못을 정부의 탓으로만 돌리던 습성은 2001년도 역사왜곡 파동에서도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2000년에 상대국을 방문한 한국인과 일본인이 40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만큼 접척의 계기와 측면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략적으로 기획된 확고한 대일정첵을 수립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정부에서도 보여주어야 하겠지만, 이번 역사왜곡 파동 때 전개된 한일 양국의 시민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민단체 상호간의 적극적인 교류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이러한 교류란 그동안 쌓여 있던 양국간의 국민 감정을 진실과 사과로써 풀면서 시작ㅎ해야합니다. 물론 역사란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국 위주로 쓰여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 나라가 같이 연결된 역사를 그 나라들 모두가 함께 연구하여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점들이 해결되었을 때 일본과 우리나라는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 도울 수 있을 것이고 같이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동반자로서 서로 이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미래를 이끌어나갈 양국학생들을 교환하여 상대방 국가의 역사 수업을 통해 토론하고, 일본 측 연구자들과도 학술 교류를 활성화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역사 과목의 독립이 필요합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대부분이 근‧현대사에 집중되어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근‧현대사를 배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앞으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서 대처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현대사가 필수가 되어야하며 나아가 역사 과목이 독립 교과로 되어야합니다. 정부의 지속적인 역사 교육에의 관심과 투자도 함께 발맞추어가는것도 꼭 필요합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지양하고 일본과 같이 사는 길을 교육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소모적인 경쟁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승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시대착오적인 역사 왜곡을 저지할 수 있으며 동아시아의 평화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눈과 귀를 이웃 일본에 열어 놓고, 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는 제대로 된 우리 역사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데 힘써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동해가 아닌 일본해로 표기된 지도를 보고 있으며, 고대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벌했다는 등 터무니 없는 내용이 버젓이 실린 교과서를 펼쳐보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제 무조건 그것은 잘못된 역사다하면서 우길것이 아니라 철저한 학문연구를 하고 그에 대응하는 논리를 습득하고 개발하여 앞으로를 대비해야할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일단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일본 교과서 왜곡이니 뭐니 따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 어역사왜곡이라는 것은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어느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자국의 역사가들이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조금더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객관성을 유지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또한 옛날과는 달리 역사의 변화하는 속도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지고 자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굉장히 빈번히 접촉이 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아무리 역사 왜곡을 한다해도 일본국민들과, 세계인들이 그것을 곧이 믿고 따른다는 것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국의 역사를 배워야합니다. 언제까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순 없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왜곡뿐만 아니라 더 큰 왜곡이 오기 전에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하고 학습하여 대응해야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일본처럼 자국만을 위한 역사를 가르치고 학습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안에 한국이 있음을 알고 한국의 특수성과 함께 보편성을 함께 가르치고 학습해야겠습니다. 그래야만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대응하며 세계의 발걸음에 발맞춰나가며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왜곡된 부분을 뽑아서 알아보았습니다.
1. 임나일본부설
(1)
▹교과서 내용: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 - 임나(任那)라는 곳에 거점을 둔
▹한국 수정요구 의견: '임나일본부설‘은 한일 50년간의 연구결과 인정할 수 없는 학설.
▹일본 검토 결과: ‘임나일본부설’의 존재를 지지하고 있지 않으나 가야 제국에 대해 왜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함.
(2)
▹교과서 내용: 야마토 군세(軍勢)는 백제와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싸웠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명백한 오류 - 신라의 지원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왜군을 격퇴(광개토왕 비문)
▹일본 검토결과: 오류로 생각되며 정정할 필요가 있음(자체 정정 신청 중)
(3)
▹교과서 내용: 고구려는......백제와 임나를 기반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에 의해
▹한국 수정요구 의견: 상설 주둔을 정제한 내용으로 명백한 오류
▹일본 검토결과: 4~5세기 왜가 한반도에서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웠다는 것은 인정됨.
(4)
▹교과서 내용: 임나에서 철퇴하여 한반도 정책에 실패한 야마토 조정
▹한국 수정요구 의견: 점령국 일본이 피점령지 임나에서 철수한 것을 전제로 기술했으나 주둔, 철퇴의 기록이 없으므로 오류.
▹일본 검토결과: 가야제국의 멸망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 대한 왜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인정됨.
2. 4세기 후반 삼국관계
▹교과서 내용: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의 신라 및 백제를 압박
▹한국 수정요구 의견: 역사적 사실의 오류- 4세기 후반은 고구려가 신라를 지원한 관계.
▹일본 검토결과: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됨.
3. 6세기 삼국 및 국제관계
(1)
▹교과서 내용: 고구려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지원 국인 북위(北魏)도 몰락.
▹한국 수정요구 의견: 근거 없는 주장- 당시 고구려는 북위(北魏)와 직접 대결한 적도 있음.
▹일본 검토결과: 북위를 고구려의 종주국이라고 하는 것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음.
(2)
▹교과서 내용: 신라와 고구려가 연합해 백제를 위협.
▹한국 수정요구 의견: 명백한 오류- 신라, 백제가 연합해 고구려 남하에 공동대응.
▹일본 검토결과: 학설상황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요구할 수 없음.
4. 삼국의 조공설
▹교과서 내용: 고구려가 돌연 야마토 조정에 접근- 신라와 백제가 일본에 조공.
▹한국 수정요구 의견: ‘일본서기’만을 근거로 한 기술. 6세기 이후의 삼국이 일본보다 정치 문화적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 한일 학계의 통설
▹일본 검토결과: 백제, 신라와 왜의 외교상의 조공관계 문제와 삼국이 일본보다 정치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었는지 여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 이런 관점에 따라 정정을 요구할 수 없음.
5. 왜구
▹교과서 내용: 일본인 이외에 조선인도 다수 포함... 대부분은 중국인.
▹한국 수정요구 의견 :(1) 왜구의 발생 원인에 관한 설명이 누락.
:(2)‘왜구=일본인’이라는 기존 역사인식 불식을 위해 왜구에 조선인과 중국인을 포함 기술.
▹일본 검토결과:(1) 제도상 기술하도록 요구할 수 없음.
:(2) 학설상황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요구 할 수 없음.
6. 조선국호
▹교과서 내용: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조선을 건국.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이라는 국호 대신 일제 강점기에 사용된 부적절한 용어 ‘이씨조선’을 사용.
▹일본 검토결과: 최근 ‘조선왕조’를 사용하는 경향도 있으나 ‘이씨조선’ 등으로 부르기도 함
7. 임진왜란
(1)
▹교과서 내용: 제목에 ‘조선출병’
▹한국 수정요구 의견: 침략을 ‘출병’으로 기술, 침략사실 은폐.
▹일본 검토결과: ‘조선출병’, ‘조선침략’등의 호칭이 폭넓게 인정되고 있음.
(2)
▹교과서 내용: 히데요시는 명(明)을 정복- 인도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에 사로잡혀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임진왜란 원인을 明의 정복, 히데요시의 개인적 망상으로 기술.
▹일본 검토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아시아를 정복하는 구상을 갖고 있었음을 폭넓게 인정함.
(3)
▹교과서 내용: 출병 결과,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은 현저히 황폐해짐.
▹한국 수정요구 의견: 전쟁기간 중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인적, 물적 피해상황을 축소.
▹일본 검토결과: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기술한 것인지는 집필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음.
8. 조선 통신사
(1)
▹교과서 내용: 막부는 조선과의 국교를......회복.
▹한국 수정요구 의견: 이에야스의 국교 회복 노력에 대한 설명 없이 사실만 기술.
▹일본 검토결과: 제도상 기술하도록 요구할 수 없음.
(2)
▹교과서 내용: 장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사절이 에도를 방문.
▹한국 수정요구 의견: 통신사 파견 목적, 초빙이유 등의 설명 없이 일본 장군(將軍)승계 축하사절단이었음만을 기술.
▹일본 검토결과: 대체적으로 장군이 바뀔 때마다 승계축하 사절단이 있었음을 인정함.
(3)
▹교과서 내용: 부산에......‘종씨(宗氏)의 왜관’이 설치되어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이 부산 왜관을 설치한 사실을 은폐하고 일본이 외국의 토지에 둔 행정기관인 것처럼 기술.
▹일본 검토결과: 왜관이 무역 등에 종사하고 있었던 점. 왜관의 운영은 소우씨에 의해 행해진 점을 인정함.
9. 조선의 서구열강에 대한 인식과 국제적 지위
(1)
▹교과서 내용: 서구 열강의 위협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구미의 무력위협에 대한 조선의 대응을 일본의 방식과 비교해 열등하게 평가.
▹일본 검토결과: 당시 조선도 대체로 중국과 동일한 배경으로 구미의 진출해 대응하였다는 것을 인정함.
(2)
▹교과서 내용: 중국의 복속국 이었던 조선도 동일하게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을 중국의 ‘복속국’으로 표현한 것은 삭제 필요.
▹일본 검토결과: 자체 정정 신청 중.
10. 전근대 동아시아 질서와 조선
(1)
▹교과서 내용: 조선과 베트남은 완전히 그 내부에 들어가 중국역대 왕조에 복종......
▹한국 수정요구 의견: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왜곡 기술(책봉과 조공은 의례적인 외교형태로 중국이 조선 내정에 간섭한 적은 없음)
▹일본 검토결과: 자체 정정 신청 중.
(2)
▹교과서 내용: 일본은 중화질서의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과 비교해 일본은 ‘자주 독립국’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17세기까지 일본이 중화질서 속에 존재한 사실은 미기술.
▹일본 검토결과: 학설상황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요구할 수 없음.
11. 일본=무가(武家)사외, 조선=문관(文官)사회론
▹교과서 내용: 중국, 조선 양국은 문관이 지배하는 국가였으므로 열강의 위협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있음.
▹한국 수정요구 의견: 논리적 근거가 없으며 무가사회인 일본이 문관사회인 조선보다 우월하다는 선입관을 주입하는 표현- 일본의 대외팽창, 침략을 속임.
▹일본 검토결과: 학설상황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요구할 수 없음.
12. 정한론
(1)
▹교과서 내용: 1873년 개국 요구를 거부한 조선의 태도가 무례하였고......정한론이 대두됨.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의 조약체결 거부 이유를 설명치 않고 일본 입장에 치우친 기술.
▹일본 검토결과: 메이지 신정부와 조선의 교섭 결렬 이유는, 신정부가 송부한 문서가 막부시대의 형식과 달라서 조선측이 수리를 거부한 것이라고 인정됨.
(2)
▹교과서 내용: (사이고는)자신이 조선에 가서 살해되면 그것을 명목으로 일본이 출병.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이 사이고를 살해할 가능성이 있던 것처럼 가정.
▹일본 검토결과: 사이고가 죽음을 각오하고 스스로 사절로서 조선으로 건너갈 것을 요구한 것으로 인정됨.
13. 강화도 사건
▹교과서 내용: 일본 군함이 조선 강화도에서 측량하는 등 시위행위를 했기 때문에 조선 군대와 교전한 사건.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의 발포를 유도한 계획적 사실 등 도발의 주체, 목적, 경위 은폐.
▹일본 검토결과: 제도상 기술하도록 요구할 수 없음.
14. 조선반도 위협설
▹교과서 내용: 일본을 향해 대륙에서 한 팔이 돌출, 조선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국가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돼......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 반도 위협설을 강조하고 일본의 방위 명목으로 한국침략,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논리- 청일 전쟁 및 러일 전쟁을 자위전쟁으로 합리화.
▹일본 검토결과: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 및 사상가들 사이에는 구미열강이 조선반도에 강력한 발판을 확립할 경우 일본은 독립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 다는 것이 인정됨.
15. 일본정부의 조선중립화안
▹교과서 내용: 일본 정부 내에서는......조선을 중립국으로 하는 조약을 각 국에 체결하도록 하고 중립 보장을 위해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일본 정부 일각에서 약간 논의된 것을 일본의 조선 강압정책을 부정하는 의도로 기술. 일본군비 증강이 조선의 강제 점거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은폐하고 조선 중립을 위한 것으로 왜곡.
▹일본 검토결과: 조선 중립화안이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대조선 정책 기조의 하나로서 존재함을 인정함.
16.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의 관계
▹교과서 내용: 조건 개국 후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제개혁을 지원했다. 조선이 외국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이식하려 한 목적을 숨기고 군사원조로 조선독립에 기여한 것처럼 서술.
▹일본 검토결과: 조선 반도가 다른 세력하에 들어가는 것이 일본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인정함.
17. 조선을 둘러싼 청일 대립
(1)
▹교과서 내용: 청은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고 하여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하게 되었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을 일면적으로 설명하고 일본이 청을 가상적국으로 한 사실을 왜곡.
▹일본 검토결과: 청과 대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태도를 내새워 옴을 인정함.
(2)
▹교과서 내용: 1884......김옥균 등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나.....청의 군대는 친일파를 철저하게 탄압.
▹한국 수정요구 의견: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친일파로 기술.
▹일본 검토결과: 김옥균 등이 일본의 정치가와 접촉하여 지원받았다는 측면에서 ‘친일파’로 불리기도 함.
18. 동학농민운동과 청일 전쟁
(1)
▹교과서 내용: 동학의 난(甲午농민전쟁)으로 불리는 농민폭동.....동학당은 서양의 기독교(西學)에 반대하는 종교를 믿는 집단.
▹한국 수정요구 의견: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동학의 난’ ‘폭동’으로 표현한 것은 부적절하며 농민운동을 종교집단 운동으로 한정한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음.
(2)
▹교과서 내용: (동학농민군의 기세가)수도 한성에 육박
▹한국 수정요구 의견: ‘한성에 육박’한 것이 아니라 전주성을 점령.
(3)
▹교과서 내용: 일본도 갑신사변 후에 청과의 합의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일청 양군이 충돌해 일청 전쟁이 시작됨.
▹한국 수정요구 의견: 일본이 일청전쟁을 유발할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파병한 사실을 은폐.
19. 러일전쟁
(1)
▹교과서 내용: 러시아는......조선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벌목장을 군사기지로 잘못 해석.
▹일본 검토결과: 러시아의 행동을 단순한 삼림벌채 사업이 아닌 군사적 시설의 건설 또는 그 준비로서 널리 인정함.
(2)
▹교과서 내용: 러시아의......극동 군사력은 일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되는 것은 명확......(일본)정부는 더 늦기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굳혔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일본이 먼저 시작한 전쟁을 러시아 무력이 한반도를 장악해 일본의 안전이 위협받았다고 기술.
▹일본 검토결과: 일측이 먼저 무력을 발동했다는 것은 기술되어 있음..
(3)
▹교과서 내용: 일본은 한국의 지배권을 러시아에서 인정받았고.....유색인종국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대국이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은 세계에 억압된 민족에 독립의 한없는 희망을 주었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만주와 한반도 지배권 확보라는 전쟁의 목적을 은폐해 ‘인종간 전쟁’으로 미화.
▹일본 검토결과: 대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이 아시아인민에게 희망을 준 명이 있다는 것과, 이 전쟁결과가 구미에 큰 충격을 준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
20. 한국 강제 병합
(1)
▹교과서 내용: 일본정부는 한국병합이 일본의 안정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은.....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한국병합 과정에서 침략행위와 강제성을 은폐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된 합법적인 것으로 기술
(2)
▹교과서 내용: 한국 국내에서는 일부에서 병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한국 수정요구 의견: 의병투쟁 및 안중근 의거 등 한국내 저항 및 반발을 축소하고 극소수 친일파를 일부러 부각.
▹일본 검토결과: 자체 정정 신청 중.
21. 식민지 조선 개발론
▹교과서 내용: 일본은 식민지화한 조선에 철도,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 개발을 하고......
▹한국 수정요구 의견: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수혜론의 관점에서 ‘개발’이 마치 조선주민을 위한 것처럼 왜곡.
▹일본 검토결과: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요구할 수 없음.
22.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교과서 내용: 조선인 및 사회주의자 사이에 불온한 책동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 수정요구 의견: 관헌(군경)에 의한 살해사실 은폐, 살해대상도 조선인이 대부분이었음에도 축소 기술.
▹일본 검토결과: 관동대지진시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운동가 등이 주민등으로 조직된 자경단 및 관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인정함.
23. 강제동원과 황민화 정책
▹교과서 내용: 징용이나 징병 등은 식민지에서도 시행돼......조선에서는 일본인으로서 동화시키려는 황민화 정책이 강화.
▹한국 수정요구 의견: 황민화 정책 내용이 불분명하고 조선에서의 수탈에 관한 기술이 없고 조선인을 일본 국민의 일부로 보고 일본 식민지 정책의 본질을 은폐.
▹일본 검토결과: 제도상 추가 기술을 요구할 수 없음.
24. 군대위안부
▹교과서 내용: 관련 내용 누락.
▹한국 수정요구 의견:
▹일본 검토결과: 제도상 추가 기술을 요구할 수 없음.
25. 한국전쟁
(1)
▹교과서 내용: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 주체의 유엔군은 반격......중국군이 북한측에 참가.
▹한국 수정요구 의견: 유엔군과 중국&북한군의 전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국군의 실태를 무시.
▹일본 검토결과: 한국전쟁을 수행한 것은 초기를 제외하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중국 인민 지원군, 북한군이었다는 것은 널리 인정함.
(2)
▹교과서 내용: 종래의 국경선인 북위 38도선의 부근에서 전황은 정체.
▹한국 수정요구 의견: 38도선을 국경선으로 기술해 전부터 분단돼 있던 것처럼 묘사.
▹일본 검토결과: 자체 정정 신청 중.
위를 보듯이 日‘후소샤’ 교과서는 살아있는 역사를 왜곡, 은폐함으로써 죽어가게 하고 있다.
신문에서 본 바로는 ‘후소샤’에서 교과서 내용 중 9곳을 자체 수정했다던데, 5곳은 한국에 관련된 내용이며 4곳은 수치상 오류를 정정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전체의 오류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각종 시민단체 및 정부가 강력히 시정 요구를 했지만 결국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후소샤’의 한국의 수정요구 거부는 참으로 국수적이고 근시안적이며, 결론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모욕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