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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할 시간이 없어 그대로 올리나 좀 귀한 곳 같아 전부 올린다 이해좀 해 주세요 바쁜일로
서울역사박물관은 을미년 변화의 새 바람을 원하는 서울시민들의 소망을 담아 역사문화특별전 '탑골에서 부는 바람'을 연다
백탑파는 지금 많은 노인의 안식처가 된 탑골공원.그 속에 먼지와 비바람을 피해 유리 보호각 속에 서 있는
원각사지10층석탑을 말하며 엣날 이탑을 중심으로 지식인들이 모여 개혁청치를 꿈꾸었던 것을 말한다.
백탑파의 핵심인물
박지원초상화 (호질, 양반전, 허생전등 조선시대 풍습을 풍자문학을 대표한 분)
박지원
정조 때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였다.
그의 호인 연암은 (정조 4) 친족형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요동(遼東)ㆍ요하(遼河)ㆍ북경(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생활 기술 전반을 자세히 살피고,
그의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생기있는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 유명한 열하일기
지금 읽어도 아주 재미있는 국문학사 에도 아주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와 신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배워야 할 점을 논하였고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의 책은 매우 큰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그의 생생하고 자세한 여행기록과 재치있는 문체, 참신한 의견 등으로 인해서 즐겨 읽혀졌다고 한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北學派)의 중심에 있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롭고 재치있는 문체로 당시의 사회상을 포착,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썼다.
그는 문체반정 때 정조에게 문체를 타락시켰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국보 2호 백탑파
지식인들의 기개처럼 웅장하고도 흰탑이 아래 사진처럼 한양시에 우뚝 섰었다
자랑스러운 선조여 유물이여 !
20세기 백탑파
그들이 꿈꾸던 세상 백탑파의 핵심인물은 탑골에 살았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과
남산 자락에 살면서 이들과 교유하였던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이다.
이들은 당시 지배이념으로서 관념적으로만 흐르던 주자(朱子)의 학설을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인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여 민생을 보듬는 이용후생의 학문을 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조선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청(淸)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하여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백탑파는 신분과 나이를 넘어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지원과 홍대용은 당대 집권세력이던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 이들은 비록 서얼이지만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등과 함께 벗이자 때로는 스승으로 우정을 이어갔다.
백탑파가 노래한 18세기 서울풍경 - ‘성시전도시’ 대규모 최초 공개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정조의 명을 받아 당시
한양의 모습을 노래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지었다.
백성의 삶과 사회에 관심이 누구보다 높았던 북학파 실학자의 시각으로 노래하였기에, 18세기 역동적인 한양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였고, 왕도(王都)의 모습도 대규모로 조감하였다
1800년 이들을 중용했던 정조가 죽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백탑파 역시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나,
들의 사상은 후손들과 제자에게 이어졌으며 19세기 개화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새해를 맞아 변화의 새 물결을 바라는 많은 시민의 소망을 담아 의미 있는 전시회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5부 49방으로 구성된
도시 구성, 백악산ㆍ인왕산ㆍ남산ㆍ낙산으로 둘러싸인 형승과 청계천ㆍ응암ㆍ세검정ㆍ청풍계ㆍ세심대ㆍ
필운대 등 한양의 명승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당시의 나들이 장소로 지식인들이 모이는 최고인 장소
아! 장엄하고도 웅장한 아름다운 한양도성의 거리 낭만
역동적인 생활상이 보인다.
초가집 사이 사이 기와집도 보이지만 얼마나 풍요롭고 근사한 삶의 풍경인가
조선시대 피 비린네만 풍기는 시대상만 보다가 이 사진과 시를 보니 내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생활 또한 번창하고
넉넉한 생활을 햇는지 시를 읽고 있으면서도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 잘난 선조여 아름다운 내 나라요 낭만)
(18세기 조선의 수도 한양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가 새롭게 발견됐다.
이덕무는 「성시전도시」에서 조선후기 번영하는 한양의 모습을 시로서 예찬하였다.
‘거리 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간 집에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라는 표현에서는 활기에
가득찬 시장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정조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하여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함으로써 특권 시전 상인 이외에 영세 상인들의 도성 진출을 허락하였다. 조선후기 상업의 도도
발전 정치권이 수용한 것이다.
거리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간 집에 / 沿街左右千步廊 (주: 千步廊은 보폭으로 천번을 갈만큼 대저택이란 뜻)
놓은 최고급 비단)
이덕무가 쓴 성시전도시
정조는 1792년 한양 전체를 담은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그리게 하고 이 그림을 소재로 규장각
문신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했다.
금척의 산하 일만 리가 / 金尺山河一萬里
한양 서울 황도 속에 번성하네 / 漢京翼翼黃圖裏
황도 한 문안에 큰 도회지 / 黃圖一案大都會
역력히 펼쳐 있어 손금을 보는 듯 / 歷歷鋪敍掌紋視
글 맡은 신하 그림에 쓰는 시 지을 줄 알아 / 詞臣解撰題畫詩
성한 일에 왕명을 받았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 盛事何幸承恩旨
동월(董越)이 부(賦)를 지은 것4) 조금 뜻에 맞고 / 董越作賦差强意
서긍(徐兢)이 그림을 만든 것5) 어찌 혼자 아름다우랴 / 徐兢爲圖豈專美
조선 만세의 꺾이지 않는 기초 / 朝鮮萬世不拔基
문물 번화한 것이 모두 여기에 있네 / 文物繁華盡在此
…
육조와 백사는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 六曹百司領大小
팔문과 사교는 멀고 가까운 곳을 통하네 / 八門四郊通遐邇
팔만여 민가는 오부가 통할하고 / 八萬餘家統五部
사십구방은 세 저자를 끼고 있네 / 四十九坊控三市
빙 둘러 돌로 쌓은 성 금구와 같으니 / 週遭石城似金甌
이것이 왕경의 대략이로다 / 此是王京大略耳
…
북쪽 산은 백악처럼 좋은 것 없고 / 北山無如白岳好
우편으로 인왕산을 끼었으니 백중과 같네 / 右把仁王伯仲似
영특한 기운 모여 돌빛이 푸르르니 / 英靈所鍾石氣靑
그 아래 기이한 선비가 많이 난다네 / 其下往往生奇士
남쪽 산은 자각처럼 수려한 것 없어 / 南山無如紫閣秀
푸른 기운 하늘에 솟았으니 하늘도 지척이라 / 翠眉浮天天尺咫
이것이 달아나는 말이 안장을 벗는 형국인데 / 云是奔馬脫鞍形
평안도의 봉홧불을 남쪽 변방에 알린다 / 平安火擧通南鄙
동쪽 산은 낙봉처럼 묘한 것이 없어 / 東山無如駱峯妙
공자의 사당이 그 기슭에 자리하고 있네6) / 玄聖門墻枕其趾
…
4) 동월(董越)이……것: 명나라 사신으로 1488년 조선을 다녀온 후 조선의 풍토를 기록한 「조선부(朝鮮賦)」를 남겼다.
5) 서긍(徐兢)이……것: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견문한 내용을 『고려도경』으로 남겼다.
6) 공자의……있네: 공자를 모신 성균관 대성전을 묘사한 것이다.
7) 백추지……울리고: 세검정 앞 홍제천에서는 실록의 저본이 되는 사초를 세초(洗草)하였다. 세초한 종이는
재활용하였는데, 이 부분은 바로 세초 후 종이를 만드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8) 백대의……깨끗하다: 김상용의 집터인 청풍계(淸風溪)의 바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 지금도 청운동의 주택에 ‘백세청풍’이라는 바위 글씨가 남아 있다.
9) 원각사에……백탑은: 원각사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백탑이라 하였다. 정조대에는 이곳에서 박지원을
중심으로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백동수 등 소위 ‘백탑파’ 학자들이 활동을 하였다. 현재의 탑골공원 이름도
원각사 10층탑에서 유래한 것이다.
10) 웅백성홍(熊白猩紅): “곰이 겨울이면 흰빛의 기름이 가슴에서 옥처럼 뭉치는데, 그 맛이 매우 좋으므로 사람들이
웅백이라 한다.”고 했고, 성홍은 성성(猩猩)의 피처럼 붉은 빛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술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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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경제가 이전시기에 비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던 18세기 무렵인 1792년 4월. 여러 신하들과
시를 주고받는 것을 즐긴 정조는 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그림을 바탕으로 박제가,이덕무 등 여러명의
신하들에게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지어 바치라 명합니다. 정조의 명을 받은 관리들은 각각 200구 1400자
넘는 7언 백운(百韻)의 장편시를 창작해서 제출합니다. 이때 정조는 답안을 직접 평가한 뒤 등수를 발표합니다.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申光河)였고,
2등은 검서관 박제가(朴齊家).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李晩秀),
4등은 승지 윤필병(尹弼秉),
5등은 겸검서관 이덕무(李德懋)와 유득공(柳得恭)이었습니다.
정조는 이들 6명의 시에 직접 어평(御評)까지 남깁니다.
위 내용의 성시전도시는 이중 이덕무가 쓴 성시전도시의 내용입니다.
- 정조는 관리들이 제출한 시중 박제가의 시를 가장 높이 형가했지만, 이상하게도 인터넷에서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는 원문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편적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들만이 있을뿐인데
그중에는 비늘처럼 빽빽이 들어선 기와집 4만호라는 대목도 있어 더욱 흥미를 끕니다.
누가 썼는지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성시전도시는 모두 번영하는 한양의 모습을 예찬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성(城)에서 나오는 분뇨를 다 수거하지 못해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며, 냇가 다리 옆 석축 에는 인분이 달라붙어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라고 한양을 설명한 장
당시 한양에 정말로 기와집이 4만호가 있어서 빽빽했다면 아마도 그 당시 한양의 모습은 대충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sakcafe/40256 )
성시전도시(18세기)중 일부
그림같이 아름다운 내 나라 강토 그리고 풍습들
“청년들 한 무리가 떼 지어 몰려갈 때 / 팔뚝 위 보라매는 털과 부리 으스댄다…
눈먼 장님 호통치나 아이놈들 깔깔대고 / 건널까 말까할 때 다리는 벌써 기우뚱”
(주: 고려대의 트랜디보이들의 상징 해동보라매가 조선후기까지 일반화되어 있었군요)
“물가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일세.~ 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
~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며 성을 내며 노려본다."
거지처럼 매달렸다.
한 곳에선 꼭두각시 무대에 오르자 동방에 온 칙사(勅使)가 손뼉을 친다.
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 사람이 시키는대로 절도 하고 꿇어도 앉네.”
즐기지 않으며~잔치자리 첫 대면에는 이 물건을 못빼놓고 비변사 공무로는 저것을 넘어서는 게 없네/연다(烟茶·담배)와
술은 어느 것이 좋은가?”
동쪽 사람 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좋아했으나(自古兩班喜靜僻)/지금은 사대부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而今士夫貪喧비)”
(서민)“외진 골목에 팔짱끼고 살자니 생계가 어려워/빈촌에 둥지 틀어 시장 가까이 산다”
"아직도 연조(燕趙)의 협객을 사모하는 풍모가 남아 말 달리고 투계(鬪鷄) 하면서 한 자나 되는 칼을 찼네.
문득 의기투합 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히네.(酒樓茶肆掌一抵), 취한 뒤엔 고담준론,
공자들을 압도하며 한평생 호화로움 언제나 자신하네.(醉後高談凌五公 一生豪華長自恃)’
(주: 조선후기의 하이파이브 모습입니다)
~까만 머리 어른 계집종은 정수리에 동이를 이고/동이가 울며 쏟아지려 하자 머리를 치켜든다.”
어슬렁거리며 주렴 안에 머무네.”
(주: 이 부분은 현대의 전통술집에서도 쓸만한 부분입니다 '등에 별別 자를 썼다는 구절 말이지요)
(요히 아침에 해 뜨는 나라 조선 낭만)
한양시 (19세기전반)의 일부
장할시고. 칠패의 생어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석어·석수어며, 도미·준치·고도어(高道魚)며, 낙지·소라·오적어(烏賊魚)며,
조개·새우 전어로다.
남문 안 큰 모전(毛廛)에 각색 실과(實果) 다 있구나.
청실뇌·황실뇌·건시·홍시·조홍시며, 밤·대추·잣·호도며 포도·경도(瓊桃)·오얏이며, 석류·유자·복숭아며, 용안(龍眼)·협지·당재추로다.
상미전(上米廛) 좌우 가게 십년지량(十年之粮)을 쌓았어라. 하미·중미·극상미(極上米)며, 찹쌀·좁쌀·기장쌀과 녹두·청태·
적도·팥 마태(馬太)·중태·기름태로다. 되를 들어 자랑하니 민무기색(民無飢色) 좋을씨고.
수각(水閣) 다리 넘어서니 각색 상전(商廛) 벌였어라. 면빗·참빗·얼레빗과 쌈지·줌치·허리띠며 총전·보료·모탄자며 간지(簡紙)·
주지(周紙)·당주지(唐周紙)로다'
큰 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 여기로다'
경박하기 측량없다'
ㅇ광통교그림으로 김영택님 가의 그림인데 넘 아름답고 풍성해 옛모습이 그립기도 해 네이버에서 펌햇음
김영택화가님 감사합니다.
글 사진 다 네이버에서 펌 낭만 귀한 그림과 시이므로 인터넷에서 퍼 나름 -
시와 그림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한 정조시대의 인물과 당시의 풍요로운 생활 상을 시 그리고 그림으로 잘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시나 그림이 흔하게 볼 수 없는 것 같아서 역사탐방에 귀중한 자료 같아 펌했습니다
설명이 기나 참고만 하십시요 2015 3 16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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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당시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 낭만님 고맙습니다
좀 어려운 역사공부를 낭만님 덕분에 오늘도 잘 배우고갑니다
역시 낭만님의 역사공부는 수준급이네요...
변함없이 좋은 자료올려 주시는 님께 감사함을 드립니다...늘 건강하시고요...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잘 모르던 역사를 다시 배웁니다.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