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잡다한 외연이 없어 정념을 얻은 까닭’의 일
우리는 법연상인께서 우리를 위해 해석해주신 것에 대해 매우 감사드립니다. 이 단락의 글은 선도대사님의 『왕생예찬』에서 나온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잡다한 외연이 없어 정념을 얻음’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됩니다. 어떻게 오해할까요? 바로 ‘내가 집에서 염불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 당신들이 방해를 하는 게 바로 잡다한 외연이다’라며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기의 코드도 뽑아놓고 ‘나에게 청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방해하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집에 불이 나면 어떡할까요? 불이 나면 불을 꺼야 하겠지만 많은 번뇌가 생기기도 합니다. ‘잡다한 외연이 없다’, 흔히 바깥의 일들이 우리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잡다한 외연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정념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석을 보겠습니다.
이는 타인에게 큰 선이 있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에 겁약함이 없다.
此見他大善,
我心無怯弱也。
무엇을 ‘잡다한 외연이 없다’라고 말할까요? 염불 이외의 잡다한 업과 잡다한 인연(雜業雜緣), 염불 이외의 선행공덕, 이런 바깥의 잡다한 인연들이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것을 ‘잡다한 외연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염불하는 것 이외에 타인에게 큰 선이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보니 아무개에게는 큰 수행이 있고 큰 선행공덕이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그와 같이 해야만 수승한 것이고 그래야만 왕생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은 틀림없이 안 될 거야’,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곧 ‘잡다한 외연’으로 정념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큰 선이 있는 것을 보고도 내 마음에 겁약怯弱함이 없으며 ‘난 당신만 못하다. 나는 왕생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아래에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가령 법승사의 구층탑을 보았을 때,
내가 비록 한 치의 탑도 세우지 못했어도
불안한 마음이 없다.
假令見法勝寺九重之塔,
我雖不立一寸之塔,
而無不安之心也。
법승사의 구층탑은 매우 높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공덕과 능력이 없어서 한 치만큼의 작은 탑조차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층탑을 만든 당신보다 못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구층탑을 세워야 공덕이 있겠지!’라며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결같이 염불하는 까닭에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동대사의 대불을 참배할 때,
내가 비록 반치의 불상도 조성하지 않았으나
비하하는 마음은 없다.
又拜東大寺之大佛,
我雖不造半寸佛,
而無卑下之心也。
왕왕 우리 수많은 사람들은 전수염불을 하지 못하면서 남들이 『능엄주』를 독송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비하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는 『능엄주』도 외울 줄 아는데 난 뭐지? 『능엄주』도 외울 줄 모르잖아!’ 이렇게 스스로 비하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아! 그는 『금강경』을 외울 줄 알지만 나는 한 구절 부처님 명호밖에 부를 줄 모른다. 이것은 수승하지가 않아!’ 이렇게 해서 항상 불안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남들이 경전과 진언을 외우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정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니라 도리어 불안함을 느끼고 비하하는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잡다한 외연으로 정념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염불 이외의 잡행과 잡연을 보고는 마음이 동요되고 흔들려서 정념을 잃게 된다는 것이지요.
전수염불하는 사람은 이렇지 않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불안한 마음이 없고 비하하는 마음이 없으며 겁약한 마음도 없다고 말할까요? 누가 당신의 뒤를 봐주고 있을까요? 또 누가 당신의 용기를 북돋아주셨을까요?
한 번의 칭명으로
위없는 공덕은 얻고 결정코 왕생한다.
이와 같이 결정된 생각을 갖는 것을
‘잡다한 외연이 없어 정념을 얻은 까닭’이라 말한다.
稱名之一念,
得無上之功德,決定往生,
如是思定者,
謂之「無外雜緣,得正念故」也。
이러한 수행을 우리가 비록 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한 번의 칭명으로’ 곧 ‘위없는 공덕’을 얻게 됩니다. 기타 공덕들은 모두 함이 있고 위가 있지만(有爲有上) ‘한 번의 칭명은 위없는 공덕을 얻게’ 됩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내지 한 번만 부르더라도 마땅히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됨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결정코 왕생한다면 또 뭐가 부족하다고 느끼겠습니까? 따라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잡다한 외연이 없어 정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염불하면
아미타불의 본원과 상응하고,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으며,
제불의 증성에도 수순하는 것이다.
如此信者念佛,
與彌陀本願相應,
與釋迦教無相違,
隨順諸佛證誠也。
이처럼 마음속에 정념이 충만하고, 이처럼 믿고 따르며, 이처럼 결정된 생각을 갖고 염불한다면, 아미타부처님의 본원과 완전히 상응하게 되고 의심이 없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면 우리도 이와 같이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과도 전혀 어긋나지 않을 뿐더러 시방제불의 증성(證誠: 석가여래의 말씀이 진실임을 증명함)의 말씀에도 수순하게 되지요. “아무개님, 당신이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합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어떠한 의혹도 동요도 없습니다.
‘잡다한 외연이 없어 정념을 얻게 된다’는 것은, 당신이 육자명호의 공덕대보功德大寶를 얻어야만 비로소 ‘잡다한 외연이 없어 정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본인에게 돈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돈이 있는 것을 보면 침을 흘립니다. 따라서 그더러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본인에게 돈이 아주 많다면 남에게 돈이 많은 것을 보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대부호가 남의 손에 있는 감자나 고구마를 보더라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일 육자명호의 공덕을 얻고 육자명호가 위없는 공덕의 법보임을 안다면, 남들이 어떠한 수행을 하더라도 당신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니보주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니보주는 어떤 보주(보배구슬)일까요? 이 보주는 작은 구슬인데요, 당신이 이 보주를 향해 “난 오늘 황금 백 톤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바로 비가 내리듯이 황금 백 톤을 뿜어냅니다. 이 보주를 여의보주라고도 부르는데 당신의 뜻에 맞게 당신이 무엇이 필요하면 무엇을 비 내리고, 당신이 얼마가 필요하면 당신에게 얼마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여의보주라고 부릅니다. 쌀이 필요하면 쌀을 주고 가구가 필요하면 가구를 줄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이런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신선에게 작은 대나무 통 하나가 있는데 이 대나무 통은 보물이어서 필요한 건 무엇이든 다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매일매일 이 보물을 얻고 싶어서 오랫동안 생각했었는데 꿈속에서도 그것을 얻고 싶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얻었습니다. 그게 바로 육자명호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이 강당은 하나의 큰 보배창고인데, 이속에는 각양각색의 잡보雜寶들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도 있고 루비도 있고 에메랄드도 있고 진주·황금·백은·적주·마노 등등도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온 방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때 한 가난한 사람이 걸어 들어와서 문을 열어보자마자 “와!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있다니!”라고 말하면서 두 눈에서 방광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많은 돈을 본 적이 없었기에 서둘러 두 손으로 막 집어 들고 도망을 칩니다(남에게 잡힐까봐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보물들 중에 아직 가장 중요한 보물 하나가 남았는데 그게 바로 마니보주입니다. 이 보주가 방광을 하고 있지만 그는 이것을 집어 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설사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황금을 백 킬로·이백 킬로를 짊어지고 나가더라도 아주 빨리 다 쓰게 될 것이고, 다 쓰고 나면 또다시 가난뱅이가 될 것입니다. 만일 이 마니보주를 손에 넣었다면 다른 물건들은 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 마니보주는 휴대하기가 편리할 뿐더러 필요한 건 무엇이든 나옵니다.
이 마니보주는 아미타부처님의 육자명호의 공덕을 대표하고, 기타 여러 가지 수행은 단지 황금·백은·진주·마노의 공덕에 불과하여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의 칭명으로 위없는 공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이 닦는 여러 가지 수행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마니보주를 손에 넣은 사람이 ‘나에겐 마니보주가 있다. 그러나 옆집 왕아무개에게는 괜찮은 금반지가 있는데 나에겐 아직 없다……’며 부러워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이 금반지가 필요하다면, 열 개가 필요하면 바로 열 개가 나오고, 백 개가 필요하면 백 개가 나옵니다. 만일 그가 여전히 부러워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마니보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잡다한 외연이 없어 정념을 얻는다’고 말했는데,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남들이 구층탑을 쌓고 대불을 조성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구층탑과 대불을 만든 사람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결국 우리 모두 전도되었습니다. 큰 탑을 만든 사람이 고개를 높이 들고서 “염불만 할 줄 알면 어떡합니까? 당신은 나를 부러워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속아서 도리어 그를 부러워하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전도되었습니다. 탑을 만든 사람은 마땅히 염불하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하고, 염불하는 사람은 편안히 앉아서 전수염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전수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할 테니까요!
방금 우리가 말씀드렸듯이 당신에게 비록 황금 한 덩어리와 백은 한 덩어리가 있더라도 당연히 마니보주를 갖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어떻게 마니보주가 있는 사람이 당신을 부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과시를 하고 있습니다. 마니보주가 있는 사람은 매우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마니보주는 자신의 몸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마니보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좀 벌었다고 메이커 옷을 사 입고 예쁜 구두를 사 신고는 마니보주를 갖고 있는 사람 앞에서 자랑합니다. “이 옷을 보세요! 단추 하나에 오만 원짜리입니다. 그리고 이 옷은 메이커입니다……” 이렇게 과시를 합니다. 그는 진정한 대부호는 마니보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은 겉모습이 꼭 큰 학문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한 구절 부처님 명호만 부를 줄 압니다. 그 사람이 달려와서 “보세요, 당신은 한 구절 명호밖에 부를 줄 모르지만 나는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기에 당신보다 훨씬 낫습니다”라며 과시합니다. 우리 염불하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맞습니다. 당신의 수행은 매우 훌륭합니다! 당신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염불을 하겠습니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깊이 숨기고 드러내질 않습니다.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은 법에 대해 인색해서가 아니라 그의 현재 근기와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근기와 인연이 성숙했다면 마니보주를 그에게 주면서 “당신에게도 하나 드릴게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