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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1일
말씀: 창 18:16-21
제목: 잠행의 삶
우리가 가야할 나라, 그 나라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 문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고 동일하게 부활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인으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인가? 그러면 우리가 죽어서만 확인해야 될 나라가 하늘나라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늘나라를 우리가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믿고 그 나라를 보지 않으면 우리의 삶의 최종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삶을 방탕의 삶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방탕의 삶은 시간을 허비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우리가 살아가야할 목적지의 길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를 보고 준비하는 삶은 어떤 삶이냐하는 것인데요, 관점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은 바로 잠행의 삶이요 암행의 삶입니다. 암행과 잠행을 이렇게 구별해 봅시다. 성경에는 없는 단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요즘 ‘잠행’이란 단어를 기독교에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暗行御史는 왕이 특별한 임무를 주어 지방에 몰래 파견한 관리입니다. 潛幸이란 임금이 비밀리에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나들이 하는 것이 잠행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비밀리에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여기서 정리를 좀 하자면,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은 잠행으로 이해하고, 그 잠행을 통해 깨닫게 되고 보게 된 것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암행으로 이해하고 함께 설교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잠행을 성경을 통해 비추어 계속 찾아볼 텐데요, 창18-19장에서 보면 잠행과 암행을 잘 설명해 놓고 있는 말씀입니다. 창18장1절에서, 세 사람이 나타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분은 하나님이요, 두 사람은 천사라고 이해하셔야합니다. 왜냐하면 19:1절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라고 기록된 것으로 인해 한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잠행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분들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대접을 하지요. 하나님이 잠행으로 나타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그 계획들을 말씀하셨습니다. 17절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멸하시려는 계획을 숨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18,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즉 첫 번째,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택한 민족 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뿐 아니라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아브라함(18절)에게는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는 것’(19절)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자식과 후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과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심판이 없는 구속은 의미가 없으며, 구속이 없는 심판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요 5:29;롬 5:9) 하나님께서는 구속과 심판,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함으로써(요 3:18) 오고 오는 그 모든 후손들이 소돔의 멸망을 경고로 삼아 축복받는 구속의 길을 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 잠행해서 오신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이 땅에서 살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신 내용이 바로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행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이 계획을 암행의 삶으로 이 땅에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말씀하는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잠행으로 오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뵙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알고 나서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에서 시작해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남아 있을 때, 그 성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는 중보기도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행으로 오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고 간구하는 중보기도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중보자의 사명이 잠행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암행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잠행을 상대방이 모르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획과 비밀을 알고 첫째, 축복의 원리를 알게 되며, 둘째, 구속의 원리를 알게 되며, 셋째 중보자의 사명을 알게 되어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암행의 삶을 통해 고통 받은 심령들, 허망함과 정신분열과 공허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죄악 속에 젖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알리며 구원하는 일을 감당해야할 사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를 깨달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암행어사가 나타난 고을에 백성들이 억압과 고통 받고 있습니다. 사또의 잔인성이 극에 달아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암행어사’가 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용기가 생기고 힘이 나고 사또와 맞설 담대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이 믿은 자들에게는 지금이 핍박과 환란 속에 있다하더라도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인해 죽음의 순간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하나님나라가 임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나라를 보게 되면 지금 삶을 이길 수 있고 어떤 어려움과 상황에서도 해쳐나갈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선진들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나라,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던지신 첫 번째 메세지가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그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오는 것입니까? 눅17:20-21절에 보면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가운데는 헬라어 ‘entos’인데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안에’(within)라는 뜻입니다. 이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내면(마음)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둘째는 ‘사이에’ 혹은 ‘가운데’(among)라는 뜻입니다. 이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 사이에, 즉 인간관계(혹은 공동체) 속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즉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면,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임한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등)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 나라가 거기에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며, 통치영역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행의 삶이며, 암행의 삶입니다. 즉 하나님나라가 잠행해서 왔습니다. 그 나라를 알고 우리는 암행의 삶을 살며 그 비밀을 알고 살아가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세 가지 삶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의 임함은 표가 안 나게 임합니다. 나약하게 임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보고 아는 자는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후5:1절‘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장막 집은 여기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이 땅이 영원하지 않고 완전한 곳이 아님을 잠행을 통해 즉 사인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최봉기교수님이 우리에게도 사인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런 관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한 이 세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의 죄악 된 죄악이 들어왔고 그 죄악이 주도하고 있는데 하나님나라를 통해 그 죄악들이 물러가고 있고, 이제 완성할 나라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죄악 된 삶에서 하나님이 완성한 나라의 삶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장막이란 지금 썩을 육체 속에 거하는 우리의 모습을 빗대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장막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추측컨대 이스라엘백성들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장막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기업으로 그 땅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 40년의 광야의 삶은 부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저들이 광야에서 우상숭배 하다가 죽고, 간음하다가 죽고, 주를 시험하다가 죽고,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죽고 20세 이하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를 통해서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광야의 과정 속에서 저들이 무엇을 배웠습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고 인생을 통하여 이 세상이 얼마나 거짓 된 곳인지 우리는 분명히 확인합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시각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장막이 얼마나 멋있느냐 하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말입니다. 내 텐트가 네 텐트보다 좋다는 것은 그 하루 동안 자는데 더 편할 수 있고 더 멋있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랑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사다리가 얼마나 멋 있느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지요. 그 사다리를 타고 어디를 갔느냐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 장막의 장식에 넋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텐트를 보지 말고 그 텐트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봐야합니다. 즉, 그 텐트를 치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하는, 그 방향과 목적을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텐트를 갖고 다녀야합니까? 텐트장수도 아니고, 지금 어디를 가기 위해 텐트를 치고 다니느냐는 말입니다.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영원한 나라에 가기 위해서 텐트를 치고 있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의 삶은 암행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나라에 대한 비밀을 가지고 암행으로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암행으로 몰래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모르고 구원과 생명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지금 하나님나라가 와 있다는 것을 말하는 삶이 하나님나라의 잠행을 통해 암행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그리고 위기 때마다 또는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갈 때마다 이 암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것을 우리는 아셔야합니다. 먼저 예를 들면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430년 동안 노예로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 것을 아십니까?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만연할 때까지 죄가 찰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죄가 무려 익어서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어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430년 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진행되고 있었고요, 모세를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시대적 역사를 통해 암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의 암행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니엘 9장을 보면 1-2절은 역사적인 배경을 말합니다. 3절에서 20절까지는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고 귀한 깨달음을 얻은 후 이 깨달음을 근거로 하여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 2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다니엘에게 알려 주시는 특별한 계시인데요, 이런 과정이 암행의 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암행의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을 근거로 했습니까?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며 바벨론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으로 인해 다니엘이 기도를 방해하고 그 계략이 있음을 알고도 계속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이제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주셨던 예언대로 정확히 무너지고 세계의 패권은 메대와 바사 제국에게 넘어갔습니다. 이때 통일 바사 제국의 첫째 왕이 바로 그 유명한 고레스 왕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의 힘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또는 그 엄청난 형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와 믿음을 온전히 지키는 힘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다니엘9:2절에서 다니엘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적 특징이 있다면 묵상과 기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교통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을 알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니엘이 암행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다니엘이 세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소영웅주의로 산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심을 분명히 보여주셨고 또 그들은 암행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시대에 대표적인 것이 디아스포라 현상입니다. 이 디아스포라 현상에서 암행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부분이 회당인데요, 먼 외국에서 성전 제사 대신 회당을 사용하여 예배한 사실입니다. 회당을 사용한 유대인들이 제사형식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어짐에 따라 말씀을 통해 선교적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회당 예배는 결국 신약시대를 준비한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암행의 삶을 통해 세계적으로 복음의 삶을 여는 계기가 된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의 경우 회당은 유대인 전도의 최적지가 되곤 했습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울의 선교 전략은 회당 사용의 기득권을 최대한도 활용하여 유대인들에게로 복음을 전한 후 거기에서 믿기로 결심한 개심 그룹을 핵으로 교회를 시작한 일입니다. 실로 회당 전도야말로 바울 선교의 요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바벨론포로생활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신약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시는데 중요한 역할을 회당이었고 그 랍비를 통해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들을 교육시켰던 것입니다. 랍비제도를 통해 암행의 삶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하면 바로 이스라엘이 망하고 전 세계로 흩어졌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즉 하나님이 암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해 오셨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양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박해를 피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가 잠행한 것을 알고, 암행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64년 네로 황제의 차하에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311년 디오클레티안 갈레리우스황제 치하까지 약250년 동안 고난과 핍박을 받으며 암행의 삶을 살았습니다. 즉, 핍박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으며 어떻게 이 역사를 이끌고 갔던가를 알면 오늘날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박해를 당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숨잖아요,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의 복음 확산이 중단된 것이 아닙니다. 로마는 3%의 기독교인으로 인해 결국 로마는 국교화가 된 것입니다. 물로 정치적인 관계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이 일하심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혁명 이후에 선교사들은 다 쫓겨 나가고 목사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사형을 당하며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제 중국에는 복음 확산이 중단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가정교회를 통해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하에서 암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심의 증거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잠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한 사실을 알고 본자들은 암행의 삶을 통해 그 나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하느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고 축복의 원리와 구속의 원리의 비밀을 알고 중보기도로 반응한 것처럼,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난 후 중보기도로 나라를 구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알고 깨닫는 자를 통해 중보자적 사명자로 반응을 하고 적용하는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비밀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하나님나라의 잠행을 통해 우리가 암행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이제 계속해서 말씀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고 또 그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이며, 우리가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그 나라를 소유한 백성으로서 얼마나 위대한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고 영광의 일인지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