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했던 그는 약소국 한국의 입장을 듣지 않았다
(5) 리지웨이의 빛과 그늘
중공군이 두려워 한 지휘관
리지웨이 장군이 수류탄을 상의 한 쪽에 매달고 다녔다는 점은 앞에서 먼저 얘기했다. 일부 한국군 장성들도 그를 흉내 내 수류탄을 상의에 달았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러나 그런 한국군 장성들이 간과한 게 있다. 리지웨이가 수류탄을 매단 다른 한 쪽 상의에는 붕대가 달려있었다는 점이었다.
전선의 최고 지휘관이 상의에 매단 수류탄은 적의 공격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상징하는 장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류탄 못지않게 붕대도 중요하다. 리지웨이의 상의 다른 한 쪽에 동그랗게 말린 형태로 달려 있는 붕대 역시 막바지 싸움의 현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상징적인 물품이었을 것이다.
중공군이 두려워 한 지휘관
리지웨이 장군이 수류탄을 상의 한 쪽에 매달고 다녔다는 점은 앞에서 먼저 얘기했다. 일부 한국군 장성들도 그를 흉내 내 수류탄을 상의에 달았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그러나 그런 한국군 장성들이 간과한 게 있다. 리지웨이가 수류탄을 매단 다른 한 쪽 상의에는 붕대가 달려있었다는 점이었다.
전선의 최고 지휘관이 상의에 매단 수류탄은 적의 공격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상징하는 장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류탄 못지않게 붕대도 중요하다. 리지웨이의 상의 다른 한 쪽에 동그랗게 말린 형태로 달려 있는 붕대 역시 막바지 싸움의 현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상징적인 물품이었을 것이다.
- 1951년 4월호 라이프지 표지에 실린 리지웨이 장군. 양쪽 가슴에 수류탄과 붕대가 달려 있다.
거대한 병력과 물량, 화력을 동원해 적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그런 타입의 지휘관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우직하다기보다 영리했다. 적도 잘 읽었고, 그가 한국 전선에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워싱턴의 육군본부 분위기도 매우 정교하게 읽었다.
중공군은 그런 리지웨이에게 커다란 약점을 읽혔다. 그것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한국 전선에 뛰어든 뒤 보였던 공격의 ‘주기(周期)’였다. 일종의 패턴이랄 수도 있었다. 중공군은 공세를 강하게 펼치다가도 그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길어야 1주일 남짓이었다. 대부분 5~8일 정도 공세를 펼치다가 계속 끊겼다. 보급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였다.
리지웨이는 그 점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가 부임한 이후 북위 37도 선에 최후 저지선을 정한 다음 반격을 펼치는 과정에서 이는 아주 큰 관찰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이는 사실 한반도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들은 ‘보급’을 제대로 이해한 군대가 아니었다.
- 중공군에 대한 총 반격을 진행 중이던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오른쪽에서 셋째)이 당시 미 주요 지휘관과 국군 일부 장군들을 여주로 불러 작전회의를 마친 뒤 기념촬영했다. 오른쪽에서 다섯째가 백선엽 장군.
중공군 지휘부의 회고록 등을 보면 리지웨이의 전법에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상당히 잘 드러난다. 그들은 대개 리지웨이의 전법을 강한 결집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성(磁性)’이라고 표현했으며, 강력한 공격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불바다, 즉 ‘화해(火海)’라고 적었다.
교통사고 당한 내게 “지금 뺄 수 없다”
실제 싸움을 독려하는 리지웨이의 자세는 뭔가 달랐다. 그는 부지런히 전선을 다니면서 일선 부대의 싸움 의지를 부추겼다. 자유와 민주라는 거창한 이념적 메시지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적을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 역설하고 다녔다. 이는 무너진 유엔군 전선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의 반격 작전에 따라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제법 심각한 사고였다. 나는 한강 남안을 공격하던 무렵 부대를 찾은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과 함께 미 1군단 사령부로 향하고 있었다. 지프차 앞자리에 신 장관이 앉았고 나는 뒤에 있었다. 지프는 앞에 있던 미군 트럭을 비켜 지나가려다가 뒤집혀졌다.
- 백선엽 장군이 1.4후퇴 후 수원에서 반격전을 펼칠 때 당한 교통사고 사진. 백 장군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 사진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누군가가 찍었다.
그러나 리지웨이의 반응은 단호했다. “지금은 전선에서 사단장을 뺄 때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전선에 나가 계속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허리의 통증이 심했지만 역시 전선에서 내가 빠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싸울 수 있다”고 얘기했고, 리지웨이는 ‘그래, 그래야지’라는 표정으로 만족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 1951년 3월15일 신성모 국방장관(왼쪽에서 둘째)이 서울 탈환을 위해 흑석동에서 마포로 건넌 뒤 작전을 수행한 국군 1사단 장교들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 끝이 백선엽 당시 1사단장.
중공군에게 서울을 내준 1.4 후퇴 과정에서 나는 국군 1사단장으로 임진강 유역을 지키다가 후퇴한 적이 있다. 앞에서도 적은 내용이다. 리지웨이가 그 때 국군 1사단에 와있던 미 고문관에게 “백 사단장이 후퇴할 때 정위치에 있었느냐”를 물었던 점, 그리고 수원에서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다시 전선에 서도록 한 점이 아마 그가 거론한 ‘가혹한 검증’에 들어 있었던 체크 리스트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런 그의 단호한 자세는 전선에서 아군의 활력을 결집해 일으켜 세우는 데 아주 그만이었다. 리지웨이는 부지런히 전선을 돌아다니며 사기를 진작하는 한편, 미군 화력을 모두 동원해 전선을 뒷받침했다. 그런 그의 면모가 적군인 중공군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성(磁性)’과 ‘화해(火海)’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미미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미국 정부가 보낸 군인으로서의 프라이드가 강했다. 지나칠 정도였다. 오만(傲慢)으로 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자신이 돕는 한국에 대한 편견(偏見)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공산 측과 첫 휴전회담을 벌일 때였다. 앞에서도 소개했던 내용이지만 그는 회담장에 자주 날아왔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으면서도 처음 벌어지는 휴전회담에 그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아군의 회담 대표단이 개성으로 향하기 전 지금의 판문점 남쪽에 있는 자유마을에 찾아와 자주 회의를 소집했다.
-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3일 미군 관계자들이 임진강 부교를 수리하는 모습. 유엔군 정전 협상단이 개성 회담장으로 가려면 매일 이 다리를 지나야 했다./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아울러 그는 우리 회담 대표단에게도 자주 그런 메시지를 던졌다. 대표단과 사전에 회의를 할 때도 리지웨이는 “우리는 세계 최강이다. 상대에게 절대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주문했다. 아울러 “미국은 세계 최고의 나라다” 등 표현은 리지웨이가 작전 지시 등을 내릴 때 자주 떠올리던 말이었다.
그런 리지웨이가 이승만 대통령과 잘 맞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강한 자부심을 내세우며 미국 정부의 이익만을 위해 한국 전선을 ‘제한적으로 관리’하려던 리지웨이와 남침을 감행한 공산 측과 끝까지 싸워 분단된 조국의 상처를 일거에 만회하려던 이승만 대통령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기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리지웨이를 비롯한 미국의 수뇌부가 공산 측과 휴전회담을 벌이면서 한반도 전선을 미봉(彌縫)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크게 반발했다. 이 대통령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북진해서 통일을 이루자”였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런 호소였다. 김일성의 야욕 때문에 뿌려진 피와 눈물을 따져볼 때 특히 그랬다.
그러나 전선은 냉정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제한적인 관리 방침은 더 확고해져갔고, 공산 측도 휴전을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가 그런 모든 상황에서 주(主)를 형성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군 지휘관으로서 큰 자부심에 젖어 있던 리지웨이는 그런 틀을 견고하게 쌓아갔다. 상황을 되돌리기에 대한민국의 힘은 아주 미미했고, 미국은 아주 강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