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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7월 20일 월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아폴리나리스 주교 순교자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걸으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하리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사람아,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말씀하셨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4.6-8
1 너희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너희는 일어나 산들 앞에서 고소 내용을 밝히고
언덕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여라.”
2 산들아, 땅의 견고한 기초들아, 주님의 고소 내용을 들어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고소하시고 이스라엘을 고발하신다.
3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무엇으로 너희를 성가시게 하였느냐? 대답해 보아라.
4 정녕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고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구해 내었으며
너희 앞으로 모세를, 아론과 미르얌을 보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7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8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2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억측을 늘어놓더니(마태 12,24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함께 다가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분의 놀라운 행위들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12,28 참조). 그러나 그들은 이를 보고도 못 본 척하며, 계속해서 그 정당성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12,39) 여기서 ‘절개 없는’으로 옮긴 그리스 말 ‘모이칼리스’는 본디 ‘간음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신의를 저버린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입술로는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내놓으라며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간음’에 빠진 그들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시험하려 들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의를 잃고 눈이 멀어 버린 인간은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하늘의 표징’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39). 요나의 기적은 죽음 너머의 생명, 곧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이 표징을 삶으로 받아들이려면 그저 기적을 구경하는 ‘관객’의 자리에서 벗어나 참된 회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 구원 드라마의 서막을 알리는 이들이 바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우리 각자는 니네베인 동시에 요나 예언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를 언급하시며 우리에게 즉각적인 회개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요나가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데, 그 사명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대 제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라는 것입니다.
당시 니네베는 최첨단 국제도시로서, 오늘날로 치면 뉴욕이나 파리, 도쿄나 서울 정도 되는 도시였습니다. 더구나 니네베는 이스라엘 백성이 혐오하고 적대하던 도시였습니다.
요나는 주님께서 주신 소명, 니네베로 가라는 요청이 너무 두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그분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마음에 주님을 피하여 멀리 도망을 갑니다. 요나가 생각하길 가장 먼 곳은 타르시스였습니다.
타르시스는 오늘날 스페인 남서부 과달키비르 강 어귀에 있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니네베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에 반대 방향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인간이 주님을 피해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요나는 주님을 피해 도망간 대가를 톡톡히 치른 다음, 그분 손에 붙잡혀 니네베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휴양이나 관광차 그곳으로 죽을 고생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그 광대무변한 대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외쳐야 했습니다. 무엇을? 칭찬과 격려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신하, 백성들이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피눈물 날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멸망할 것이라고. 이른바 심판 설교입니다.
사실 니네베는 기원 전 612년 메디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경 집필되었습니다. 그러니 니네베가 멸망하고 한참 뒤 3-400년이 흐른 뒤 쓰인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서는 역사서라고 분류할 수 없습니다.
비록 니네베는 멸망했지만, 오늘날 또 다른 니네베가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이 저지르는 죄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장소라면, 그곳이 바로 니네베입니다.
니네베는 내 안에도 있고, 가까운 이웃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학교, 직장, 교회에도 존재합니다. 자신의 삶을 자유롭고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억압과 부자유, 폭력과 파괴가 만연하다면, 그곳이 바로 이 시대 니네베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요나인 우리 각자를 향해 외치십니다. “일어나 니네베로 가라!” 하느님의 명령은 단호합니다. 두렵고 부담스럽지만, 요나는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니네베로 갔습니다.
요나는 내 외침이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자신의 등 뒤에 서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굳게 믿으며 니네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그 악의 구렁텅이에서 일어서라고.
오늘 우리 각자는 니네베인 동시에 요나 예언자입니다.(안드레아 수바르츠, 요나와 함께 걷은 40일, 바오로 딸 참조)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들의 집이나 사업체를 축성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자주 떠올리는 시편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우리는 노력하고, 계획하고, 땀 흘리며 살아갑니다. 집을 마련하고, 사업을 시작하고, 자녀를 키우고, 공동체를 세워 갑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모든 일의 마지막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일이 잘되면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남을 탓 하기보다 먼저 나를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동차 검사를 받으라는 우편물이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보험증과 면허증을 챙겨 동네 정비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렵고 내일 오라고 했습니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교우분이 하시는 정비소에 연락했더니, 사장님께서 조금 늦었지만 오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보험증과 차량 정보를 보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이 차는 올해 검사받지 않아도 됩니다. 새 차는 2년 동안 검사가 면제됩니다. 내년에 오시면 됩니다.” 저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2024년에 차를 샀지만, 차량 모델이 2025년이면 2025년 차량으로 적용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괜히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무장도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도 하나의 ‘수업료’였습니다. 우편물을 조금 더 꼼꼼히 보았더라면, 먼저 확인했더라면 발품을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덕분에 하나 배웠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도 배웠습니다. 우리 삶에는 때로 헛걸음처럼 보이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헛걸음도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더 차분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미안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일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겸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겸손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운전으로 말하면 ‘준법 운전’입니다. 신호를 지키고, 속도를 지키고, 법규를 지키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머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겸손은 계명을 지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계명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운전으로 말하면 ‘안전운전’입니다. 법적으로는 내가 먼저 갈 수 있어도, 급하게 가려는 차에 길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하기 전에 충분히 쉬는 것도 안전운전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부를 묻고, 찾아뵙고,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계명의 정신입니다. 세 번째 겸손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과 불편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운전으로 말하면 ‘양보 운전’을 넘어 ‘사랑의 운전’입니다. 짐을 들고 힘들게 걸어가는 어르신을 보면 잠시 멈추어 도와드리는 마음입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받아들이고, 불편함도 받아들이고, 때로는 억울함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물이 아닙니다. 많은 말도 아닙니다. 공정을 실천하는 삶, 신의를 사랑하는 삶,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밖에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하느님의 뜻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니네베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난 뒤에 요나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합니다. 요나의 표징은 단순히 큰 물고기 배 속에 사흘 동안 있었다는 기적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도망치던 사람이 다시 돌아서는 표징입니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가장 큰 표징도 놀라운 기적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표징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 삶, 죄인들을 용서하신 삶, 병자들을 일으키신 삶, 십자가를 지고 가신 삶, 그리고 부활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삶이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런 표징이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하느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산상설교는 세 번째 겸손으로 살아가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모욕과 박해를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작은 헛걸음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수고를 할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착오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불평으로 끝나면 그것은 시간 낭비가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내가 배울 것을 찾고,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면 그것은 수업료가 됩니다. 신앙인은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일도 은총의 자리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요나의 표징이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참된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 12,38ㄴ)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39ㄴ)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
나의 무엇이
아니라
나를
믿고
바라고
사랑하듯
나의 무엇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바라고
사랑합니다
오늘의 성인
성 엘리야 (Elijah)
활동년도 : +9세기경BC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앨리아, 엘리아스
성 엘리야(Elias)는 기원전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예언자이다. 히브리어 이름의 어원적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이다. 구약성서(1열왕 17-19장, 21장; 2열왕 1-2장)에서는 엘리야를 제자인 엘리사(Eliseus, 6월 14일)에 비해 비교적 덜 관대하게 소개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활동 시작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엘리사와는 달리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은 이야기도 전하지 않고 생애 마지막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대기(21,12)에서는 그의 활약을 아예 언급하지 않으면서 엘리야가 왕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만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적 전승(말라 3,23)이나 지혜 전승(집회 48,1-11)은 이스라엘 후기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영성에 있어서 핵심 인물로 누린 명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는 시종일관 ‘티스베 사람’이라고 불렸는데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칠십인역에서는 요르단 강 건너편 북쪽에 있는 한 지역, ‘길르앗의 티스베’(1열왕 17,1)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히브리어 구약성서인 마소라 본문은 엘리야를 ‘길르앗의 거류민’이라고 하며 ‘티스베’라는 곳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엘리야 자신에 관한 역사적인 모습은 기적적인 전설들 속에 감추어져 있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조차도 그의 열성을 반영하는 가명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엘리야 이야기들의 구조와 세부 묘사들은 예언 말씀, 엘리야의 소명, 그리고 모세의 전승과 연결되고 예언 계승에 대하여 잘 발전된 신학적 사고를 밝히고 있다. 엘리야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 안에서 흥미를 끄는 특성으로 묘사되었다. 즉 엘리야는 야훼 신앙 수호의 영웅으로, 진실한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예언자이며 왕가의 압박에 저항하며 살아있는 신앙을 수호한 예언자라는 것이다.
구약 후기 중간 시기 문헌과 랍비 전승에서는 엘리야가 이 세상에서 신비하게 사라진 것에 대해 미래의 하느님 승리의 날에 유일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말라기 3장 23-24절에서는 그가 주님의 날의 선구자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랍비들의 율법 논쟁을 해결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엘리야가 메시아 전승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선구자로 여긴다. 이러한 점이 후기 유대 전승에서 약화되었다 할지라도 널리 퍼진 이 특징의 대부분은 열왕기(1열왕 17장) 이야기들의 영향이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사회악과 싸우며 불의한 이를 징벌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전설의 인물로 남아있다. 그는 중세 민속학에서는 방랑하는 유다인으로 여겨졌고, 유월절 식탁에는 그를 위한 자리가 ‘엘리야의 잔’과 함께 항상 마련되었다. 그는 새로운 탄생의 보호자로 여겨졌으며 ‘엘리야 의자’는 할례식에 고정되어 있다. 엘리야는 이슬람교 전승에도 강하게 남아있다. 코란에 엘리야는 ‘정의로운 사람들’ 명단에 들어가 있으며, 바알 숭배를 철저하게 적대시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으로 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여러 문맥에서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전승에서 착상하여 “먼저 엘리야가 와야만 한다”고 말한다(마르 9,11; 말라 3,23-24 참조). 또한 엘리야가 불행한 이들을 위하여 호의적으로 개입할 것(말라 15,35-36 참조)을 기다리는 민간 신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루가 전승에 의하면, 예수를 새로운 엘리야라고 하였다. 예수는 엘리야를 언급하며 자신의 고유 임무를 규정하였다(루가 4,25-26). 요한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새로운 엘리야로 보았다(요한 1,21. 25). 이 전승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나타난다. 엘리야처럼 세례자 요한은 모든 것을 새로이 세우고 또 엘리야처럼 권력가와 충돌하였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가 열렬하여 응답을 받은 그리스도인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야고 5,17-18).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무엇보다도 엘리야의 특징적인 모습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대중의 의견은 예수를 이 모습과 동일시하고, 반면에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동일시한다. 엘리야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 때 모세와 함께 예수의 곁에 있었다. 만일에 모세가 율법을 떠오르게 한다면 엘리야는 예언자를 떠오르게 한다(마태 5,17).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신분 : 베드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라벤나(Ravenna)
활동연도 : +1/2세기경?
같은이름 : 아뽈리나리스
성 아폴리나리스의 이름은 이탈리아의 라벤나 근교에 있는 산 아폴리나리스 인 클라세(San Apollinaris in Classe) 대성전의 묘비명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같다.
그러나 그가 언제 순교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단지 1세기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라벤나의 주교였던 성 베드로 크리솔로구스(Petrus Chrysologus, 7월 30일)의 “설교집” 128장이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나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주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7세기에 기록된 행전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Petrus)에 의해 라벤나의 초대주교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는 라벤나의 초대주교로서 약 26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여러 기적을 행하였으며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우상숭배자들에게 엄격했다고 한다. 박해자들로부터 혹독한 폭행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뒤에도 계속해서 라벤나 근교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는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7월 23일 순교하였다.
그의 축일은 현 로마 가톨릭 전례력에서 7월 20일(이전 7월 23일)로 변경하여 경축하고 있다.
성녀 마르가리타(마리나)Santa Marina (Margherita)
성인의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성인의 활동연도 : 연대 미상
성인과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그녀는 원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살던 어느 이교 사제의 딸이었으나, 어느 크리스챤 유모 밑에서 자라났다.
이리하여 크리스챤이 된 그녀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을 나와서 자기 유모와 함께 양을 치며 살았다.
그러나 그 지방의 장관인 올리브리우스가 우연히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높은 지식을 보고는, 자기 아내와 이혼하여 결혼코자 하였다.
그녀는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않자, 이윽고 크리스챤이란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용으로 변한 사탄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몰렸을 때, 항상 품고 다니던 십자가로써 극적으로 퇴치하였다. 그 후 그녀는 수많은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그녀의 용덕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마음으로 크리스챤이 될 각오를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참수치명하였는데, 실제로 그녀의 죽음은 그 지방에 수많은 개종자를 낳았던 것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위대한 순교자 마리나"라고 기술한 뒤에 마르가리따의 행적이 나온다.
그러나 마르가리따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름이며, 쟌다크에게 계시를 준 성녀이다
확실한 연대는 모르나 이는 아마도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때인 307년 경이었으리라.많은 시인과 문인들이 박해의 광풍에 휩쓸려 사라진 꽃 마르가리타의 장렬한 최후를 아름다운 말로 그려냈으며, 각 지방에는 그녀에게 봉헌된 성당이 많이 건립되었고, 많은 부인들은 그녀를 수호 성녀로 삼아 영구히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 안티오키아
오늘은 굳건한 신앙으로 사탄을 물리치는 성녀!! 안티오키아의 마르가리타 성녀에 대해 성인들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황금전설’에 근거해 주요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마르가리타는 안티오키아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의 이름은 테오도시오로서 이교도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은 유모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 교육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마르가리타가 15살쯤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양떼를 돌보고 있는 유모와 함께 초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는데 올리브리오라는 그 지방의 총독이 그곳을 지나다가 곱디 고운 마르가리타를 보고는 부하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처녀가 귀족이면 내 신부로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정부(情婦)가 되게 할 것이다.”
사령관에게 불려간 마르가리타는 이름과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 교인임을 당당히 밝혔다고 해요.
이교도인 총독은 소녀가 귀족 처녀라는 사실과 이름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녔음을 놀라워하면서 그런 여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르가리타는 총독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영광에 대해서 읽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용기있게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영원한 삶을 위해 부활하셨음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이처럼 당당한 처녀의 답변에 화가 난 총독은 마르가리타를 감옥에 투옥시키라 명했으며 다음날 그녀를 관청으로 불러 심문했지요.
“어리석은 소녀여, 네 아름다움이 아깝도다. 우리들의 신을 믿으면 너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인데 그리 함이 어떠한가?”
마르가리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땅과 바다와 모든 창조물을 떨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저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저 역시 그분을 위해 죽기를 희망합니다.”
올리브리오 총독은 그녀를 형틀에 묵어서 몸을 쇠스랑으로 찍는 등 모진 고문을 가했고, 마르가리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마르가리타는 하느님께 자신이 싸우고 있는 적, 즉 사탄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거대하고 흉악한 용이 나타났는데 마르가리타가 성호를 긋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르가리타를 그린 그림에서 용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으로 성호경을 긋자 용이 사라졌다는 일화를 암시하기 위함인 듯 십자고상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