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음 모음의 순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자모의 순서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자음부터 보기로 한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자음의 순서 곧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는 얼핏 보아도 훈몽자회의 배열 순서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에 제시된 초성과 중성에 통용되는 8자를 앞에 배치하고, 초성에만 쓰이는 8자 중 없어진 반치음 시옷(ㅿ)과 빈 소리를 적는 ㅇ을 뺀 나머지 글자를 뒤이어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초성에만 쓰이는 ‘ㅋ ㅌ ㅍ ㅈ ㅊ ㅎ’ 을 그대로 뒤에 가져오지 않고 ‘ㅈ ㅊ’을 ‘ㄱ ㄴ ㄷ ㄹ ㅂ ㅅ ㆁ’ 뒤에 갖다 놓은 점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최세진은 어떤 생각에서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그리고 ‘ㅋ ㅌ ㅍ ㅈ ㅊ ㅎ’의 순서로 배열한 것일까? 이는 훈민정음 해례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에서는 글자의 배열 순서를 그 소리가 나는 조음 위치(調音位置)와 가획(加劃)의 원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배치하고 있다.
어금닛소리 ㄱ ㅋ ㄲ ㆁ
혓소리 ㄴ ㄷ ㅌ ㄹ
입술소리 ㅁ ㅂ ㅍ
잇소리 ㅅ ㅈ ㅊ ㅿ
목구멍소리 ㅇ ㆆ ㅎ
이 표를 보면 최세진은 초성과 종성에 함께 쓰이는 8자인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의 배열은 훈민정음 해례에서 배치한 어금닛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잇소리, 목구멍소리의 순서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초성에만 쓰이는 8자인 ‘ㅋ ㅌ ㅍ ㅈ ㅊ (ㅿ ㅇ) ㅎ’도 똑같이 조음위치에 따른 훈민정음의 배열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들 둘을 한데 연결해 보면, 현대 자모 순서와 다른 점이 있다. ㆁ 뒤에 ‘ㅋ ㅌ…’이 바로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있는 ‘ㅈ ㅊ…’으로 이어진다. 정확하게 원칙을 따르자면 ‘ㅈ ㅊ’은 잇소리이니 ‘ㅅ’ 뒤에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쓰고 있는 자음의 순서를 보면 이러한 원칙을 어기고 ㆁ 뒤에 배열한 것은 최세진이 훈몽자회에서 내세운 초성과 중성에 함께 쓰는 8자의 순서를 깨지 않으려는 배치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현재의 자음 배열 순서인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ㅈ ㅊ ㅋ ㅌ ㅍ ㅎ’이다.
그러면 모음의 순서는 어떻게 해서 순서를 정했을까?
훈민정음의 모음은 하늘(ㆍ) 땅(ㅡ) 사람(ㅣ) 이란 삼재를 근본 원리로 하여 만들고, 이들을 결합하여 여타 모음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창제 당시의 모음 배열은 기본자 ‘ㆍ ㅡ ㅣ’, 초출자 ‘ㅗ ㅏ ㅜ ㅓ’, 재출자 ‘ ㅛ ㅑ ㅜ ㅕ’ 순으로 배열하였다.
그런데 걸출한 어학자 최세진이 이를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ㆍ’로 배열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음의 차례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기본자와 초출자인 ‘ㅏ ㅓ ㅗ ㅜ ㅡ ㅣ’를 근간으로 하여, 가획자인 ‘ㅑ ㅕ ㅛ ㅠ’를 차례대로 배치한 것이다.
그러면 최세진은 어떠한 원리와 법칙 아래 이러한 배치를 한 것일까? 여기에는 커다란 언어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그는 현대 언어학에서 말하는 개구도(開口度)와 혀의 위치를 고려하여 순서를 정한 것이다. 개구도란 입이 벌어지는 정도를 말한다. 혀의 위치는 발음할 때 입안에서의 혀의 높낮이와 앞뒤에 의한 구분을 말한다. 아래 표는 개구도와 혀의 위치를 함께 나타낸 그림이다. 표를 보고 잠깐 몇 가지 사항을 익혀 보자.
표를 보면, 입이 가장 많이 벌려지는 것은 ‘ㅏ’이고 가장 적게 벌려지는 것은 ‘ㅣ, ㅡ, ㅜ’임을 알 수 있다. 곧 ‘ㅏ’가 개구도가 가장 크고, ‘ㅣ, ㅡ, ㅜ’는 개구도가 가장 작다. 그리고 혀끝이 가장 많이 앞으로 나오는 소리는 ‘ㅣ’이고 중간쯤에는 ‘ㅡ, ㅏ’ 그리고 가장 뒤쪽에 위치하는 소리는 ‘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개구도가 큰 순서대로 나열하면 ‘ㅏ ㅓ ㅗ ㅜ’ 순이 되며, ‘ㅡ, ㅣ’는 ‘ㅜ’와 개구도가 같다. 이를 다시 개구도에 따라 종합·배열하면 ‘ㅏ, ㅓ, ㅗ, ㅜ, ㅡ, ㅣ’로 배열된다. 최세진이 기본을 삼은 ‘ㅏ ㅓ ㅗ ㅜ ㅡ ㅣ’는 바로 이러한 언어학적 원리 즉 개구도와 혀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배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복모음 ‘ㅑ ㅕ ㅛ ㅠ’ 를 끼워 넣어 완성한 것이다.
최세진은 모음의 차례를 아무렇게나 배열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현대 언어학 이론에 의거하여 벌여 놓은 것이다. 이만큼 한글은 하나하나 과학성을 바탕으로 한 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