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의 9월/靑石 전성훈
가을을 타는 사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가을, 어디쯤 오고 있는지 궁금해서 하늘에게 물어보니 저만치에서 온다고 한다. 저만치가 어디, 어디이지 하고 여기저기 둘러보니, 거실 창문 밖에서 바람에 실려서 살랑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방문을 열어놓고 자다가 한밤중에 얇은 이불을 찾아서 덮는 걸 보니 가을이 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려고 집을 나서서 도봉산으로 향한다. 1호선 도봉산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서 등산용품 파는 가게로 간다. 망가져서 버린 지팡이 한 짝을 다시 산다.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게 불편하여, 한 손에만 지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묵주기도를 바친다. 국립공원 도봉산분소를 거쳐서 산길로 접어든다. 언제 보아도 반가운 천년 사찰 도봉산 능원사와 도봉사 절집 앞을 지나서 숲길인 도봉 옛길로 들어선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사이좋은 도봉산 삼형제 자운봉, 성인봉, 만장봉이 그 멋진 위용을 자랑하며 수줍은 듯이 얼굴을 살그머니 내민다. 늘 그 자리에 말없이 서서 뭇 사람을 지켜보는 모습에 저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한순간만이라도 말없이 이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지. 아옹다옹하는 이 풍진 세상의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내 모습이 오늘따라 괜스레 안쓰럽고 가련해 보인다. 등허리를 타고 내리는 척척한 땀을 느끼며, 땀 냄새를 찾아서 달려드는 날파리를 보니 살아있음을 느낀다. 잠시 숲길 한쪽에 서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숲길을 올라가면서 내려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받는 사람,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 인사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며 귀찮아서 그런지 본체만체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여성들은 인사를 건네면 대부분 인사를 잘 받는데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 무뚝뚝한 남자들만 산을 찾을 리 없는데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산을 찾는 사람은 저마다 이런저런 사연이나 곡절을 가지고 이른 아침 산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한마디 인사를 나누면 주변의 산새와 나무와 꽃들이 반가워할 텐데.
땀을 흥건히 쏟으며 한참 걸어 오르는데 숲 한쪽에서 고양이 새끼 형제가 먹을 것을 찾는지 흙구덩이를 파낸다. 핸드폰을 꺼내어 그 모습을 찍으니까 놀란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본다. 미안한 마음으로 조금 더 숲길을 올라가니 고양이 어미와 또 다른 새끼 고양이 2마리가 보인다. 먹을 게 없는 산에서 어떻게 새끼를 낳고 키웠는지 정말 대단한 고양이 엄마다. 어미 고양이의 모정을 생각하니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당신이 살아계실 때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해서는 안 되는 그토록 모진 말을 하면서 서로 상처를 주었는데, 이제 안 계시니 너무나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다. 유행가 가사처럼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은, 당사자가 없고 세월이 지나야만 남은 사람의 가슴에 쓰라린 흔적으로 되살아나기 마련인가 보다. 오랜만에 내가 이름 지은 ‘비밀의 정원’ 바위에 오른다. 너무나 반갑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솔솔 불어와 땀을 식혀주니까 고맙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늠름한 자세의 우이암을 바라본다. 소의 귀를 닮았다는 속설보다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음보살의 미소를 닮았다는 오래된 전설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오전 10시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안개가 많이 끼어있다. 발아래 저 멀리 저잣거리는 성냥갑 같은 아파트 숲이 실루엣처럼 비친다. 오래전 ‘비밀의 정원’에서 직장을 잃은 울분을 내뱉던 중년의 사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멀리 있다고 여겨졌던 서산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칠십 고개를 넘은 늙은이 혼자서 바위에 앉아 물끄러미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음을 떠올리니 갑자기 미소가 흐른다. 아직도 살아 숨 쉬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기 때문이리라. (2024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