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속죄 아닌 범죄, 죽는 게 용기 아니라 죄 지었으면 수치당하고 죗값 치르는 것이 용기 죽음의 문화 부추겨선 안돼 송평인 논설위원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인성(人性)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아홉 구비로 이뤄져 있다. 처음 다섯 구비는 애욕 탐욕 분노 등 무절제에서 비롯된 죄를 다룬다. 성추행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상층 지옥을 형성하는 이 다섯 구비를 돌아내려 가면 더 심각한 죄를 다루는 하층 지옥이 나온다. 7번째 구비는 폭력이다. 폭력에는 남에 대한 폭력과 자기에 대한 폭력이 있다. 단테는 남을 살해하는 죄와 자신을 살해하는 죄를 똑같이 7번째 지옥에 할당했다.
형법의 태도가 단테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형법은 살인의 죄라는 항목에서 살인과 자살을 동시에 다룬다. 방조(幇助)는 돕는다는 뜻이다. 방조죄가 성립하려면 도움받는 행위가 범죄여야 한다. 즉 살인방조죄가 성립하려면 살인이 먼저 범죄여야 한다. 자살죄는 없다. 자살한 사람이 죽어버려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방조죄는 있다. 자살은 처벌할 수는 없지만 범죄라는 사고를 보여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까지 범죄 혐의를 받던 저명 정치인의 자살이 사회에 끼치는 가장 심각한 폐해는 자살을 속죄(贖罪)로 보는 인식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살은 속죄가 아니라 범죄다. 다만 처벌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원천적인 ‘공소권 없음’의 범죄일 뿐이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누명을 벗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벗어날 길이 없자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장문의 유서를 남긴다. 이런 자살도 옳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억울하면 자살까지 했겠는가 하는 동정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시장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자살이 오히려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부인 권양숙 씨가 100만 달러, 딸이 40만 달러, 아들과 조카사위가 500만 달러를 받은 경위에 대해 수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 박 전 시장은 전 비서가 성추행 혐의로 그를 고소해 경찰 수사가 이뤄진 바로 다음 날 자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했다. 박 전 시장은 유서에서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노회찬 전 국회의원은 “어리석은 선택이었고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며 “죄송하다”고 유서에 적었다.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시장은 둘 다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부인도 시인도 아닌 회피다. 그렇다고 노 전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나 박 전 시장보다 더 솔직했다느니 하는 식의 평가를 하고 싶지 않다. 자살 자체가 나쁜 것인데 더 솔직했느니 덜 솔직했느니 하는 것은 의미 없는 구별이다.
CCTV에 잡힌 박 전 시장의 마지막 모습은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죽으러 가는 사람이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저리 서둘러 걸어가는가 안타까웠다. 택시를 타고 와룡공원에서 내린 뒤 숙정문으로 올라가는 길이나 혹은 숙정문에서 삼청공원으로 내려오는 길 어디선가 어두운 숲속으로 내려설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내가 그 숲속에 들어서는 양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살은 용기 있는 태도도 아니고 인간적인 태도도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살아서 그 죄에 합당한 수치를 당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이 진짜 용기 있는 태도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수감돼 죗값을 치르고 있다. 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면서 법적 투쟁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부엉이바위 위에 선 노 전 대통령보다는 “우리가 받은 돈은 너희들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항변하던 노 전 대통령이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자살을 속죄로 보는 것은 죽음의 문화다. 명확히 잘못했다고 말하지도 않고 자살해버린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감옥에 갇혀 죗값을 치르는 사람보다 더 추앙받는 분위기는 죽음의 문화에 속한다. 죽음의 문화를 부추긴 자가 생각하듯이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인 것이 아니다. 삶은 자연의 전부이고 삶의 부재(不在)가 죽음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