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지도력- 배미애 수녀-
“예수님께서는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죠?”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견진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시골 본당을 방문하신 주교님이 나에게 느닷없이 던진 질문이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주교님의 그 질문과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모습을 모범으로 주시기 위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엔 주교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된 지금은 그 말씀이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벌거벗고, 나약하고, 다치기 쉬운 아기 예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도 평화와 기쁨을 온 세상에 퍼뜨릴 수 있는 우리 존재의 본성과 고결함의 원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분이신 스승, 한 분이신 아버지,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의 신원이 하느님한테서 왔음을 믿고 선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일하지 않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애쓰지 않으며, 남들이 자기를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방어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위선이나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지도자·스승의 모범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들은 겸손을 축복으로, 기쁨을 열매로 후하게 받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었기에 기쁘게 봉사와 섬김의 삶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토머스 무어는 “겸손, 그것은 낮은 곳에서 천국의 모든 미덕들을 싹 틔우는 감미로운 뿌리”라고 노래했나 보다.
새벽을 열며
14세기, 벨기에는 레이몬드 3세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잔치를 벌였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재미있는 일들을 즐겼지요. 왕으로서의 의무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형편이나 국가 위신, 국제 정세는 그의 관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는 즐거움이 그에게는 전부였습니다.
결국 이 모습을 보다 못한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에 성공한 동생은 차마 형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던 왕이지만, 자신의 형이기도 했기 때문에 기회를 한 차례 더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형을 가둔 감옥에 작고 좁은 문을 만들고는 이렇게 말했지요.
“만약 형이 음식을 절제하여 살을 뺀 후 이 문을 나올 수 있다면 나는 다시 형에게 왕의 자리를 돌려주겠소.”
그리고는 매일 진수성찬을 형이 있는 감옥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형은 이 유혹을 이기고 다시 왕이 되었을까요? 물론 자신이 다시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음식의 유혹을 이겨냈지만, 결국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더욱 비둔해져서는 그 작은 감옥에서 음식과 함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평생 굶는 것도 아닌, 살을 빼서 감옥의 작은 문으로 나갈 정도까지만 굶기만 하면 다시 왕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 3세 왕은 잠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더 절제하고, 조금만 더 사랑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끊임없는 욕심과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미움으로 살찌워서 하느님 나라의 문 밖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겸손하게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는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앞선 레이몬드 3세의 왕처럼, 현세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혹에 얼마나 자주 넘어가고 있는지…….
하긴 그러한 유혹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겨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인간들은 그러한 유혹에 너무나 자주 넘어가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내 자신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그러한 나약한 면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기도가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당신 사랑의 힘으로써 채워달라는 기도를 말이지요. 그러한 기도가 실현될 때, 우리들 앞에 놓인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그만큼 넓어 질 것입니다.
체중 조절을 합시다. 저도 아주 심각하답니다. ㅠㅠ
빠다킹 신부
너와 함께 있다
-허찬란 신부-
성전을 신축할 때 컨테이너 생활을 하였습니다. 냉난방 없이 여름과 겨울을
보냈고, 경추성 편두통으로 하루에 두통약을 10알 가까이 복용하며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하루에 잠이라고는 고작 3시간 정도 자는 게 전부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보는 광경은 제주도 전역을 도는 장애인 학교의
스쿨버스와 그 버스 안으로 자식을 밀어 넣으며 사라지는 안타까운 부모들의
고충이었습니다. 낮에는 버스 종점인 성당 근처에서 버스를 주차한 채 피곤에
절어 잠을 자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늦은 밤에는 성당 옆 운송회사를
찾는 농민들의 트럭 소리, 바닥까지 값이 떨어진 농산물을 운송하는
농민들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세수는커녕 볼 일도
동네 공중 화장실을 써야 했으며 아침에는 신문지를 들고 줄을 서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만 원짜리 버너에 라면만 수두룩 쌓여 있던
컨테이너 사제관 생활, 곧 닥칠 병마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아파가던
젊은 신부의 미래, 그렇게 지쳐 있던 사제에게 매일같이 들려주던 용기와
위로는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고귀한 존재
-이동훈 신부-
오늘은 절기상 경칩이다. ‘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옛말이 있듯이 오늘은 얼었던 땅과 물이 녹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 먹이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다. 삼라만상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는 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입을 열고 생명을 받아들이듯 우리도 얼었던 마음,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낮아질 때 우리는 풍요로운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바다가 수많은 생명을 키울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다의 위대함은 낮은 자리에서 온다. 마리아도 바다처럼 낮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태중에 잉태할 수 있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인 마구간에 오셨다. 그리고 병자·과부·창녀 등 사회의 밑바닥 인생과 함께 머물며 먹고 마셨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를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필리 2,6-11 참조).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의 이치는 하느님의 방식과 일치한다.
나무의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생명, 숨을 간직한 심장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상태에서 하루 온종일 쉼 없이 일하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고귀한 존재들이 있음으로 풍요로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우종선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잘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안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주님의 자비를 얻어 누리고, 평화롭게 살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을 힘들게 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고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는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받아 누리는데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물을 받아야 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얻어야 하고, 자비를 얻어야 하는데서 말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얻지 못하면 어딘가 슬프고, 삶이 고되고 살아가면서 불편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주님은 반대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주라고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풀어라. 용서해 줘라. 후하게 베풀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잘 못 되었다고 반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편하게 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메스컴을 통해 사건 사고를 접하게 됩니다. 그 사건의 전말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럼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깨뜨린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해주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잘못했다’라고, ‘용서해 달라’고 청하면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이미 반쯤은 용서를 한 상태로, 분노에 차있는 인상이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죄인이 용서를 청하면, 환하게 웃으면서 용서해 줍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정리된 사람처럼 편안해 합니다.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형량동안 잘 지내라’고 덧붙이는 말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어떤 것이 자신을 편하게 하는지 이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평화로운 것인지 우리는 판단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정과 연관된 일이 아니라, 타인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대부분은 ‘절대로 이해 할 수 없고,’ ‘용서 할 수 없다’라고 할 것입니까? 그러면 안돼죠. 만일에 나와 내 가정에 일어난 일에 대화여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면, 감동받은 앞의 이야기나 복음도 한낱 동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나 그 안에 있는 복음은 동화가 아니며, 예수님은 단지 마음 착한 주인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지침서이며 스승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야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조건없이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조금은 다른 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마치 조건을 내거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 자비를 얻으려면 자비를 베풀어라. 지은 죄를 용서 받으려면, 남을 단죄하지 말고 용서해 주어라”라고 말입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자비를 얻을 수 없고,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내 죄도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염치없는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받기만을 바라겠습니까? 받는데서 오는 기쁨보다 베푸는데서 얻는 기쁨이 크다면, 우리는 더욱 더 베풀도록 노력해야하며,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사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받는데서 오는 즐거움도 있지만 베푸는데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의 가정을 해친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의 넉넉한 자비로움에 감동만 받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주님께로부터 더 많은 자비와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 일입니까? 우리 모두도 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용서하기 이전에 그리고 마땅히 용서할 대상이 없다면 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처럼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지르고 악을 행하고 하느님께 거역한 일, 계명과 법규를 지키지 않은 것 등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용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받아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나 자비를 청하지도 않을뿐더러, 용서 할 줄을 모릅니다. 은혜를 입어 보지 않은 사람이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조건을 내건다기 보다 더 많은 자비와 용서의 은혜를 받기 위한 것임을,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임을 깨닫고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겸허
-김훈일 신부-
오나라 왕이 강을 건너 원숭이들이 사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든 원숭이들은
오나라 왕을 보고 달아났으나 오직 한 마리의 원숭이만이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그 원숭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물건을 던지기도 하며 갖은 기교를 다
부리고 있었습니다. 오나라 왕은 이상히 여겨 그 원숭이를 향해 화살을 쏘았습니다.
원숭이는 재빨리 그 화살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오나라 왕은 신하들에게 계속
화살을 쏘게 하였습니다.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갔고 그 원숭이는 마침내
화살을 손에 쥔 채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때 오나라 왕은 자신의
친구 안불의를 보며 말했습니다. “이 원숭이는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느라고,
또 자기의 재빠름을 믿고서 까불다가 이렇게 죽게 된 것이네.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건방진 얼굴로 남에게 교만하게 굴지 말란 말일세.” 그 뒤로
안불의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수행하였고, 그 후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겸손, 이것은 신앙인의 모든 미덕이 담겨지는 바구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어떤 은총을 받고 깊은 체험을 하고 굉장한
능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겸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곧 마귀의
유혹에 걸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실천해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교훈이나 인간적인 노력의 차원이 아닙니다.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자세를 겸허(謙虛)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비하면 우리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겸손을 넘어서 겸허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양승국신부-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
가끔씩 저는 열정과 감동으로 가득 찰 뿐 아니라 순발력과 기지가 번뜩이는 한 개신교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 본인이 정말 행복하시다는 것을 느낍니다. 정말 존경스럽다 못해 신기해하기까지 합니다. 듣는 신자들을 쥐었다 놓았다, 울렸다 웃겼다 합니다. 재미도 있고 내용도 있습니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런 설교를 듣고 있는 신자들 얼굴도 환합니다. 은혜도 엄청 받는 느낌입니다.
그런 모습 보면서 은근히 샘도 나고 다른 한편으로 반성도 많이 합니다. 우선 말씀을 선포하는 저 자신부터 자신감이 없습니다. 확신도 부족합니다. 그러다보니 마지못해 하게 됩니다. 당연히 반응도 시원찮습니다.
세상에 괴로운 것 중에 정말 괴로운 것이 내용도 없으면서 길고 지루한 강론이나 설교겠지요. 결론이 빤한 훈계조의 강의, 잡다한 지식을 길게 늘어놓지만 들을 거라곤 하나 없는 그저 그런 강좌, 자기만의 억지논리를 집요하게 강요하는 특강, 듣고 있노라면 정말 괴롭습니다. 그나마 빨리 끝나면 좋으련만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집니다. 고문을 넘어 폭력에 가깝습니다. 앉아있으려면 정말 죽을 맛입니다.
언젠가 한 단체에서 주관하는 심포지엄에 갔습니다. 주제 발표가 있었는데,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나른한 봄날, 점심식사 후에 곧바로 진행된 강의였기에, 거기다 내용도 틀에 박힌 고리타분한 것이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꿈나라를 헤매시더군요.
방청객석에 앉아있던 저도 무척 졸렸지만 ‘사회적 체면’도 있고 해서 억지로 졸음을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 안 되겠더라구요. 졸음도 쫓을 겸해서 수첩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주 저희 공동체에서 있게 될 행사의 윤곽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적었습니다.
참석 예상 인원: 250명, 행사 장소: 지하 강당, 간식: 차 종류와 떡, 진행: 김○○, 특기사항: 중앙 마이크 점검, 손님용 화장실 청결상태 확인...
그렇게 열심히 적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저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심포지엄 취재차 따라온 한 지상파 방송국 카메라가 어느새 제 바로 앞으로 다가와서 열심히 적고 있는 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사태를 파악한 저는 태연스럽게 가끔씩 강사도 쳐다보고, 필기도 하는 척하면서 강의에 몰입하고 있는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밤 늦은 시간에 텔레비전에 잠깐 제가 나왔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나중에 제게 전해졌습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상대편의 급소를 찌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비록 단 한 마디 말이지만 오랜 인생의 경험, 혹은 깊은 신앙, 혹은 삶의 진리에서 나온 말이기에, 영혼이 담긴 설득력 있는 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바로 ‘촌철살인’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어찌 그리도 쉬운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간결한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엄청난 설득력과 잠재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장황하게 늘어놓지만 말씀의 핵심이 없는 바리사이들의 가르침, 뭔가 그럴듯한데 알쏭달쏭, 애매모호한,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습니다.
신앙의 정수, 종교의 근본, 깊이 있는 영적생활과도 같은 본질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종교지도자들의 훈계 앞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골수를 파고드는 명쾌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궁금증을 일거에 풀어주던 시원시원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많은 율법조항들을 단 한마디에 요약해서 귀에 쏙 넣어주는 가르침 중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한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시는군요. 아주 구체적인 말씀, 신랄한 말씀, 뼈에 사무치는 말씀, 결국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철저하게도 가난한 민중들 그 한 가운데로 파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어려운 말씀 전혀 하지 않으시고, 아주 쉬운 말씀으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감동시키셨습니다. 아주 쉽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파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보다 쉬워지기 바랍니다. 보다 구체적인 것이 되길 바랍니다. 보다 실천적인 것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누구든 쉽게 교회로 다가서길 바랍니다.
"참 나의 씨알을 사는 자유인"
-이수철신부-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밖에 있을 때
말 그대로 껍데기의 삶입니다.
온 마음으로 지금 여기에 살 때 참 행복이요,
참 나의 씨알을 사는 자유인입니다.
수도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똑같습니다.
몸은 수도원에 있어도 마음은 밖에 있을 수 있듯이,
한 가정의 부부라 해도
마음은 딴 사람에게 두고 살 수 있습니다.
“껍데기하고 살았다.”
한 몸의 부부로 믿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마음속으로는 딴 여자를 품고 산 남편에 대한
어느 자매의 증오어린 독백을 잊지 못합니다.
과연 지금 여기서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참 나의 씨알을 살고 있는 이들 얼마나 될까요?
아마 많은 이들이 참 나의 씨알을 살지 못하고
착각 중에 껍데기의 허영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껍데기 삶의 전형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자기(Ego)를 만족시키는 허영의 껍데기 삶입니다.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어리석고도 허망한 삶입니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히 외부 지향적 삶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기도 합니다.
이런 허영에 노예가 된 삶,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세상 누구를 아버지라 부를 때,
또 누구를 스승이나 선생이라 부를 때
우리는 매이게 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고,
스승이자 선생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우리 모두는 형제들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있어
참으로 자유인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자리에,
스승이신 그리스도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도처에 우리를 유혹하여
허영과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허영에서 벗어나
참 나의 씨알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내부에 눈길을 돌려
구체적 사랑과 정의를 실천합니다.
이사야 말씀대로,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고,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웁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보살피며,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줍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은
참 나를 추구해 가는 여정입니다.
참 나의 씨알을 추구해 갈 때
비로소 허영에서 벗어나 본질적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를 허영에서 벗어나
참 나되어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구약을 파기하고 그 관계자를 제거하는 작업
-박상대신부-
마태오복음 2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갈릴래아 활동(4,12-18,35)을 접고,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를 거쳐, 수많은 군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을 정화하셨다(21,12-17).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화려한 입성과 성전정화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제공한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님 생(生)과 가르침(복음선포)의 마감을 의미하며, 구약에 대한 궁극적인 종지부를 의미한다. 특히 성전정화사건은 구약의 모든 제사, 즉 구약의 제관과 제단과 제물을 파기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제사의 파기를 통하여 신약의 제사를, 즉 예수님 스스로가 제관이요 제단이요 제물이 되시는 새로운 제사의 제정을 목전에 두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활동기는 예수께서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고 새로운 신약의 제사를 제정하시려는 의도에 따라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파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약의 제의(祭儀)를 파기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대사제와 제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든 조직과 기능과 사상 등을 전체적으로 와해(瓦解)시켜야 하며, 나아가 그 사람들까지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활동기 안에는 예수님의 과감한 파기와 제거작업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지금껏 서서히 준비되어 온 이 작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셈이다. 파기와 제거작업에는 심한 반대와 갈등과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며, 파기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스스로 파기되고 제거되는 법이다. 이 법칙을 예수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허나 그분은 당신의 길을 포기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성전정화사건 때문에 예수의 이런 권한을 놓고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심한 논쟁이 있었다.(21,23-27)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들(21,28-22,14)과 세금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은 모두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급하신 것들이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계명을 새롭게 선포하여(22,34-40) 신약의 유일한 계명으로 제시하셨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이 육(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靈)으로는 다윗이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0,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6)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계시이다.
구약의 파기와 제거작업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대사제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질책으로 전개된다. 그들이 총체적으로 예수님의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율좌(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동은 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은 저버리고 태만하였으며 권위를 과시하고 남에게 과도한 짐만 지우는 "위선자"들이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13-33) 사실 마태오복음 23장은 이들에 대한 책망과 불행선언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의 파기와 그 관계자들의 제거를 위한 작업으로 제시되는 책망은 거꾸로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을 포함한 군중과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지만 유다교의 지도층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우리 교회의 지도층에 만연한 바리사이적 조직과 기능과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좌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이마나 팔에 성구(聖句)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았고, 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하지도 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뿐이시며, 믿는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이다. 으뜸가는 사람일수록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어 타인을 섬길 때야 비로소 참으로 높은 자가 되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스승도 지도자도 없다. 권위도 없다. 있다면 오로지 직분(職分)과 섬김과 봉사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은 늘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는 성구(聖句)를 자신에게 매어두어야 할 것이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마태 23,1-13)
-유광수신부-
그 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제 자리가 있다. 우리는 저 마다 자가 자리를 알고, 제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은 눈의 자리가 있고, 입은 입의 자리가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가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가 있다. 선생은 선생의 자리가 있고 학생은 학생의 자리가 있다. 저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킬 때 사회의 번영이 있고 가정의 평화가 있고 교회의 발전이 있다. 저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데에서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혼란과 멸망의 길로 전락한다.
저마다 제 자리를 알고,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을 한문에서는 수분(守分)이라고 한다. 제 분을 지키는 것이다. 수분은 질서와 평화와 번영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미의 원리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제자리에 있을 때 건강하고 아름답다. 밥알이 밥그릇 속에 있을 때에는 이름답지만 얼굴이나 옷자락에 붙으면 아름답지 못하고 도리어 추하다. 그것은 제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사회는 제 각기 제 자리를 지키는 사회다. 그 자리에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있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우리는 저마다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다 제 구실이 있다. 우리는 저마다 제 구실을 다 해야 한다. 우리말의 구실이란 말을 한문으로 옮기면 직분이요, 책임이요, 사명이요, 기능이다. 어머니가 되기는 쉽지만 어머니 구실을 다하기는 어렵다. 스승이 되기는 쉽지만 스승 구실을 다하기는 어렵다. 신자가 되기는 쉽지만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만 수도자나 사제의 구실을 다하기는 쉽지 않다. 인생의 의미는 저마다 제 도리를 다하고 제 구실을 다하는 데 있다. 인생은 사명실현(使命實現)의 자리요 직분완수의 무대이다. 인생은 놀고 즐기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니고 제 각기 제 구실을 다하고 제 도리를 다함으로써 제 빛과 제 의의를 드러내는 창조의 일터이다.
사람은 사람 구실을 하고, 학교는 학교구실을 하고, 나라는 나라 구실을 다해야 하고 교회는교회의 구실을, 가정은 가정의 구실을 다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제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 별로 없다. 정치, 경제, 입법, 교회,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눈이 눈의 구실을 다하고, 위가 위의 구실을 다하고, 간이 간의 구실을 다 할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다. 눈이 보는 구실을 못하고, 위가 소화하는 구실을 못하고 간이 영양저장의 구실을 못한다면, 우리의 신체는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구실, 어머니는 어머니의 구실, 선생은 선생의 구실, 사제는 사제의 구실, 수도자는 수도자의 구실, 평신도는 평신도의 구실을 다할 때 이 사회가 교회가 건강하고 발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모세의 자리란 어떤 자리인가? 모세는 하느님한테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이끌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간 이스라엘백성의 지도자요, 목자이다. 그는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중간 위치에서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였고 하느님의 분부대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간 사람이다. 그는 하느님께 충실한 종이었고 또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히 전달한 지도자요, 목자였다. 모세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았고 자기의 뜻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흠없는 자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모세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요, 목자로서 자기의 직분에서 자기의 구실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세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나이 120세 나이로 그의 사명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리를 이어 여호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의 자리를 이어받는 이들의 사명과 역할이 조금씩 흐려졌고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즉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이 제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백성들에게 봉사하고 모범을 보여주기보다는 자신의 영예와 존경을 받는 자리로 삼았다. 즉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들의 이익과 영예를 위해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았으며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 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던지 아니면 잘못 알고 있었든지 둘 중에 하나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자기의 자리가 있고 역할이 있다. 어느 한 사람만이 잘해서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올바르게 해줄 때 사회가 건강해지고 가정이 그리고 공동체가 교회가 단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그 사람의 자리와 역할이 어떤 자리 어떤 역할이냐에 따라서 그가 끼치는 영향은 다를 것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의 대통령의 자리는 세계 모든 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부시의 오만하고 탐욕 때문에 전 세계가 전쟁의 불안 속에 떨고 있고 자칫 잘못하면 수많은 생명이 죽어갈 수도 있는 긴급한 상황이다.
결국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자기가 져야 한다.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마지막 심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역할과 사명을 맡기신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자리와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하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평가는 그리고 책임은 주님이 하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