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진 시인의 시집 『빵의 전개도』
시인의 말
상긋한 퍼플
우울이 출렁이는 퍼플
즐거운 퍼플
하품하는 퍼플
성깔 부리는 거침없는 퍼플
겁먹은 우물쭈물하는 덜컹거리는 퍼플
아찔한 purple
아름다운 people을 만드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멀구슬나무꽃잎처럼 공중에서 흔들린다
2024년 6월
김미진
약력
2020년 《월간문학》 등단.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현재 계간 《디카문학》 편집장,
율격 동인. 문인화 초대작가.
전라남도미술대전 특선 등.
2023 전남도교육청 〈이음갤러리〉 초대전(개인전) 등.
별후 2
밤하늘
무너지는
마음에 받습니다
눈물 산산이 깨져 유리 조각 박혀오고
별빛은
천
길
낭
떠
러
지 다
까 니
무 릅
룩 오
되
빵의 전개도
오븐에 빵을 넣고 네 입술을 생각한다
파이 한 입 베어 문 3.141592… 무한한 맛
점선과 실선 사이 먼, 밀밭에서 오고 있는
널 향해 달리느라 내 발은 숯덩이처럼
뜨겁다, 화덕피자처럼 바싹 구워진 들판
그을음 밑변이 되어 부풀대로 부푸는
영화 속 연인들 한 모금의 키스처럼
꿈결일까, 자울자울 흘러드는 사과 향
달콤한 모서리 접어 아침 식탁을 완성한다
툭,
날마다 하고픈 말 오늘 또 못합니다
산딸나무 꽃향기 바람 따라 겨르로이
내게로 찾아오는 발길 그대 꿈에 닿기를
오늘은 나 먼저 꼭 듣고픈 말이기를
바람에 꽃잎 휘지고 달빛 드렁칡인 밤
향낭 툭, 터져 숨 가빠 주저앉고 맙니다
트랙
노을이 질 무렵 눈 뜨는 가로등처럼
어둠이 지는 아침, 나는 두 눈을 켠다
시간이
나와 가로등 사이를
행인처럼 오간다
Chat GPT가 자라도록 물을 주었다
체체파리 병자처럼 물 밖 해파리처럼 뭉친 시간이 곪아 내 몸이 내 것 아닌, 무력에 점령당했다, 쳇, 아니 챗, 나 어떡해?
병은 뼈에 스미고 열정은 빠져나가고 서맥徐脈이 독불장군, 뒤통수를 강탈했어, 정釘 맞은 돌벽 뒤에서 질문들이 무너져
그래도 나 어떡해? 말 뿌리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꼿발 딛고 조금만 더 이 악물고, 내 마음 뿌리는 대로 마중물은 어려울까?
추천사
현대시조의 개성은 ‘스텝’에 있다. 그건 자신의 세계를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며, 또한 그 징검다리를 밟고 건너는 일이다. 첫 시집에서 보여주는 김미진 시인의 스텝은 실험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녀는 늦깎이 시인이지만, 으레 편안하고 안전한 서정적인 스텝을 거부하고 있다. “음들이 좀비처럼 확, 손가락을 물었어”, “코드블루Cord blue 새파란 우울이 박동하고/ 이제 막 응급조치 끝낸, 꿈, 회복 중이야”(「코드 클리어」), “체체파리 병자처럼 물 밖 해파리처럼 뭉친 시간이 곪아 내 몸이 내 것 아닌, 무력에 점령당했다, 쳇, 아니 챗, 나 어떡해?”(「Chat GPT가 자라도록 물을 주었다」) 같이 그런 개성적인 스텝을 밟기에 시인은 살아있다. 스텝이 살아있기에 흥미롭다. 살아서 현대시조의 강을 힘차게 건너가고 있기에 더더욱 매력적이다.
- 정일근 (시인·경남대 석좌교수)
챗 지피티(GPT)에게 정화수 같은 물을 주는 시인 - 사람에게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60억 5천만 지구인을 모두 목 축여주고도 남을 널찍하고 가슴 도도한 큰 강물, 부지런히, 부지런히 흐르고 흘러 남녘의 서정강抒情江으로 곧추 흐르길…
- 최한선 (시인·전남도립대 명예교수, 전 동아인문학회장)
해설
섬세한 유연성과 초월하는 시적 상상력
이지엽 시인·경기대 명예교수
김미진 시인의 작품에는 신선한 바람이 일고 있다. 시적 대상도 그렇지만 시의 내용과 구성도 새롭다. 파사드facade, 모로코, 페르소나, 챗GPT, 각覺이나 코르티솔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하고 이를 새로운 상상력과 버전으로 형상화한다.
시조가 가지고 있는 형식에 최대한 양식적 실험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밋밋하거나 평범한 것보다는 살아있는 실체를 담아내고자 하는 열정이 강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밤하늘
무너지는
마음에 받습니다
눈물 산산이 깨져 유리 조각 박혀오고
별빛은
천
길
낭
떠
러
지 다
까 니
무 릅
룩 오
되
- 「별후 2」 전문
포말리즘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별 후의 느낌까지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음표가 거꾸로 선것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외줄로 처리된 부분이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말리즘의 기법까지를 동원하는 것은 시조의 형식장치에 대한 강렬한 도전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별후3」 도 한 음보를 거의 한 행으로 처리하면서 행간에서 주는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첫 시조집임에도 불구하고 사설시조 작품이 상당수 보인다. 사설시조는 평시조가 어느 정도 가락을 탈 수 있을때라야 가능한데 시인은 이를 과감히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평시조가 갖는 한계점을 스스로 돌파해 보고자 하는 의욕이 충일하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감추어진 문면에 놓인 서사가 여러 갈래의 파장을 만들고 독자들의 사고를 흥미 있게 끌고 간다는 사실이다.현대시조가 나가야 할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적지 않는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