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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1-12, 전도서 9:13-18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요”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나의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하루하루가 평안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평안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들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평안은 외부적인 일들이 해결된다고 누릴 수 있는 마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안,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시선이 나의 바깥이 아닌 내면으로 향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평안은 멀리 있거나, 외부에서 가져와야 하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복음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이 평안이 나의 안에, 우리 안에, 그리고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전도서의 본문을 통해 ‘성도의 비참한 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받아 누리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며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삶과 이 욕망으로 인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는 삶이 성도의 비참한 일입니다.
한 주간 어떤 삶을 살다가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순간순간 나의 욕망과 마주하고, 그 욕망을 내려놓음으로써 오늘 하루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발견하고, 누리고, 감사하는 성도 되시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요.”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아닌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라는 권면의 말씀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자, 우러름을 받는 자가 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시는 실제적인 권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태도에 대해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로 구별하여 보지 말고, 모두를 동등하게 바라보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는 모세의 율법을 말합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따라서 이런 율법을 연구하고 해설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은 자연스레 중요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가 이스라엘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이 자신의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한 일들에서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1-2에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는 것입니까? 그들은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처럼 율법학자, 바리새인은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따로 자신들의 전통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도구로 작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0:17-21의 기록을 보면,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받침을 놋쇠로 만들어서, 씻는 데 쓰게 하여라. 너는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놓고, 거기에 물을 담아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로 그들의 손과 발을 씻을 것이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물로 씻어야 죽지 않는다. 그들이 나 주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려고 제단으로 가까이 갈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들의 손과 발을 씻어야 죽지 않는다. 이것은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은 일반 백성의 일상생활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학자,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이 규례을 확대해석해서 일반 사람들까지 일상적으로 식사 전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마태복음 15:9)라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규례들은 당시 가난한 이들 대부분이 지킬 수 없는 규례였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전통이 가난한 이들을 죄인으로 묶고, 자신들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율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5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행태를 비판하시며,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하십니다.
“5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7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9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들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과 나를 구분 짓고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구분을 통해 자신들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합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릅니다. 이런 자리 하나하나가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에게 심어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잔치의 윗자리는 잔치를 베푼 주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리입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잘 보이는 회중의 정면에 위치하는 좌석입니다. 이런 자리는 이 자리에 앉은 사람을 중요 인물로 부각하고, 돋보이게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은 높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정중하고 공손한 의례를 했는데,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은 이 의례를 장터라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특정 장소에서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런 장터에서 ‘나의 크신 분’이라는 뜻을 가진 ‘랍비’로 불리는 것을 이들은 좋아했습니다.
이상의 예수님이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이들이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는 일보다 자신을 만족시켜 주고 돋보이게 하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 그리고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랍비, 아버지, 지도자라는 호칭 하나하나에도 자신을 높이고 다른 이들과 구분 짓는 방식이 작동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랍비, 아버지,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꼭 이 세 단어가 아니어도 나를 높여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호칭이나,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는 호칭을 듣고 싶어 합니다.
세 가지 호칭에는 더 복잡한 방식이 작동합니다. 사람들이 ‘랍비’, ‘지도자’, ‘아버지’라 불리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기에 이런 호칭으로 더 불리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에 가셨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54 예수께서 자기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그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55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56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57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58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다.”(마태복음 13:54-58)
예수님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집안 배경을 알고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율법학자나 바리새인과 같은 ‘랍비’ 또는 ‘선생’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리 지혜로운 말을 할지라도 그 말을 신뢰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전도자의 고백도 그렇습니다. “13 나는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겪는 일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14 주민이 많지 아니한 작은 성읍이 있었는데, 한 번은 힘센 왕이 그 성읍을 공격하였다. 그는 성읍을 에워싸고, 성벽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였다. 15 그 때에 그 성 안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그의 지혜로 그 성을 구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16 나는 늘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고 말해 왔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멸시받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혜로운 자로 인해 성이 파괴되지 않았지만, 지혜로운 자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멸시받는 장면을 전도자는 보았다고 합니다. 주민이 많지도 않은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자란 배경으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국 멸시를 당하는 지혜자의 삶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학벌이든, 권력이든, 재물이든 기득권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리 지혜로운 말을 할지라도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가난하고 기득권을 가지지 않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지금과 같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불법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단순화시켰을 때 결국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십니까?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을 제시하십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의 의미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겸손한 마음의 사람이 되어라.’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런 권력과 기득권을 누리는 자리에 가지 말고 낮은 곳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이 정계에 진출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일합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이 율법을 볼모 삼아,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전도자는 어떻게 말합니까?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호통 소리를 듣지 말고, 지혜자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17 어리석은 통치자의 고함치는 명령보다는, 차라리 지혜로운 사람의 조용한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 18 지혜가 전쟁무기보다 더 낫지만,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다.”
가난한 지혜자의 말을 들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자신도 가난해지는 방법, 그의 자리에 같이 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낮은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9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는 말씀처럼
낮은 자리에 위치하면서도 하나님만이 선생님, 아버지, 지도자가 되시기에 한 분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들, 모두가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얼마나 건강합니까? 목사 한 명이 의사 결정권을 소유하지 않고 다수가 함께 결정하는 평등한 구조입니다. 목사 한 명에 의지하지 않고 모두가 책임 있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건강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도 구성원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공동체와 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낮은 자리로 가십시오. 낮은 자리에 있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 완전한 존재임을 잊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며,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성도로 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사순절 기간 온 성도가 이 세상의 왕이 되지 않으시고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하소서. 낮은 자리에서도 온 세상을 구원하고 또 사랑하는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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