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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벧엘에서 복을 받은 야곱
창 35: 9-15
사람은 누구나 복 받아 잘 살기를 바랍니다.
원시시대 사람들도 복 받고 잘 살기를 원했습니다.
석기시대 사람들도 복 받고 잘 살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잘살려고 철 연장을 발명하였습니다. 이로 100배의 생산이 증가 되었고 100배의 위험이 발생했습니다. 철로 사냥 기구와 농기구를 만들어 생산이 늘어났지만 무기를 만들어 잔인한 전쟁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권력과 지배 계층이 생겼고 나라가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들
하나님의 선민들을 하나님이 복 주셔서 잘 살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노벨상의 2/3를 받는 것은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장사의 귀재 비단 장사 왕서방이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에 가서 비단 장사를 하여 번 돈을 그리스 인들이게 잃었고 그리스 인들은 다시 유대인에게 잃었습니다. 옛날부터 유대인들이 로마, 그리스 시장의 경제를 장악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은 세계 도처에 살면서 은행, 투자자본, 무기상, 곡물상, 증권회사, 유수한 언론을 장악해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잘 아는 얘기입니다
잘 사는 곳
서구 자본주의가 일어난곳은 개신교=기독교[protestant]가 일어난 곳입니다[막스 베버] 그중에도 장로교 칼빈주의가 일어난 곳입니다. 이들 나라들이 잘 삽니다. 어떻게 해서 개신교도들이 잘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5대 생활정신에 있습니다.
개신교의 5대 생활 정신
1.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산다,
2.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정직하게 산다,
3.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산다,
4. 오직 말씀[sola scriptura]으로 산다,
5.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정신하에서 개신교도들은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았습니다. 정직은 신용을 낳았고 근면은 부자가 되게 했고 이들의 국가는 부강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들에 의해 서구 자본주의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개신교도들은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시장 군사 권력 국가를 이끄는 실세가 되었습니다.
개혁주의자 칼빈은 제네바시를 완전히 신앙으로 개혁했습니다. 이 정신으로 절대 왕정국가 군주 국가들이 민주 공화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개혁이란 말은 교회용어입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개혁을 모릅니다. 개혁주의 자들이 왕정과 군주를 장악한 캐도릭을 개혁한 개신교를 모르고 정치 사회 문화를 개혁한 것을 모릅니다. 더구나 기독교의 5대 생활정신을 모르기 때문에 개혁을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개혁 개혁 하면서 개악이 되고 부정이 난무하는 것은 기독교의 개혁정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온전한 개혁 되려면 믿음 있는 기독교 정치 지도자가 기독교 개혁정신을 가지고 나서서 개혁해야 됩니다.
우리보다 앞선 일본
아시아에서는 제일 먼저 일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서구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여 현대화를 했습니다. 저들은 17, 18, 19세기에 청년들을 유럽에 유학 보내 선진 교육과 기술을 받아들여 무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와 서구 문화를 배척하여 개화와 현대화의 기회를 잃고 사색당파 싸움을 하다가 일본에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일본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12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불신자 보다 앞선 한국 기독교인들
그런 중에서도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가 전하는 복음을 핍박을 받으면서도 먼저 믿은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을 배워 의식이 깨었고 서양 교육을 받아 개화가 되어 무지 목매한 백성들을 일깨우는 선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초대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직하고 근면하였습니다. 사회 부패를 막는 첨병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상류층이 많습니다. [이만열 박사]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현실과 타협하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타까운 실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 홍성교회는 만복의 근원 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믿음 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아곱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교회 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복, 미신적이고 샤마니즘적인 복, 천박한 기복주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복은 어떻게 받습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이 복을 받았습니다.
빈털터리 야곱이 하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신앙의 전성기, 사업의 전성기, 인생의 전성기- 황금기 인생을 살았습니다.
외삼촌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곱은 세겜에다 땅을 사고
거기서 근 10여년을 살았습니다.[창34장]
세겜에서 야곱은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외동 딸 디나가 세겜 사람과 강간을 당했고 아들들은 그들에게 거짓말을하여 보복 살인극을 벌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야곱[1]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벧엘로 올라가...하나님께 단을 쌓으라”야곱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30 여 년 전에 하나님의 복 받은 그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의 없이 야곱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2. 온 가족의 신앙을 바로 세운 야곱[2,4]
야곱은 식구들을 벧엘로 데리고 가기 전에 먼저 3 가지 면에서 신앙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 이방 신상을 버림
야곱은 식구들에게 이방 우상을 완전히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오직 여호와 신앙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선언했니다.
(1) 라헬에게 드라빔을 버리라고 했니다
(2) 일꾼들(30:43)에게 현지 우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식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말씀보다 은혜보다 더 좋아하는 세상의 것이 우상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야곱은 죄악 된 세겜에서 한눈을 팔다가 큰 변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b>2) 자신을 정결케 하라
야곱은 식구들에게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더럽혀진 마음과 몸을 깨끗이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방 땅에서 살던 모든 악한 생활 습관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음과 몸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마음 가짐, 생각, 행동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영을 혼미하게 하고 생각을 더럽게 하는 것을 뿌리쳐야 합니다. 음란물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 TV 보지 말아야 합니다. 깨끗한 영과 마음으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3) 의복을 바꾸라-
지금까지 야곱의 식구들이 이방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살아왔는데 그 옷을 모두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선민다운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앙과 신분과 삶을 나타냅니다.
옷을 바꾸어 입으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의 양태를 완전히 버리고 새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답게 옷을 입어야 합니다. 머리, 옷, 구두, 가방 등..정갈하게 입어야 합니다.
3. 순종하여 신앙을 개혁하는 가족들[4]
야곱의 개혁 내용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야곱의 말에 모두 순종했습니다. 가장의 영적 지도에 모두 순종하였습니다. 참으로 복 받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역하는 쓴 뿌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믿는 아내는 믿는 남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는 자녀는 믿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모든 우상을 모아서 땅에 파묻었습니다.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버렸습니다.
우상에 대해서는 우리도 이렇게 결단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 새벽을 깨우겠다는 결심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심, 예배를 중시하겠다는 결심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결심.
사업에 정진하겠다는 결심을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가족은 신앙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 받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4. 가족을 벧엘로 이끈 야곱[3]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내개 응답하시고...함께하신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고 싶다”[3]
벧엘은 세겜보다(33:17) 300m 이상이 높습니다. 그래서 ‘올라가자' 고 했습니다. 수많은 식구들과 짐승들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는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하셨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겜 이 싫었습니다. 이제는 세겜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세겜은 야곱의 식구가 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는 곳에 살아야 합니다.
교회 멀리 살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와 놀러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은혜생활, 복된 생활을 하려면 떠날 곳을 용감하게 떠나야 합니다.
5. 야곱의 가족이 올라 가는 길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5]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 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의 식구들과 가축들이 벧엘로 올라 갈 때 하나님께서 주변 고을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셔서 감히 야곱의 일행을 가로 막고 시비를 걸거나 공격을 하거나 재물을 빼앗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개미새끼 하나 방해 하는 일이 없이 야곱 일행은 순적하고 평안하게 벧엘까지 올라갔습니다.
6. 하나님께 단을 쌓은 야곱[7]
마침내 야곱의 가족은 벧엘에 도착하였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하며 두려워 떨며 산속에서 돌을 베고 잘 때 - 하나님께서 꿈에 생생하게 나타나셔서 하시고 축복하신 산에 30여년 만에 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축복하신대로 동안 큰 복을 받아가지고 그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엘 벧엘= 하나님,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예배가 살아야 내 영이 살고, 삶이 삽니다. 예배가 살아야 예배자가 받는 복을 받습니다.
오늘도 주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복을 받는 야곱 [10-15]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이 다시 아곱에게 나타나 복을 주셨습니다.
1.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10절]
2. 너는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라[11절]
3. 네 후손 중에 왕들이 나오리라[11절]
4. 이 땅을 너와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13절]
돌기둥을 세운 야곱[14]
야곱은 그곳에 다시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14]
그 위에 전제물 과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름을 엘 벧엘=하나님, 하나님의 집-이라 하였습니다[15절]
결론
야곱은 약속의 땅 벧엘로 돌아오며 신앙개혁을 단행하고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다시 하나님을 만났고,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확정지어 주셨고 자손이 번성하여 민족을 이룬다고 축복하셨고
왕이 이어서 나온다고 약속하셨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야곱처럼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창 35: 9-15
인생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구든지 모든 일에 성공을 하여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인생을 즐겁게 누리기를 원합니다. 만일 그렇게만 되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성공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잘 살고 싶고, 돈벌고 싶고, 출세하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욕망들이 다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세상 사람들의 성공의 개념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 남들이 나를 어떻게 잘 알아주느냐 에 따라 기준을 둡니다.
사실 오늘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출세 제일주의에 오염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성공하고 출세를 해야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에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식구조와 신앙의 태도로서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처럼 물량 주의의 성공과 출세를 한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높은 관직에 있다 할지라도 그 인격이 고매하지 못하고 돈을 쓰는 사람이 변변치 못하여 장래의 영원한 소망이 없다면 오히려 세상에서 실패한 삶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었고, 원하던 것을 얻었으며, 그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성공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비록 차자(次子)로 태어났으나 장자만이 받는 축복을 그렇게 사모하더니 그대로 되었고, 원하는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더니 그것도 이루었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더니 마침내 부자도 되었고요.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결국 그 소원대로 다 이루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 성공 비결을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삶에 더욱 유익한 플러스 α의 행복을 추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잡고 축복을 선언해봅시다. 영육간에 성공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1. 야곱은 성공과 축복을 대단히 갈망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형인 에서와 시간적인 차이는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서 동생이 된 것이죠?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도상 장자와 차자의 차이는 그 격차가 대단히 컸습니다.
모든 권한과 재산권은 장자에게 집중이 되었는데 동생으로서의 처지에 놓인 야곱은 그것이 대단히 싫었고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제도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는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부터 성공과 축복을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뱃속에서부터 그렇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성경에서 우리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지라(축복의 일을 놓고 다투는 의미)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 이었더라.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지극히 짧은 시간적 격차를 묘사한 말로서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으려는 듯이 바짝 뒤쫓아 나온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시간적 차이로 인해 장자가 되지 못한 아쉬움과 장자권 속에 들어있는 메시야의 축복에 대한 사모와 갈망을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34: 팥죽)을 쑤었더니....
야곱이 왜 팥죽을 끓였습니까? 그저 먹고 싶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리브가를 통하여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축복권이 장자권을 가진 자에게 있음을 알고 그 장자권을 얻으려는 야망을 서서히 추진해 나갔습니다.
자신이 차자로 태어났으므로 장자는 될 수 없으나 그 장자의 명분은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에서의 그 장자권을 서서히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자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외적 특권과 내적 특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외적 특권은 ①아버지의 뒤를 승계하여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27:01~45; 대하 21:03)과 ②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을 가집니다.
내적 특권으로서는, ①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②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됩니다.
또한 의무와 책임도 따르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야곱은 장자권에 들어있는 외형적 특권, 세상적 특권을 사모한 것이 아니라 내적 특권 속에 들어있는 영적 축복을 사모하면서 치밀한 계산 아래 그 죽을 끓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속셈에 그 장자권의 가치를 소홀히 여긴 에서는 한 끼 식사의 포만감을 위하여 장자권을 팔게 됩니다.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리요.
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히 12:16....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결국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소유했습니다. 물론 그의 거짓말과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나 복을 원하고 바라는 그 태도와 정신을 오늘 우리는 본 받자는 것입니다
2. 야곱은 성공과 축복을 제단신앙으로 이루었습니다.
이후 그는 형의 위협을 피해 하란의 외가 집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창세기 28장 18절을 보면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괴나리봇짐 하나에 지팡이 하나만을 잡고 혈혈단신 하란으로 가던 도중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벧엘에서의 제단을 쌓은 이후 야곱은 목적지 밧단 아람에 무사히 도착하여 20년의 세월을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신부감을 만나게 되는데 라헬이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을 참고 기다리며 일을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러나 그곳의 20년 세월은 장인 되는 라반과의 재산권 문제로 서로 속고 속이는 생활을 함으로서 믿음의 사람답지 않는 불신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생활을 청산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하란 땅을 살며시 떠나오나 장인으로부터 대단한 생명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야곱을 하나님은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창 31: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21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 삼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이후 야곱은 창 35: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부어 제단을 쌓았으며 54절을 보면 위기를 벗어난 후 산에서 기쁨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 35:14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창세기 28장이나 31장 그리고 35장의 경우는 야곱이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떠돌던 시절 그러니까 그의 생활이나 환경이 안정이 되지 못했던 어려운 시절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때를 따라 제단을 쌓은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져 버리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대학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를 조사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보고서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꿈의 나라로 여겨진 스위스도, 가장 부요한 나라 미국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신들도 행복하다고 할 정도로 행복에 익숙해진 프랑스이겠습니까? 그곳도 아니라 인도반도 북동쪽 끝에 위치한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겨우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넘긴 북한 수준이고, 태어난 아기 열 명 중 한 명은 죽는 아주 낮은 의료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찾아드는 수재로 해마다 수천 명이 때죽음을 당하며 국민의 절반이 문맹인가 하면 중학교는 4명 중 겨우 한 명 꼴입니다.
땅은 넓은가요? 약 14만 4천 ㎢ 정도입니다. 인구는 적은가요? 무려 1억 3천 3백 3십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보고서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바로 이 나라라는 것입니다.
행복 지수는 결코 그 나라의 경제력과 비례하지 않으며 오히려 선진국보다는 후진국일수록 행복 지수가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방글라데시 외에 인도, 그리고 네팔과 같은 나라들이 행복 지수가 더 높다는데 반면 선진국일수록 마약중독자, 그리고 자살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결국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은 사람을 타락하고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에게 어떠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은혜 받은 후 기뻐하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계단을 내려가는 성도라는 답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이며 행복한 마음이며 행복한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은혜 받고 감격하는 성도의 모습은 모나리자의 미소에 비할 수도 없는 행복한 모습입니다.
3. 야곱은 성공과 축복을 기도로서 이루었습니다.
창세기 32:25절을 보면 얍복강변에서 벌어졌던 야곱의 영적 전투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솔들은 데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청천 벽력같은 급보가 전해졌는데 이는 장자권을 빼앗겼던 형 에서가 400명 장정을 이끌고 야곱을 처치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습니다.
야곱은 이런 저런 궁리 끝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이때의 장면을(창 32:24~29) 천사와의 씨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호 12:0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0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천사와 야곱의 씨름 이것은 하나 마나한 씨름이지만 그러나 야곱은 천사를 이겨야 자기 앞에 가로놓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절박한 믿음 때문에 밤이 새도록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환도 뼈가 위골되기까지 씨름하는 중에 결국 판정승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는 기도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날 밤 얍복강 나루터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야곱의 생애는 어쩌면 에서의 칼에 막을 내렸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성공을 하며 또 현실에서의 당하는 문제를 풀어 가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즉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가 있는데 그럴 때는 주로 다음과 같은 반응들이 일어납니다.
①놀라고 당황합니다.
②걱정하고 절망합니다.
③인간의 방법을 찾습니다.
④방법을 동원하여 해결을 위한 노력을 다합니다.
⑤해결이 안 되면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신앙적 접근이지요. 우리에겐 기도라는 위대한 성공의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야곱이 바로 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던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놀라운 기지와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임기응변력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방법들을 온전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기도만이 해결의 길이며 하나님과의 대면만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문제의 해결을 원하십니까? 지금 기도하셔야 합니다.
갖가지의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낳았던 타이타닉 호가 부서졌을 때의 일입니다. 수천 명의 탑승객이 이미 죽어갔고 구명보트에 탄 노약자들은 다 구조되어 이제 구조대마저 철수해 버린 상황이었을 때 영국의 한 문인이 가죽 풍선을 가슴에 끌어안고 파도에 밀려 며칠간을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끝없는 고독과 실망감이 몰려와 이제는 살 희망을 포기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는데 이때 1인승 소형 물체 하나가 공중을 맴돌다 바다 위의 이 사람을 살피고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그렇다 이제 저 구조대가 나를 보았으니 곧 구조선이 오겠지 하면서 버리고 싶었던 가죽 풍선을 다시 움켜쥐고 과도를 끄집어내 날 생선을 잡아먹으면서 며칠을 더 버티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해양 경찰 구조선이 달려와 눈물겨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외로운 나를 고독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이 희망이 삶의 힘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로 나를 지켜주심을 아십니까? 성도 여러분은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과 같이 있는 행복함을 누려보십시오.
야곱은 자신을 안보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기도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이 기도를 인생의 전반적인 삶의 토대로 삼고 나아갈 때 마침내 성공적인 삶을 이루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늘 만나고 교제해야 하는데 그분과 늘 교제하는 방법은 오직 제단신앙 즉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소홀히 여기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위기를 만남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제단신앙 즉 바른 예배를 위해 몇 가지 안내를 드립니다.
①정한 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고 열심을 기울여야 합니다.(새벽, 낮, 밤, 정한 날)
②정한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물론 거리 관계나 교통수단의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③드릴 것은 미리 미리 준비하고 드려야 합니다.(마음, 태도, 복장, 헌금 등)
④어떠한 모임들 보다 예배(제단신앙)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⑤예배는 생활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편의상 그리고 형편상 예배의 시작과 마침을 정하고 예배를 드립니다만 그러나 예배는 끝이 있으면 안 됩니다. 주일의 예배를 다 드리고 나면 이어서 삶의 현장으로 나가 생활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그리고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공 문명을 제 아무리 건설하고 그것을 누린다 한들 그 심령에 낙이 없다면 누가 그것을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 0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벧엘로 돌아온 사람
(창 35:9-15)
희망찬 새해 첫 주일입니다. 갈 곳이 많고 해야 할 일들이 많으시겠지만 하나님의 집을 찾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앉아 예배드리는 이 성전을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곳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처소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 처소입니다.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내리시는 축복의 샘터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축복의 샘터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 봉독한 본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의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간교한 사람으로 어리숙한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장자에게만 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기도까지도 가로챘습니다. 아버지가 연로하여 눈이 어두원진 것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마지막 축복기도를 가로챘습니다. 이로 인해 원한을 품은 형을 피해 야곱은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외삼촌 집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벌판에서 돌을 베개하고 노숙을 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을 창세기 28:13~15 에 기록하기를“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감격하여 베개 삼았던 돌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벧엘이란“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날 야곱이 하나님께 맹세하기를“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세기 28:20~22)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맹세한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어제 밤 꿈처럼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승리하게 하시면 이곳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겠다는 것과, 둘째, 하나님께 십일조를 반듯이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 야곱은 20년간 외삼촌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복을 주셔서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세기 31:13)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20년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 맹세한 그 약속을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금의환향의 부푼 꿈을 안고 모든 가족과 가축을 이끌고 벧엘을 향했습니다.
벧엘을 향해 가던 야곱은 그만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의 집 벧엘이 아닌 세겜에 머물러 살게 되었습니다. 세겜에 머문 이유는 그곳에 물이 넉넉하고 초지가 좋아 목축하기에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께 맹세한 벧엘이 아닌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앞세워 목적지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차선을 벗어난 자동차나, 항로를 이탈한 선박과 비행기처럼 목표가 빗나간 야곱의 꿈은 얼마 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추(千秋)에 한을 남기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외동딸 디나가 세겜 성에 친구를 사귀고자 나갔다가 추장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오라버니들이 그들을 간교한 수법으로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은 딸은 몸을 더럽히게 되었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자기 뜻을 앞세워 세겜에 머문 결과였습니다. 야곱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주변 부족들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불안해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세기 35:1)고 하셨습니다. 벧엘에 가서 서약한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친 야곱은 실패의 땅 세겜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벧엘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로 돌아온 야곱을 보시고 기뻐하시면서 이곳 벧엘에서 받아 누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5:11~32에도 이와 의미가 비슷한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탕자는 부잣집 둘째 아들로 고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인지,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고마운 일인지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갔습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멋과 자유로 착각하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얼마 후 가지고 간 돈을 다 써버리고 거지가 되고난 후에야 지난날 아버지 슬하에서 살 때가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로 돌아온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한없이 기뻐하며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목욕을 시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히고, 손에는 금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으로 나가려는 못된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하나님을 멀리한 죄악을 자유와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야곱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께 드린 스스로의 맹세를 잊어버리고 세상 물욕에 눈이 어두워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세겜이란 지명이 뜻하듯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분적 순종을 하면서 행복을 꿈꾸었습니다. 그러한 야곱의 꿈은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딸은 이방에게 욕을 당했고, 이에 격분한 아들들은 복수의 피를 흘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식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천하를 얻은들 자식이 잘못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곱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실패한 야곱을 다시 찾으셔서“다시 일어나 벧엘로 가라”하셨습니다. 여기 있지 말고“하나님의 집”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전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성전에서 봉사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비싼 대가를 치룬 후에야 하님의 뜻을 깨닫고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욕망, 자기의 고집을 버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을 보신 하나님은 지난날의 불순종을 전혀 탓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一. 아름다운 이름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9~10절 말씀에“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발뒤꿈치를 잡다.”“빼앗다.”“속이다.”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날까지 이름처럼 어리석은 형의 것을 빼앗고, 눈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며 살아왔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대로 자신도 외삼촌에게 품삯을 열 번이나 속았습니다.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야곱이란 이름대신“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개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뜻은“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을 당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야곱을 대항하여 이길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고쳐진 이름을 후손들은 지금도 이스라엘 국명(國名)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국토는 우리나라 강원도 넓이 정도 됩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포함해도 인구가 1천5백만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입니다. 불멸의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작지만 실질적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강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까?
사람의 본능중 하나가 명예욕입니다. 그래서“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명예라는 것은 단순하게 이름만 날리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에는 반드시 부와 영광이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정치하는 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하며 환호도 하지만 부와 영광도 누리지 않습니까?
이처럼 명예는 부와 영광을 안겨주고, 살아온 삶의 보람이 있고, 후손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낍니다. 이웃에게는 존경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업적을 과장하기도 하고, 학력과 학위를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거짓이 밝혀져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1999년도에 어머니 칠순 기념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금강산에 갔을 때, 금강산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김일성 수령 만세”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내자가 설명하기를 바위에 그 글씨를 새기는데 사용된 포탄이 7천여발이나 되었고, 그 탄피를 4천여 대 트럭에 실어 날랐다고 했습니다. 글씨의 크기는 한 획 속에 4~5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카드놀이를 할 만한 크기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김일성 수령이라고 자신을 신격화하여 그의 이름을 백성들의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이처럼 명예에 집착하는 까닭은 명예에 대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겜에서 실패했던 야곱이 하나님의 집 벧엘에 머물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중심하여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동일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신명기 28:1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현제도 세계가 우리나라를 주목하고 있지만, 지난 1월 2일자 일간지에 가슴 벅찬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과 고려대 아세아 문제연구소의 연구결과였습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우리나라의 기술력과 자본, 북한의 노동력과 자원이 결합하여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15년 뒤인 2030년에는 우리나라의 국민소득 3만5700달러로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G7 대국”이 될 것으로, 또한 향후 25년 뒤인 2050년이 되면 국민소득 8만 달러를 넘어 경제력 세계 4위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통일을 전제로 한 예측입니다. 만일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거대한 양로원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사명이 중요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며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축복에 대해 신명기 28:1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하셨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벧엘 즉 성전을 중심하여 살아갈 때 한하여 그런 날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개했던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비상(飛上)하기 시작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는 날부터가 아닙니까?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나라에는 학교나 병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웠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기적적인 축복을 몰고 온 바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세계에서 한국교회 만큼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이토록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우리가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 복된 신앙을 잘 지키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최근 일본의 행태를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일본에게 짓밟히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게 짓밟히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강한 힘은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 장군을 물리친 다윗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시편 18:1~2에 말하기를“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새해에도 변함없이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잘 받들어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지키시며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삶의 승리자로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 세상에서의 축복은 온 마음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섬길 때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신앙이 우선입니다. 성전 중심의 삶이 우선입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왕(父王)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열왕기상 3:5)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솔로몬이 대답하기를“지혜로운(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열왕기상 3: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솔로몬을 보시고 더없이 기뻐하시며 복을 약속하신 말씀이 열왕기상 3장 11절~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솔로몬에게 하나님은“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복 받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삶의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축복받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벧엘 즉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축복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야곱이 하나님의 집, 벨엘에 머문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전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세계역사가 이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집 벨엘 즉 성전은 축복의 샘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二. 후손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1절~12절에“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네 후손이 번성하리라”“네 후손 가운데 왕들이 계속 나오리라”“네 후손들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입니다. 벧엘을 중심하여 살아가면 후손이 번성하고, 후손이 권세를 누리고, 후손이 풍족한 삶을 살아가도록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약속입니까? 야곱에게 하신 이 축복의 약속은 문자적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이 되었고, 야곱의 아들가운데 유다를 통해 이스라엘 나라 왕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 야곱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지금도 야곱의 후손들이 차지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농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식농사의 성공비결에 대해 시편 112:1~2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자식이 강성하고 잘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흔히 자식을 위해 유산을 남기거나, 높은 지식을 갖춰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러한 것들도 소중하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탈무드에“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지 말고 빵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라.”고 했습니다. 몇 조각의 빵은 잠시 후면 다시 배가 고프게 됩니다. 그러나 빵을 만드는 기술은 평생 굶주림을 면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11절에“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섬기되 벧엘에서 섬기면 자녀들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을 때, 영국의 한 신문이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다루었습니다. 그 신문 내용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친 교사들을 모두 조사해 “위대한 스승들.”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그때 처칠은 신문사에 편지 한통을 보냈습니다.“귀 신문사에서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 한 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신 나의 어머니는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 낸시는 아들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매일 성경을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링컨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간단했습니다.“아들아, 매일 성경을 묵상하라. 어려운 일이 닥칠 때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어머니의 유언을 일생동안 잊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 험한 역경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깊은 신앙유산이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된 길자연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늘 아버지의 유품인 낡은 외투를 입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교회 장로로 추운 겨울에도 항상 그 외투를 입고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의 향기가 배어있는 그 외투를 입고 가서 기도하면 소망이 생기고 힘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값진 신앙의 유산입니다. 이러한 장로의 아들이 목회에 크게 성공하고, 명문신학대학교 총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씨앗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부모인 야곱이 세겜에 머물었을 때 자손들에게 화가 임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벧엘에 머물자 하나님은 자식의 축복을 약속하셨고, 약속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의 거울이며 축복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주의 성전 벧엘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성전 즉 벧엘에서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벧엘을 통해 또 다른 영혼들이 돌아와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벧엘 즉 교회를 중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를 사랑하시며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아름다운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후손들이 잘되게 하십니다.
야곱의 삶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집 벧엘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시는 복된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