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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신기하게도 결혼한 지 20년, 30년이 지난 여러 부부들을 보면 말과 행동뿐 아니라 심지어 외모까지 닮은 것을 보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이렇게 닮았냐며 친남매보다 더 닮았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부는 세상살이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 여러 일을 함께 경험하며 세월을 보내었기에 생각도 비슷해지고 가치관도 닮으며 외형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도 비슷해집니다. 식습관과 생활습관도 비슷하기 때문에 노년에는 발생하는 성인질환도 비슷한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한 지 올 해로 19년, 내년이면 꼭 20년을 채우게 됩니다. 이 세월을 살아오면서 너무나 달랐던 가치관, 너무나 달랐던 언어와 행동 습관, 너무나 달랐던 입맛, 이런 것들이 비슷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결혼 전 저는 탄산음료를 마시면 꼭 콜라를 기본적으로 택했는데 아내는 탄산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마신다면 사이다를 마셨습니다. 결혼 후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탄산음료를 마시게 되면 사이다를 마십니다. 이런 것 이외에도 돈의 수입,지출에 대한 가치관, 말씀을 보는 관점, 세상 일에 대한 분석과 해결방안 등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젠 너무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안 맞는 부분도 많아 종종 언쟁이 일어나고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점점 더 맞춰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전에는 다른 존재, 다른 세상, 너무나 다른 환경속에서 살다가 이젠 같은 공간, 동일한 환경속에서 한 몸이 되어 모든 일을 같이 생각하고 같이 해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앞 부분 말씀인 마태복음 5장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함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닮아가며 거룩함을 추구하고 온전함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온전함을 이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절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주 예수님은 절대 이룰 수 없는 수준의 말씀을 왜 주셨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어느 순간 우리는 완전히 수준에는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함께 하며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속에 함께 하시기에 내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의무가 등장합니다. “구제와 기도, 금식”입니다. 유대교의 경건 생활에서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은 유대인이라면 꼭 지켜야 할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것을 몰라도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거룩하게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삶속에 거룩하지 못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시며 완전한 의의 삶을 이루기 위한 분명한 원칙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변에 있는 사람,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며 구제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변에 우리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섬기고 도움을 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방식대로 도와주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구제를 행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구제를 하기 위해 첫째로 원칙이 바로 서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바른 구제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원칙이 바로 서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생활을 할 때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원칙을 가르쳐주시는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여나 ‘내가 사람들을 의식하며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의”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옳은’이라는 의미 ‘right’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수평적 의’라기 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수직적 의’를 의미합니다. 수직적 의와 수평적 의가 구별은 될 수 있지만 분리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앞에 ‘의’를 가진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의’를 행하는 것이 참 신앙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이 수평적 의인지 수직적 의인지 분명하지 않다 할지라도 동일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의’라는 단어를 하나님에게 신앙으로 볼 수 있는 ‘거룩’ 이나 ‘경건’으로 바꿔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경건을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경건을 추구할 때 우리의 경건의 목적은 분명 ‘하나님’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참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람의 의식하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사역을 하나님앞에서 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의식하며 진행하게 될 때 우리는 그 가치가 변질되고 그 모든 행동의 순수성이 변질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선한 행위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놓고 그 결과로 내가 영광을 취하게 된다면 내가 돋보이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내 영광으로 취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도와주는 구제사역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고 칭찬받고 인정받으며 내 명예가 높아지려고 하고 개인의 이미지를 개선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그런 의도와 목적을 가진 구제는 엄밀하게 선한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거룩한 일, 거룩한 신앙생활을 외식하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외식’이라는 것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는 뜻의 외식, ‘바깥 외 꾸밀 식’입니다. 예수님 당시 겉과 속이 다르고 완전히 거룩한 척 살아가지만 전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율법을 해석하며 율법을 가르치는 직책을 가지고 말씀을 무기로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삼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을 돕고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이웃을 돕고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이 일에 대해 ‘내적 동기’의 중요성을 가르치십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유대교 지도자들의 구제가 왜 외식하는 행위였을까요? 그들은 ‘구제’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 인격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은 이중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형식을 취하지만 원칙을 무시하고 본질을 외면하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그들은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 7,8절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떠나야 합니다. 외식하며 신앙생활하던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서기관들과는 구별되는 참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실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목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1절을 다시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착한 행실 자체에 대해 문제성을 지적하시지 않고 그 행실의 동기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상을 받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착한 행위를 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상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 자랐던 교회는 그 당시에도 거의 1만 명이 모이는 교회였는데 그렇게 큰 교회에서 이상하리만치 시상식, 공로패 증정 등의 공적을 시상하는 행사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엄청나게 큰 행사를 진행하고 행사가 끝이 났는데 수고한 사람에게 공로를 치하할 법한데 그 당시 담임목사님이셨던 정필도 목사님은 그런 공로에 대한 시상에 인색했습니다. 언젠가 그 부분에 대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교회에서 뭘 했다고 박수치고 높은 자리에 올려주고 인물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 결국 그 분이 하늘에서 받을 상을 이 땅에서 가로채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땅에서 박수받고 인정받으면 저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그 교회는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였기 때문에 유명 정치인이 찾아오고 성도중에서 정치권에 출마하여 시장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는 곳이 아니라”며 “교회에서는 절대 사람이 자기 자랑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성도가 부산시장이 되어도 교회에 오면 시장으로 뻣뻣하게 있으면 안되고 교회에서 차량주차봉사, 교회안내봉사, 청소봉사,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 대원 봉사 등등 섬기도록 했습니다. 시장이든 국회의원이든 모든 성도는 동일하게 하나님앞에 섬기는 일을 하도록 했고 세상의 지위는 드러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저는 그런 목사님에게서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런 얘기를 들어왔기에 어떤 사람에 대한 시상하는 일, 공로를 밝히며 박수쳐주는 일을 잘 못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쩌면 칭찬에 인색하고 사람들을 세워주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집사람이 제게 종종 이렇게 지적합니다. ‘다른 사람 칭찬도 좀 해주고 사람들앞에서 그 사람 추켜 세워주기도 하고 공로를 밝히며 박수도 좀 쳐주고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사람 좀 높여주라’ 등등 이런 류의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이제 조금 사람들을 세워주고 칭찬도 해주고 공로를 밝히며 박수도 쳐주는 일을 종종 하는데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게 혹 하늘 영광을 가르고 사람들을 세워주는 일이 되는 듯해서 어느 선까지 해야하는 지 참 많은 고민을 하며 축하자리, 칭찬자리, 시상자리를 만듭니다. 그래서 좀 어정쩡한 축하, 어정쩡한 시상자리가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선한 일을 할 때 분명히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에게 상받기 위해 구제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의 삶속의 신앙의 의무로서 구제행위가 있고 우리는 분명히 구제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2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사도행전 6장 1절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도 구제 행위는 매우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구제사역 자체는 교회의 경건을 추구하는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런 사역을 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할 뿐,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영광을 내세우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자신의 의를 과시하는 것이 구제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며 그들에게 선한 나눔의 사역을 감당할 때 원칙을 바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원칙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구제행위를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든 안 받든 사람들이 나의 선행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만 나를 알아주시면 된다라는 사실이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라면 잘 한 일이다라는 가치관을 세우고 바른 원칙의 구제사역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구제를 하기 위해 둘째로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절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눈치를 보며 칭찬받기를 기대하고 인정받기 위해 구제사역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평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외식하는 자들’로 지칭된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마치 하나님을 위해 구제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자신을 드러내개 위해 큰 소리내며 나팔불 듯이 요란하게 봉사활동을 합니다. 어쩌면 이런 삶은 지금 이 시대 우리들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PR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자신이 보답받고 인정받게 되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교회 좋고 자신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제활동의 장소에 대해 명시하고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회당과 거리”입니다. 회당과 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회당과 거리는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입니다. 즉 공개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여론이 모아지고 관심이 집중되는 곳입니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모여 있는 사람들은 “우와, 저 사람은 저렇게 남을 많이 도와주네 참 하나님앞에 경건한 사람인가보다” 혹은 “저렇게 많은 액수를 이웃을 돕는 일에 쓰다니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앙인이네” 결국 신앙수준을 공개적 구제활동을 통해 보여주며 자신의 거룩한 모습, 자신의 긍휼의 마음을 외형적으로 보여주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주 예수님은 이런 공개적 구제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도움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시끄럽게 공개행사를 하는 곳에 가면 몰라서 도움을 못 받을 일도 없어 좋을텐데 왜 이런 방식을 책망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구제행위 자체보다 나팔불며 홍보하며 자신을 높이는 이벤트성 구제활동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시끌벅적 구제활동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만족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구제활동을 하는 것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도 여러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전쟁으로 인한 피해등이 생기면 연예인들이나 기업가들, 여러 단체들이 방송국에 자선기금을 보내고 복구지원금후원을 합니다. 누가 얼마를 냈고 누가 얼마를 냈고 이름이 올라옵니다. 물론 그런 헌신도 정말 귀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렇게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나는 곳, 공개적으로 이름과 금액을 알려주는 곳에 돈을 보낼까요? 어쩌면 그 행위로 인해 자신의 이름, 자신의 기업, 자신의 단체가 돋보이고 결국 이런 이미지 개선을 통해 명예와 가치가 올라가고 사람들에게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바른 구제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여유가 될 때 우리가 능력이 될 때 구제활동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구제하는 일은 상황이 되든 안 되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이 구제사역을 우리가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목적이 바르게 서야 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결국 자신이 할 도리만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누가복음 21장 3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보신 두 렙돈,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 이 과부가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칭찬을 받았습니다. 단돈 몇 천원 가치밖에 안 되는 돈을 헌금함에 넣었는데 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칭찬하셨을까요? 바로 앞에 수 천 만원, 수 백 만원을 헌금한 부자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의 내면을 보시며 우리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 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지만 그 일을 하면서도 의도와 방법,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면서 목적을 제대로 알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면서 나를 드러낼 목적, 내가 인정받을 목적으로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일을 해놓고도 잘못된 일을 한 것이 됩니다. 일을 해놓고도 욕먹을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목적이 바른 구제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구제를 하기 위해 마지막 셋째로 보이지 않고 조용히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바른 구제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중에 행해야 한다고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주고 이웃을 섬겨줄 때 동기와 방법이 순수해야 합니다. 동기는 좋은데 방법은 잘못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그 방법도 순수해야 하는데 순수함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은밀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며 은밀한 중에 섬기고 은밀한 중에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할까요? 행여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주실 것이 바른 믿음이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제 친구 선교사님을 후원하면서 좀 실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 목사 부부가 선교지로 나가기 직전에 친한 사람들을 불러 식사자리를 마련했는데 제 친구 선교사 부부와 제 후배 목사 부부와 저희 부부 총 여섯 명이 식사를 했습니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축하하고 기도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든 시간이 끝나고 이제 헤어지려고 할 때 제가 ‘선교비에 보태라’고 선교후원봉투를 건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 목사는 그 자리에는 따로 후원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제가 봉투를 내밀자 약간 멋쩍어 했습니다. 제 마음 한 켠에는 후배목사이기에 선교사후원은 무조건 하는거다 너도 선교비 후원 좀 해라는 의미로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제 친구 선교사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생각해보니 괜히 “저만 잘난 체, 저만 좋은 일 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나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세상에서 ‘나를 좀 봐달라’ 혹은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나에게 이렇게 보상해라’라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느 누가 나를 인정해 주고 나의 섬김, 나의 봉사에 감사를 표시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 신앙은 우리가 그런 것을 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보상하시며 신앙 보물을 쌓아두시는 것을 기대해야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20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대접받고 인정받고 살아갈 때 결국 그것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았기에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늘에 쌓인 보화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하면 나를 드러내지 않고 선한 일을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을 할까?’라는 고민을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참 신앙생활을 해야할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상을 주시며 하늘에 보화를 쌓아주실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은 알렌이 세운 제중원으로 시작된 병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알렌병원’이 아니라 ‘세브란스병원’일까요? 1900년에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가 알렌선교사에게 조선에 신식 의료시설을 갖춘 현대식 건물을 지어 조선 최고의 병원을 만들어 의료선교를 감당하라며 거액의 돈을 기부했습니다.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는 록펠러의 친구이며 미국 록펠러재단의 초기 창업자중 한 명으로 스탠다드 오일 회사를 함께 창업한 인물입니다. 그 후 약 50년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 이 세브란스병원에 또 엄청난 금액을 기부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의 아들 존 세브란스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나 존 세브란스, 둘 다 세브란스 병원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병원의 지분을 요구하거나 병원의 인사권에 관여하려는 의도는 없이 단지 한국의 의료선교를 위해, 한국에서 병과 싸우는 여러 환자의 생명 연장을 위해 돈을 보내고 각종 후원을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며 살되 기억하지 말고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행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7~4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의인,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자신의 선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냥 하는 것이지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냐를 따지며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혜택을 받을 것인지를 따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내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내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결국은 내 먹고 살 궁리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음을 받은 목적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 삶은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하게 구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 삶 속에서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게 될 때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런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이 보면 주고 안 보면 안 주는 사람이 아닌 은밀히 그들을 잘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구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이웃을 돕고 섬기는 구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구제사역을 하게 되면 우리에게 반드시 상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상을 우리를 위해 받을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을 것인지는 우리는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구제와 섬김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일해도 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제할 때 목적이 불순하다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순한 의도로 했던 구제와 봉사로 인해 세상에서는 대접받고 인정받게 될지 몰라도 그것이 끝입니다. 세상적인 영광만 누릴 구제활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제, 우리의 봉사, 우리의 섬김과 나눔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 내 명예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입니다. 나머지 상급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 그것은 세상에서 받은 상이 되고 하늘에서는 상이 없어질 것입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람들은 나의 선행을 몰라줘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신다면 하늘에서 큰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구제와 봉사, 섬김의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거룩한 삶, 경건의 생활, 참다운 신앙생활은 모양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능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양만 있거나 능력만 있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양을 갖추고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양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능력이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각종 신앙적 활동을 하는 것이 참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활동속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내면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운 섬김이 나타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하심만 바라보며 참 아름다운 구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며 순수한 신앙으로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