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화담(徐花潭)의 이름은 경덕(敬德)이고, 자(字)는 가구(可久)로, 타고난 자질이 상지(上智)에 가까웠다. 시골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다. 소강절(邵康節)의 《주역(周易)》에 더욱 깊어 그가 알아 낸 《황극경세(皇極經世)》의 수가 한 가지도 틀림이 없었으니, 기이하도다. 가령 중국에 태어나서 대유(大儒)와 함장(函丈)[《예기(禮記)》에 석간함장(席間函丈)이란 말이 있고 그 주(註)에, “함(函)이란 용납한다는 뜻으로 학문을 가르칠 적에 선생과 청강하는 제자와의 거리가 한 길쯤 떨어진다는 것이다.”하였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함이 지금의 조예에 그칠 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복희씨(伏羲氏) 《주역》의 방법을 아는 자는 우리 나라에 이 한사람뿐 이었다. 시(詩)가 있었으니,
글 읽던 당일에 세상 다스리길 뜻했는데 / 讀書當日志經綸
느지막하게 도리어 안씨(顔氏)의 가난을 달게 여기네 / 歲暮還甘顔氏貧
부귀에는 경쟁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 / 富貴有爭難下手
임천이야 금하는 이 없어 가히 안식할 수 있네 / 林泉無禁可安身
산에서 나물 캐고 물에서 고기 낚아 배를 충분히 채우고 / 採山釣水堪充腹
달을 노래하고 바람 읊으니 정신이 상쾌해라 / 詠月吟風足暢神
학문이 의심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야 참으로 쾌활하니 / 學到不移眞快活
백년을 헛되게 사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 / 免敎虛作百年人
하였으니, 그 뜻의 있는 바를 상상할 수 있겠다.
○ 성대곡(成大谷)의 이름은 운(運)으로,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 일찍이 세상에서의 틀을 벗어났는데, 그의 형 성우(成遇)가 을사년 난을 당해서 비명에 죽자 이로부터 더욱 시속 공명에 뜻이 없어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아래에 숨어 살다가 나이 80여 세에 죽었다. 시(詩)도 그 인격과 같아서 충담(沖澹)하고 한아(閑雅)하여 서호 처사(西湖處士 임포(林逋))의 남긴 운치가 있었다. 그 시구(詩句)의 아름다운 것 중에,
봄옷이 몸에 알맞아 두 소매 짤막하고 / 春服稱身雙袖短
옛 거문고 손에 익어 일곱 줄이 길어라 / 古琴便手七絃長
10년 동안 산 속에 있는 약을 모두 맛보았으니 / 十年賞盡山中藥
손이 오면 내 입 속의 향기를 맡으리 / 客到時聞口齒香
하였고, 그가 남명(南溟) 조식(曺植)을 전송하는 시에,
아득아득 기러기 남해로 향해 나니 / 冥鴻獨向海南飛
때는 정히 가을 바람 나뭇잎 떨어질 무렵일세 / 正値秋風木落時
땅에 가득한 벼와 기장은 닭과 따오기가 쪼아 먹는데 / 滿地稻梁鷄鶩啄
푸른 구름 하늘 끝에 스스로 기심을 잊었네 / 碧雲天末自忘機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이 몹시 많다.
○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조중봉(趙重峰)을 곡(哭)한 글에 말하기를, “슬프다, 여식(汝式)이여! 공자(孔子)ㆍ안자(顔子)를 배우고 가의(賈誼)ㆍ굴원(屈原)을 사모하여 곧게 죽으려 하더니 마침내 절개에 죽었도다. 슬프도다, 여식(汝式)이여!”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지언(知言)이라고 했다.
○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이 무오년 봄에 대비(大妃)를 폐하는 것을 간하니, 당시 의논이 그를 장차 극형에 처하고자 하여 하수인들을 시켜 상소하여 머리를 베자고 청한 글이 하루에 서너 번씩 올라갔다. 대사헌 이각(李覺)과 대사간 윤인(尹訒) 등이 외딴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처음 관서(關西)로 귀양갔는데, 권간(權奸)들이 또 하수인들을 시켜 먼 변방으로 보내자고 청해서 육진(六鎭)으로 옮겼다가 또 삼수(三水)로 옮겼는데, 임금이 특별히 북청(北靑)으로 옮겼다. 성을 나가는 날, 절구 한 수를 짓기를,
햇빛이 흐려 대낮도 어두운데 / 白日陰陰晝晦微
북풍이 불어 나그네 옷이 찢기네 / 朔風吹裂遠征衣
요동 성곽들 응당 의구하련만 / 遼東城郭應□□
정령위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하노라 / 只恐令威去不歸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영상(領相) 덕양(德陽) 기공(奇公)과 첨추(僉樞) 정홍익(鄭弘翼), 정언(正言) 김덕함(金德諴)이 모두 바른말을 하다가 북쪽 먼 곳으로 내쫓겨서 함께 떠나가니, 국맥(國脈)이 이 걸음으로 인하여 끊어진 셈이다. 그때 옥당의 장관(長官)은 정조(鄭造)였다. 우리 나라 역대 임금의 문필로 말하면 문종(文宗)이 으뜸이고, 성종(成宗)ㆍ선조(宣祖)의 글도 출중해서 한 무제(漢武帝)나 당 태종(唐太宗)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문종이 지은 제극성문(祭棘城文)을 보면, “정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하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하였으니, 비록 원숙한 유학자라도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리오. 종영(宗英 종실 중 우수한 자) 중에는 시 잘 짓는 자가 또한 많은데, 풍월정(風月亭 성종대왕의 형님 이정(李婷))이 제일이고, 성광자[醒狂子 이심원(李深源)]와 서호주인[西湖主人 이총(李摠)]이 그 다음이다. 그런데 기묘년 화에 배척을 받은 자가 계사년에 이르러 차츰 풀리기 시작하여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이 풀렸고 인종(仁宗)이 즉위하고 나서 크게 풀렸다. 마침 인종이 승하하여 다 신원(伸冤)되지 못한 자는 선조(宣祖) 초년에 이르러 비로소 신원하는 은전(恩典)을 널리 폈고,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은 죽은 뒤에 삭직(削職)했으며, 정암(靜菴) 이하 여러 어진 이들은 차례로 증직(贈職)했다. 이것은 60년 뒤의 일로써 죄주고 상준 것이 모두 죽은 뒤의 일이니, 아, 슬픈 일이로다. 그러나 또한 지사(志士)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다.
○ 을사년의 화는 명종(明宗) 말년에 이르러 비로소 풀렸고, 선조가 즉위한 11년 정축에 위훈(僞勳)을 삭제했으니 또한 하늘에 계신 인종의 영혼을 위로함이 되었다. 을사년 화를 치르고 남은 사람은 백인걸(白仁傑)ㆍ노수신(盧守愼)ㆍ이담(李湛)ㆍ민기문(閔起文)ㆍ김난상(金鸞祥)ㆍ유희춘(柳希春) 공 등 몇 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조정에 벼슬해서 혹 공경(公卿)이 되고, 혹은 관각(館閣)의 장이 되어 성하게 세상에 쓰였으니 선조 초년의 정치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이 되었다.
○ 명종(明宗) 정미년에 정언각(鄭彦慤)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어 양재역(良才驛)을 지나노라니 역 벽에 익명(匿名)으로 된 글이 붙어 있으므로 정언각이 이것을 도려다가 변고를 아뢰어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만들어 일시의 명현(名賢)들이 죽음을 당하는 자가 서로 계속되었다. 이 공으로 해서 정언각은 부제학(副提學)을 제수받았는데, 어느 날 조정에 나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한 발이 등자(鐙子)에 걸린 채 그 말이 정언각을 끌고 거리로 달아나 밟히고 부딪쳐 뼈와 살과 얼굴이 뭉개져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 응보(應報)가 빠른 것을 통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 자손들은 창성해서 지금 바야흐로 세력이 혁혁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계해년 반정(反正)한 뒤에 그 자손 중에 높은 벼슬에 있는 자는 혹 죽임을 당하거나 혹 관노(官奴)가 되기도 하였다.
○ 을사사화에 먼저 기미를 알고 행동한 자는 김하서(金河西)한 사람으로 너무도 우뚝하여 따라갈 수가 없고, 일에 당해서 꺾이지 않은 이는 찬성(贊成) 권발(權潑)과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나면서부터 남과 다른 재질이 있어 신동(神童)이라고 불렸다. 처음 벼슬하여 조정에 들어가 대절(大節)이 있더니, 을사년 화가 일어날 때에는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원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는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생을 마쳤다.
○ 열경(悅卿) 김시습(金時習)은 우리 나라의 백이(伯夷)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그의 풍도를 듣고 일어난 자일 것이다. 김시습의 위천지간도시(渭川持竿圖詩)에,
바람과 비가 쓸쓸히 낚시터에 불어 오니 / 風雨蕭蕭拂釣磯
위천의 어조가 기심을 잊었네 / 渭川魚鳥可忘機
어찌해서 늘그막에 용맹한 장수가 되어 / 如何老作鷹揚將
부질없이 백이ㆍ숙제로 하여금 고사리 캐다 주려 죽게 하였나 / 空使夷齊餓採薇
하였다. 추강(秋江)이 중에게 지어준 시에,
세상은 침침하고 지옥은 깊은데 / 人世沈沈地獄深
무슨 일로 무릎 꿇고 관세음보살을 외우는가 / 跏趺何事念觀音
이름을 벼슬길에 구하자니 풍파가 사납고 / 求名宦海風波惡
낚싯대를 가을 강에 드리우니 습기가 침노하네 / 把釣秋江瘴濕侵
성정을 다스리려면 세상 풍교 어겨지고 / 欲理性情違世敎
생산을 꾀하자니 처음 마음 저버리네 / 謀營生産負初心
《참동계(도가 위백양(魏佰陽)이 저술한 책이름)》나 손에 들고서 / 不如手執參同契
쓸쓸한 단풍나무 숲에 돌아가 누우려네 / 歸臥蕭蕭楓樹林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 시들을 보고 많이 감탄하였다. 열경은 스스로 매월당(梅月堂)이라고 호(號)를 지었다.
○ 추강(秋江)은 어려서 가업(家業)을 버리고 열경과 어울렸다. 어느 날 열경이 추강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종(世宗)의 두터운 대접을 받았으니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公)은 나와는 다른데 어찌 살아갈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하니, 추강이 말하기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일은 천지의 큰 변이니 현덕왕후를 회복시킨 뒤에 과거에 응시해도 늦을 게 없다.”하였다. 열경이 다시는 강권하지 않았다 한다.
○ 선조가 즉위해서 드디어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불렀다.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몸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쓰니 조정 안에 맑은 의론이 한창 일어나고 또 소인들의 가림이 없으니 사서인(士庶人)들 역시 모두 감화되어 사모하고 선비들이 위로 성명(性命)을 말하고, 아래로 예용(禮容)을 갖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계속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모두 한때에 일어나서 비록 원기(元氣)가 잠깐 흐려졌지만 풍속이 크게 변했다. 이 두 분이 한 분은 죽고 한 분은 배척당하니 세상에는 학문을 말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 우리 나라에 유종(儒宗)으로 세상의 모범이 된 이는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ㆍ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ㆍ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ㆍ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ㆍ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이가 아, 이들 다섯 사람뿐이었는데, 이 중에서 죽임을 당한 이가 3명이고, 귀양가서 죽은 이가 1명이고, 퇴계만이 겨우 천명대로 살았다.
그러나 퇴계도 중년에 그 형 대헌공(大憲公) 이해(李瀣)의 화를 입어 당시에 삭직당하고 내쫓겨서 외직(外職)으로 전전하고 초야에서 지냈다. 비록 늦게 제수되어 선조가 크게 쓰려 했으나 공은 이미 늙었으니 세도(世道)의 아름답지 못함을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죽은 뒤에 추숭(追崇) 또한 무슨 도움이 되리오.
○ 물화(物貨)가 통하고 막히고 쇠하고 흥하는 것도 때가 있다. 우리 동방(東方)에는 은광(銀鑛)이 많기 때문에 고려 말년에 중국이 많이 요구해서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조(我朝) 초년에 여러 번 중국에 은자(銀子) 바치는 것을 면제받고자 아뢰어 허락을 얻고 보니 그것을 국화(國貨)로 사용할 수도 없으므로 역대의 임금이 그대로 지켜서 마침내 은(銀) 캐는 것을 금하고, 법령의 맨 첫머리에 나타내서 심지어 역관(譯官)이 명 나라 서울에 갈 적에 만약 사사로이 싸 가지고 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그 죄가 죽이는 데 이르렀다. 그 후 2백 년을 지나 임진년 왜란에 이르러 중국에서 은(銀)을 우리 나라에 나누어 주고, 군량(軍糧)과 군상(軍賞)도 모두 은을 썼다. 이로써 은화(銀貨)가 크게 행해져서 중국과의 통상무역 금지법이 폐지되고 거행되지 않으니 시정(市井)에 매매하는 무리들도 딴 재물을 모으지 않고 오직 은이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부자를 따졌다. 오늘날에 이르러 탁지(度支 호조(戶曹))의 경비와 중국의 주청(奏請) 및 조사(詔使)의 접대 등의 비용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 은값이 마구 올라가서 민간에서 매점하는 자가 크게 이익을 보았다. 조정에서의 탐관오리들의 뇌물 거래도 이것이 아니고는 딴 길이 없으며, 관작을 임명받는 것이나 형벌을 면하는 데에도 모두 이것으로 소개를 하고, 심지어는 대궐문에까지 들어가 진(晉) 나라 공방(孔方 돈의 별명)과 서로 비슷하니, 세변(世變)의 유행을 막기 어려움을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