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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逆境)의 세월
친구 대여섯 명이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만납니다. 매월 두번씩 산행과 둘레길을 함께 하는 백년지기 중고교 동기들입니다. 장충단 공원을 통과 하여 남산으로 향하는 날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이곳이 아픈 추억과 정(情)이 들은 곳입니다. 그 당시에는 허허벌판으로 축구경기도 즐기던 장소입니다. 정이들고 아픈 추억도 간직한 곳입니다. 학교 월사금을 제 때 납부 못하면 집으로 돌려보내던 시절입니다.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고 월사금은 입도 뻥끗 못하는 처지입니다. 하교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공원과 남산 골짜기를 헤매기도 합니다. 애꿎은 나무를 걷어차며 분풀이도 합니다.
" 안게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끌어 안고 울고만 있을까 " 실연(失戀)에 젖은 청춘들이 서글프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던 곳이기 합니다. 남산 팔각정을 오르고 남산 도서관 방향으로 하산합니다. 명동을 거쳐서 을지로 5가 맛집으로 들어섭니다.
시원한 한 잔이면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릴 거라고 생각하며 생맥주집으로 찾아 듭니다.
권주가에 맟추어 완샷을 하려 했으나 두 모금에 목에 걸립니다. 울컥 눈물이 시야를 가리며 두 손으로 눈을 눌러 보지만 흐르는 눈물의 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속으로만 삼키던 억울함의 흐느낌이 울음으로 바뀌어 속절 없이 울고 있습니다. 지금껏 짓누르며 참았던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이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옵니다. 한국 6.25 전란(戰亂)은 한 민족의 비참하고 참혹했던 아비규환(阿鼻叫喚) 그 자체였습니다. 피난 시절의 아픔은 철없는 어린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살아 있습니다. 뇌리에는 낡아 빠진 흑백의 활동 사진이 덜덜거리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시절 그 속의 주인공들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 누나 둘 모두 여섯입니다.
서울 한양 성곽길 남산을 오르고 하산하면서 눈에 들어 오는 영락 교회로 들어 갑니다. 일곱 살 피난 나오다가 한강 철교가 끊기는 바람에 우리 가족이 며칠 동안 머물렀던 곳입니다. 교회 앞에 서서 한참을 올려다 보니 1.4후퇴 당시의 초췌한 내 모습이 앞을 가립니다. 고작 일곱살이던 어린 가슴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이 되어 있었나 봅니다. 세월이 65년이나 흐른 지금에도 이 노객의 가슴을 휘저어 놓습니다. 예배당 안에는 수많은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말 그대로 난장판입니다. 가마니 한 장씩을 바닥에 깔고 어머니 아버지 큰 누나 작은 누나 남동생 여섯 식구가 앉기에도 턱 없이 비좁은 자리입니다. 젖을 보채는 아기에게 엄마 젖을 물려 보지만 며칠을 굶었으니 젖이 나올리가 없습니다. 밥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아이와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처절함을 떠나 스산함 느낌 마저 듭니다. 더 이상 걷지 못하겟다는 노인들의 신음 소리도 마치 장송곡처럼 넓은 예배당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이처럼 웅장한 교회를 수 없이 많이도 세우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삶의 밑 바닥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저들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는 것인지 묻습니다. 예배당을 가득 메웠을 그 많던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요단강을 건너 저 세상 하늘 나라로 가면 천당이 있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텐데 그토록 죽음을 피하고 두려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일요일이면 무조건 에배당에 엎드려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해야만 하나님의 자식인지도 묻고 싶습니다. 겉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이며, 사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인과 관계를 위한, 마지 못해 선택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봅니다. 마음의 혼(魂)이 빠져나간 육체만의 자신을 기만하는 행동일 뿐인 것도 같습니다.
기독교 뿐이 아니라 불교, 알라를 단일 신 하나님으로 믿는 이슬람교(회교,마호메트교)는 각기 경전은 다르지만 종교라는 측면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믿는 종교인의 숫자는 세계 인구수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지구 상의 모든 인간들이 종교인들에 속하지만 어찌하여 이 세상은 끝없는 반목과 질시로 살육과 전쟁이 생활화가 되었는지 이해 불가합니다. 이 노객의 머리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머리가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인현 시장을 지나서 바로 길 건너에는 낯이 많이 익은 교문이 눈에 띄입니다.바로 내가 졸업한 영희 국민 학교 교정입니다. 교문을 들어 서니 마음은 금방 60년 전의 국민 학생 신분으로 돌아 갑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가슴에 품고 교문으로 향합니다. 선생님들이 쭈욱 도열하여 환한 미소와 박수로 졸업을 축하해 주시고 있습니다.
"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는 졸업 노래 소리가 바로 엊그제 같습니다. 같은 반 내 짝꿍 녀석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얼굴이 동그랗고 눈이 똘망 똘망하고 활달한 친구였습니다. 그 교정 그 건물은 거의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남구 일원동으로 이전했습니다. 1 ㎡ 크기의 표지석만이 1957년도 졸업 후에 처음 찾은 대 선배를 맞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가족의 첫 피난처는 충청남도 계룡산 밑에 두계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다시 대전에서 성남동 홍도 국민학교를 5학년 1학기 까지 마치고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난생 처음 서울 하늘 아래에는 아는 이 하나 없고 그저 막막할 따름 입니다. 소리 소문에 찾아 간 곳이 바로 지금의 오장동 중부 시장 자리입니다. 피난민들이 20여 가구 판잣집에서 옹기 종기 붙어서 힘에 겨운 하루 하루를 보내던 곳이기도 합니다. 아침 마다 공중 변소에는 사람들이 부시시한 몰골로 차레를 기다리는 모습이 처절하가만 합니다.
그 당시는 화장실이라는 말은 없었는지 몰라도 변소便所)라고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변소 청소 당번은 지각이나 숙제를 안해 온 학생의 단골 메뉴였습니다. 똥통으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구역질이 나는 모두가 기피하는 벌칙이었습니다. 틈새가 많아 들여다 보이는 한 사람이 겨우 쪼그리고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밑은 훤히 뚫리여 겨울에는 찬 바람이 온 몸을 휘감으며 팔 다리가 얼어 저려 옵니다. 그저 황량한 벌판에 버려져 있는 느낌입니다. 판자로 만든 발판은 빙판이 되어 미끄러운 위험한 좌불안석입니다. 화장지라야 세멘 포대의 뻣뻣한 누런 종이를 한참을 부벼서 대충 마무리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 학교에서 나눠준 회충약 산토닌을 코를 막고 먹습니다. 빨간 포지의 알코파(ALCOPAR)산(㪚)이라는 십이지장충 가루약은 먹기가 더욱 고역입니다. 선생님 앞에서 차레대로 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샛노랗게 보이며 뱃속은 꿈틀 꿈틀 기생충들이 요동을 치며 뱃속에 전쟁이 일어 납니다. 해마다 봄이면 학교에 대변을 가져가야 하는 연례 행사입니다. 신문지 조각에 대변을 보고 나무 젓가락으로 콩알 만큼 떼어냅니다. 지금의 주민등록증 반만한 크기의 성냥곽에다 넣어서 학교에 가져갑니다. 며칠 뒤에 한 사람씩 이름을 부릅니다. 아무개는 회충 요충이 있다고, 또 다른 학생 누구는 회충 요충 편충 십이지장충이 있답니다. 어김없이 기생충약을 선생님 보는 앞에서 먹어야합니다. 변소에 앉아서 밑을 내려다 보면은 나무 젓가락 정도 크기의 허연 회충들이 꿈틀대곤 합니다. 산토닌등의 약효가 기생충을 마비시켜 배출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고사 시켜서 거의 흔적도 모르고 부담이 없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책 보따리는 집에 팽개쳐 두고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신나게 달려 갑니다. 을지로 5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노점 좌판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좌판이래야 사과 상자 두개 정도 크기에는 양담배 대여섯 갑, 미제 껌, 미제 초코렛, 눈깔 사탕, 박하사탕, 마른 오징어 몇 마리등을 놓고 팝니다. 그 당시에는 담배 뿐 아니라 모든 제품들이 거의가 미제 물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생각나는 담배 이름은 CAMEL, KOOL, SALEM, SUN. MALBORO등의 이름과 색깔 문양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여름에는 한 말 정도 되는 유리통에 물을 가득 붓고는 어름 한조각 수박 한쪽을 띄웁니다. 커피 색갈 나는 가루와 당원(糖元)이라는 하얀 분말도 집어 넣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이렇게 시원한 냉차 한잔의 그 맛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어쩌면 이처럼 달콤하고 시원한 한잔의 냉차를 먹으려고 동생과 나는 어머니에게로 산나게 달려 나가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방학 때면 여름공부, 겨울공부라고 하는 책자의 숙제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이런 방학 숙제를 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름 방학 때의 잊을 수 없는 가슴 철렁한 순간도 되 살아납니다.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으로 나와 둘이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을 때 였습니다.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까만 반바지 모양의 팬티만 입고 웃통은 햇볕에 구울린 알 몸 그대로 였습니다. 쪼그리고 앉으니 조그마한 유치원생정도로 보였었나 봅니다. 어느 중년 정도 나이의 아주머니가 낱 담배 한개비를 피우고서는 한숨을 내 쉽니다. 돈이 지금 없으니 동생을 내가 데리고 집에 가서 한갑의 담배값을 준다고 합니다. 어린 마음에 돈을 더 준다는 그 말 한마디에 고맙기까지 하는 아주머니입니다.
금방 돌아 올 줄 알았는데 대여섯 시간이 지난 저녁이 되어도 동생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생을 찾아 다니느라 혼비백산으로 넋이 나간 모습입니다. 온 가족이 흩어져서 을지로 통의 거리와 서울 운동장, 동대문 쪽으로도 울부짖으며 이름을 불러 봅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그저 흘낏 쳐다볼 뿐으로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파출소에 신고도 했으나 대답은 묵묵 부답으로 행방은 오리무중입니다. 어둠이 깔리는 밤이 찾아 오고 지칠대로 지친 부모님은 한숨만 내 쉴 뿐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곧 나에게 떨어질 불호령이 지레 겁에 질리게 하며 어떻게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반대편 길 건너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가 분명 동생입니다. 엄마 아빠가 한 걸음에 달려갑니다. 와락 끓어 안고 땅바닥에 주저 앉습니다.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은 절대 따라가면 안된답니다. 호되게 야단 맞으리라고 주눅이 들었던 나에게 아버지의 애절한 부탁입니다. 그 당시에는 문둥병이라는 나병(한센병)에 감염된 사람들을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얼굴이나 눈이 일그러지고 손과 발 피부는 결절되어 보기에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는 문둥이가 잡아간다고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문둥병에 특효약은 어린아이의 생간(生肝)이라고 하던 세월입니다. 어리디 어린 동생의 간(肝)을 도려내어 문둥이 환자가 먹으려고 사기를 친 것입니다. 천진난만한 순둥이들은 돈 몇푼에 눈이 팔려 동생을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뜨릴 뻔한 순간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히고 세월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이을까.
피난민들의 정착지인 대전 성남동도 시야에 들어옵니다. 세평 정도되는 판잣집들이 대여섯개가 붙어 있습니다.뒤로는 이런 모습이 십여줄이 양쪽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뒤로 언덕을 오르면 보리밭이 벌판을 메우고 있습니다. 보리밭 뒷편 산기슭에는 문둥이 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리밭 근처에도 얼씬을 못하게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간(肝)이 저 들의 타켓으로 혈안이 된 집단입니다. 삼시 세끼 목에 풀칠도 어렵던 시절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문둥병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망발일 뿐입니다.
그토록 지난한 세월을 어떻게 참고 견디고 살아 온 자신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꿈에서라도 두번 다시 보기 힘든 역경의 세월입니다.
2016년 3월 11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