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문화 .. 성황당
한국의 민속 신앙에서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솟대, 장승, 무당 등 같은 한국 민속 신앙의 일종이다. 성황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영험하다는 나이 많은 신목에 금빛 새끼줄과 장식을 달아 돌을 쌓아놓는다. 이 돌과 흙을 두고 외부의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매우 실용적인 용도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사당을 지어서 신의 영역임을 표시하고, 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조성된 일종의 토템이다. 그래서인지 서낭당의 나무를 베면 저주를 받는다는 등의 묘사가 나오는데, 무속에서는 이를 '동티 났다'고 표현한다.
서낭당의 이름에 대해서는 선왕당(仙王堂)에서 나왔다고 보아 고대 한민족 고유의 선도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서낭당이 고대 마한의 소도와 뿌리가 닿아 있다는 것은 이미 조선시대에 제기된 설로, 오주연문장전산고가 편찬되었던 시기에 이미 현재의 모습과 같은 서낭상의 형태가 이미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화동음사변증설(華東淫祀辨證說)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중국의 성황(城隍) 신앙이 한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된 결과라는 설도 있다. 성황(城隍)은 성벽과 해자를 뜻하며, 이름처럼 성황신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공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 성황신에게 고려 조정이 관직을 하사한 일도 있다.
북방 민족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몽골에 가면 '오보'라고 해서 위 사진과 똑같이 생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기에, 서낭당의 기원이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문화와도 어느 정도 닿지 않느냔 가설이 나오기도 했다. 오보는 초원에서 일종의 이정표 내지 경계 표시선 역할도 하는데, 서낭당의 위치도 대부분 마을 어귀나 입구 혹은 고갯길의 길목으로, 여기서부터는 우리 신의 영역이고 신이 보우하는 곳이니 다가오지 마라는 의미가 있었다. 어떤 영역의 경계선에 위치해서 그 경계선을 오가는 자들을 감시하고 그 영역을 관장한다는 신격 덕분에 주로 어떤 지역의 수호신처럼 여겼다.
서낭당(성황당)의 신으로 받드는 신들은 단순히 '서낭(성황)님'이라고 부르지만, 신격을 보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모두 실존인물인 경우가 상당하다. 유명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국사성황'으로 모셔지는 신이 신라의 김유신[4] 내지 고승 범일이었다고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소재한 가림성의 성황신이 고려 시대의 명장 유금필이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순천에서도 고려 초기의 인물인 김총을 '순천진례산성황'으로 모셨다. 의성에서는 견훤을 막아 싸우다 전사한 의성부 호족 홍술[5]을 성황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성황당 탄압은 성리학적 통치 질서가 확립된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어느 마을의 서낭당 제사를 금지하고 폐지하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근현대에 가톨릭 및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민속신앙은 더욱 된서리를 맞았다. 게다가 도시개발이나 도로건설 등으로 각지의 성황당이 숱하게 베여 나갔다. 특히 한국 전역의 서낭당 대부분을 사라지게 만든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에는 '미신 타파'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그 배후와 선봉에는 개신교가 있었다. 그나마 1980년대에 들어서 '민족문화 재흥'이라는 정책이 나오면서 미신으로 몰려 타파되었던 마을굿들이 부활하였다.####
사실 이러한 전통신앙 탄압은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에서도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을 할 때 공산주의, 마오주의 이념을 내세워 봉건 잔재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당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메이지 시대 신불분리령에 수반한 폐불훼석으로 사찰은 물론 전국의 신사 가운데도 강제통폐합당해 사라진 신사가 8만 곳이나 된다. 그 뒤로도 국가신토를 따르지 않는 신사들을 탄압했다.
그림은 책그림으로 요렇게 그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