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번역의 정석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을 외국어로 번역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위 그림에서 A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A를 번역하면 A’가 되는 것이 아니라 2가 된다. 따라서 A’는 A가 가지고 있던 뜻 가운데서 1의 영역은 사라지고 그 대신 A에는 없던 3의 뜻이 추가된다.
한번은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신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어보면 원서와 사뭇 다른 뉘앙스를 받습니다” 왜 다른 뉘앙스를 받았을까? 짝퉁을 읽었기 때문이다. 짝퉁은 진품이 아니며 여러 면에서 진품과 다르다.
신학교 교수 중에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경을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해례본(사진)을 한글 문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에 만들어졌지만, 한글 문법은 1911년 주시경 선생에 의해 <조선어문법>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문법이 없던 시대에 출판된 책을 465년이나 지나 만든 문법으로 해석한다는 게 얼마나 코미디 같은 일인가? 정확하게 해석하는 비결은 당시의 “문화”를 배워서 해석하는 것이다.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도 문법이란 것이 없었다. 따라서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길은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고대 근동 문화”를 배우는 길 외에는 없다.
예를 들어보자. 히브리어에는 “名詞 문장”이란 것이 있다. 명사 두 개를 나란히 써도 문장이 된다. 서술어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써도 서로 소통이 되었다.
선교사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성경을 그 원주민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요1:29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어떤 원주민은 양을 본 일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양이라고 번역하면 그게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하루는 선교사가 보니 그들이 자신들의 神께 제사를 지낼 때 돼지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바로 거기에 착안하여 선교사는 요1:29을 이렇게 번역했다고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돼지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가장 가증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을 “어린 돼지”로 번역했으니 어찌 되겠는가. 더군다나 돼지와 어린 양은 성품도 전혀 다르다. 번역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넘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렇게 어렵다.
20세기 천재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언어라는 게임의 규칙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전달된다”고 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언어 규칙”을 100%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고대 근동문화를 배우는 것을 필수 중의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