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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호 자전수필)
여명에서 황혼까지
<서문>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신의 생애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지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지난 날을 솔직하게 털어 놓기도 결코 쉽지만은 않다.
나역시 그랬다.
출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끄러운 삶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내어 지나온 일들을 숨김없이 털어놓고자 한다. 나의 부끄러운 인생을 답습하는 후예가 없기를 바라고 젊은이들의 지침서 역활을 할수도 있을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잘한일 보다는 어리석고 빛나간 삶으로 얼룩진 인생이지만 용기를내어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제1화) 출생과 둘째 누님
나는 1942년 10월26일 새벽 운곡 원천석 선생의 19대 손으로 태어났다. 좀더 자세히 열거 하자면 운곡 선생 9대손이시며 참의(參議)를 지내신 진경(振涇) 선조님의 10대 종손으로 태어난 것이다.
나에게도 형님이 두 분이나 있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탓이었던지 두 분 모두 초년에 요절해 버린 후 아들이 없었다. 부모님 연세가 40에 이르자 아버님께서는 조카들 중에서 양자를 들이려고 물색 중이었다고 한다. 내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였지만 아들을 기대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지극하리만치 아들을 기다리던 때 내가 늦동이 아들로 태어났으니 부모님의 기쁨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으리오. 내 아명이 씨원이가 된 것도 씨의 근원이 되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산으로 태어난 탓이었던지 어머니 젖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 젖을 먹지 못하고 죽이나 사과즙으로 연명해야 했다. 7대 독자에다 10대 종손으로 태어난 아기가 이런 어려움에 처했으니 부모님 마음고생이 얼마나 크셨을까?
나에게는 네 분 누님이 계시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큰누님은 여주 강천으로 시집가셨고 둘째누님은 서울로 출가하신 다음 이었다.
그리고 이모님 한분이 남쪽 십리 밖 중부라는 마을에 계셨다. 이모님은 기차를 타고 서울 장사를 다니셨는데 나를 위해 분유와 사과 등을 간간이 보내 주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식욕을 채우기에는 어림없었다.
서울 부잣집으로 출가하신 누님은 자상하신 시부모의 사랑은 밭았으나 정작 가장 의지하고 싶은 매형은 놀음에 빠져 있었다. 매형은 누님 장롱을 마구 뒤져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무엇이고 들고 나가려 했고 누님은 이를 막으려다가 매까지 맞았다고 한다. 출가한지 얼마 안 되는 새댁이니 남편의 이런 소행을 시부모에게 일러바칠 수도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 막을 수도 없었다. 시집살이의 괴로움은 시어머니가 아니라 믿고 의지해야할 남편 때문이었다.
얼마 후 누님은 내가 태어난 소식과 함께 어머니 젖이 부족해 나를 키우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던지 꽤나 많은 분유를 가져 오셨다. 당시 분유는 구하기 어려운 고급 식품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시댁이 부자라곤 하나 새댁인 누님에게 무슨 능력이 있었을까? 사장어른 내외분의 배려로 내가 호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님이 두 번째 오셨을 때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누님은 폐병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기침을 몹시 하다가 각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딸을 시댁으로 보내고 싶은 어머니가 어디 있으리오. 그러나 여자는 한번 출가하면 죽어서도 시댁 귀신 되는 것이 법도였다. 또한 가난한 친정에 있어봤자 그런 중한 병을 고쳐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가 되었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
어머니의 말이 떨어졌다. 그러자 누님은 머리를 세게 흔들면서 울음부터 터트렸다.
“가기 싫어요. 나 집에서 죽을 거야. 김서방은 놀음밖에 몰라요.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고요. 김서방이 날 미워하는데 내가 왜 그런 집으로 또 들어가야 해요? 나 안 갈래요.”
그러나 어쩌리오. 어머니는 가기 싫다는 누님을 강제로 내 몰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시댁으로 떠나던 날 누님은 나를 품에 안고 오랫동안 흐느껴 울더란다. 나를 어머니에게 넘겨주고 뒤를 수없이 돌아보면서 저만치 가다가도 다시 돌아와 어머니 품에 있는 나를 빼앗아 꼭 껴안고는 또 다시 흐느껴 울었다. 그런 누님을 바라보는 어머니 가슴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그렇게 울면서 떠난 누님은 그것이 마지막 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라고 나를 애지중지 하시던 누님은 시댁에서 돌아가시고 만 것이었다.
나는 장성한 후에도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체질이다. 왕성하게 움직이다가도 허기증이 오면 갑자기 전신에 힘이 쭉 빠져 운신하기가 어렵다. 군 복무시절 탄약고 보수 작업을 자주 했었는데 삽으로 퍼 던진 흙이 엉뚱한 곳에 떨어져 고참병의 미움을 밭기도 했다. 그런 체질로 피난시절 굶주림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어머님은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말씀하셨다.
“네가 어미젖을 못 먹고 자란 탓이다.”
내가 장성한 후 어머니는 늘 말씀 하셨다.
“네 둘째 누나는 홍천 남면에 묻혔단다. 홍천이 시댁 본 고장이니까. 시댁에서 벌초는 해주는지 모르겠구나. 자식도 없이 죽었으니 산소인들 누가 돌보겠니? 더구나 매형은 새장가를 들었을 테고.”
하시면서 먼 하늘로 물기어린 시선을 보내셨다. 어머님이 누님 이야기를 하실 때 마다 홍천 사무라치(삼마치) 고개를 여러 차례 입에 올리신 것으로 보아 누님 시댁 본 고장이 삼마치고개 너머 어디쯤일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매형이 김씨라는 것 외에 아는 것은 없으나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길을 달릴 때마다 높은 산 깊은 계곡을 눈여겨 살필 뿐 이었다.
2002년 12월 24일 나는 원주 종친회에 갔다가 춘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졸음운전으로 큰 사고를 낸 적이 있다. 사고 지점은 남산터널을 지나 홍천 톨게이트 수백미터 전이었다.
차가 반파되어 폐차장으로 보냈는데도 나는 옆구리가 몹시 결렸을 정도로 경상이었고 한 달 만에 완쾌 되었다. 사고 경황에도 나는 언뜻 누님을 떠올렸다. 생전에 무척이나 나를 사랑하셨다는 누님의 보살핌으로 내가 무사한 건 아닐까?
그 후에도 자가용을 몰고 이곳을 지날 때마다 누님 생각을 하면서 정신이 새로워지곤 한다.(2014년 2월)
(제2화) 아련하게 남아있는 토막 기억들
영아 적 기억이 남아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젖먹이 적(어머니 젖도 못 먹고 자라긴 했지만)기억이 몇 토막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기억력이 유별나게 좋은 것도 아닌데 영아와 유아시절 기억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한 살인지 두 살 적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아랫 몫에 누워있는데 여자아이 하나가 자기 엄마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오던 일, 부모님이 겸상으로 식사를 하시다가 상머리에 누워 있던 내가 울음을 터트리자 어머니가 나를 얼레면서 안아 올리던 기억도 남아있다. 또한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니면서도 손에든 물건은 끝까지 쥐고 다니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방바닥에 던져 버리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내 얘기를 하실때 마다 “이 애가 아마도 잘 잘살려나 보다.” 하시면서 대견해하셨다고 한다.
어머니 젖을 못먹고 자랐어도 체질은 비교적 강했던지 잔병치례가 많았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침을 많이 흘려 턱과 목덜미가 몹시 헐었다고한다. 그 일로 읍내 홍의사에게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밭았다고 하시면서 홍의사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읍내에도 병원은 거기 뿐이었던지 다른 병원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간혹 건너마을 침쟁이 한테가서 침 몇번 맞은 기억은 있다.
성장해 가면서 아련한 기억들이 차차 많아지는데 해방되던 날 누군가의 등에 업혀 태극기 물결 속으로 뛰어들던 기억 또한 또렷하게 남아 있다. 45년에 해방이 됐으니까 그때 내 나이는 네 살이 분명하다.
그날 나를 업고 달려 나가던 이는 넷째누나인 것 같다. 평상시 나를 많이 업어준 이가 넷째 누님임을 알기 때문에 그 때도 그 누님이 확실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누님은 막내누님보다 3년이 위지만 몸이 약한 탓이었던지 업혀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밀골과 큰골에서 발원한 도랑 두 줄기가 합류되는 곳 바로아래에 공회당이 있었고 앞에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있었다. 나중에 공회당은 20미터쯤 위쪽으로 옮겨져 있었지만 새 공회당을 짓는 것을 본 기억은 없다. 공회당과 연관된 대부분의 기억들은 옮겨지은 느티나무 옆에 있는 공회당이다.
여기에서 합류된 실개천 물은 소류지로 흘러드는데 아이들은 이 도랑에서 가재를 잡기도 했다.
나는 집 앞 50미터 쯤 되는 공회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 많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습관적으로 부르던 노래아닌 노래가 있다.
“얼~러죽자 얼러리 어~허 얼~러죽자 얼러리.”
의미도 없고 말도 아닌 이 소리를 나는 구성지게 뽑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누님들을 만날 때면 그때 내가 언덕길을 올라오면서 읊어대던 소리를 되새기면서 크게 웃곤 한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소리가 입에 올라 버릇처럼 읊었을까?
해방 얼마 후부터 앞산에는 군인들이 자주 나타났다. 군인들은 산등성이를 뛰기도 하고 산비탈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군인들이 그 산에서 훈련을 할 때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먼 거리에서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군인들이 저러면 난리가 나는데.” 한 사람이 무심결에 던진 말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정말 전쟁이 터진 것이다.
이쪽에서도 이렇듯 방비를 한 것 같은데 기습남침을 당한 결과는 너무 참담했다.
경찰들 역시 열을 지어 마을 앞을 지나 갈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어른들은 빨갱이 잡으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뒷산에 진달래가 만발할 때면 나는 또래들과 산비탈을 누비며 진달래를 꺾어들고 내려오곤 했다.
“산에 가면 문둥이가 아이들 간 빼 먹는다. 그러니까 혼자가지 말고 가더라도 너무 멀리 가지는 말어. 알겠니?”
누나들이 나를 겁주려고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섬뜩하기는 했다. 그런 말을 자주 듣다보니 문둥이는 도깨비보다도 더 흉악하고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당시 아이들은 다까라, 사방치기, 자치기, 도마렛 등을 하고 놀았으나 나는 너무 어리다고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장에 다녀오실 때 주먹만 한 고무공을 사다 주셨는데 내게 공이 생기면서 큰애들 도마렛 놀이에 끼일 수가 있었다.
도마렛 은 일본말로 정지라는 뜻인 것 같다. 비탈진 곳에 아이들 수만큼 구멍을 파놓고 정해놓은 거리에서 공을 굴려 한구멍에 공이 들어가면 그 구멍의 주인이 오니가 된다. 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아이들은 멀리 도망을 가고 오니는 공을 잽싸게 주워들면서 “도마렛.”하고 소리친다. 도마렛 소리와 동시에 도망가던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야 하고 오니는 제일 가까이 서있는 아이를 공을 던져 맞추는 놀이였다. 공이 한 아이를 맞추면 그 아이에게 오니가 넘어가지만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면 아이들은 다시 도망을 치고 오니는 또 잽싸게 공을 다시집어 “도마렛.”하고 소리친다. 아이들은 공에 맞지 않으려고 모로 서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지만 한번 정지한 다음에는 공이 날아와도 발을 떼서는 안 된다.
나는 그 후로 식사를 마치기 바쁘게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그날도 학교 운동장에서 도마렛을 하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졌는데 무릎이 몹시 아파 견디기가 어려웠다. 집에 왔을 때는 무릎이 뚱뚱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어머니가 따듯한 물수건으로 감싸주었지만 부기가 빠지는데 며칠이나 걸렸다. 부기도 가라않고 아픔도 사라지자 그것으로 다 낳은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몇 해 후 피난길에서 먼 길을 며칠씩 걷게 되자 그때 다친 무릎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징징 울면서 따라 다녔지만 겉보기엔 멀쩡했다. 겉으로 멀쩡하니 누나는 걷기 싫어 꾀부린다고 나를 나무라기도 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후로는 한동안 괜찮은 것 같았지만 예고 없이 도지고는 했다.
스물한 살 때일 것이다. 망우리 역에서 멀리 떨어진 면목동에 방을 얻어 놓고 종로에 있는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릴 때 다친 무릎이 부어올라 걸을 수가 없었다. 걸음을 많이 걸은 것도 아닌데 어릴적 다친 무릎이 도져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학원도 못가고 있는 나를 보신 주인아주머니가 쇠비름을 한 다발 뜯어다가 척척 이겨 처매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들을 불러 역까지 데려다 주라고 하셨다. 나는 주인댁 아들 자전거 뒤에 타고 역까지 갔다. 집에 온 후 아프던 무릎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 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쇠비름을 쉽게 구했던 것 같다.
쇠비름의 효험은 참으로 신기했다. 그때는 그렇게 넘겼으나 그 후에도 예고도 없이 무릎이 도지고는 한다.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도 가끔 왼쪽 무릎이 시큰거리고 부어올라 고생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다리를 쓰지 않고 저절로 가라않을 때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쇠비름의 효능을 체험했으면서도 번거로움 때문에 잘 쓰지 않는다. 나 자신도 귀찮아서 쇠비름을 쓰지 않는데 아들도 아닌 나를 위해 애써주신 아주머니가 너무 고맙고 그리워 진다.(2014년2월)
(제3화) 미행
아침 식사를 마치신 아버지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외가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서신다. 외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버지 혼자 가셨을까?
“나도 아버지 따라 갈 거야.”
하면서 내가 따라 나서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적당히 달래 놓고는 혼자 떠나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아버지를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모퉁이를 돌아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저만치 가시는 게 보이면 몸을 숨겼다가 보이지 않게 되면 다시 뛰었다. 외가에 가본 기억은 없으나 외숙모와 외사촌 형들 등 외가댁 식구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나는 외가 식구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사코 따라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려는 낌새가 보일 때마다 길섶에 몸을 숨겨 가면서 거리를 두고 아버지 뒤를 열심히 쫒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미행하고 있는 줄도 모르시고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고추거리를 지나 하채면이 앞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여기부터는 길이 곧고 평탄하여 몸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버지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2km 가까운 거리를 미행한 후에야 아버지는 뒤 따르는 나를 발견하셨다. 아버지는 발길을 돌리셨다.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를 집까지 업어다 놓고 가던 길을 다시 가셨다.
마을 안은 모르는 곳이 없었지만 이렇게 멀리 마을을 벗어나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다. 기찻길이 가까이 보이는 곳이었다.
“꽤-액- 칙-칙-폭-폭 칙-칙 폭-폭” 하는 기차 소리는 우리 집 안방까지 들렸다. 나는 우렁찬 소리를 내 지르면서 달리는 기차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가까이 가 볼 엄두는 못 내던 때였다.
그때부터 나의 활동 거리는 그만큼 넓어졌고 기차를 가까이 보기위해 또래들과 어울려 기찻길을 넘어 가기도 했다.
조금더 나이가 들었던 어느날이었다. 몇몇 동무들과 어울려 철길 바로 옆 언덕위에 올라 만종역 에서 입환 작업을 하는 기차를 유심히 내려다 보고있었다. 허연 김을 내 뿜으면서 움직이는 기차에는 옷도 얼굴도 검게 그을은 기관사가 타고 있었다. 거대한 기차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기관사가 어린 내 눈에는 영웅처럼 보였다. 나는 그 이후로 옹기흙을 파다가 기차를 몇 개씩이나 만들어 마루끝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자동차도 같이 만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기관사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2014년 2월)
첫댓글 쉬개고개 이후 새로운 명작 탄생의 첫 번째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으로 이사 하신후의 집필이라 더욱 기대됩니다. 건필하십시요.
부러운 시도입니다. 좋은 작품들이 태어나리라 믿습니다. 기억력도 대단하시고 합니다.
이야기가 소설 같네요. 그 땐 모두기 어려웠으니까.
여명에서 황혼으로 오시는 길목마다 활짝 핀수레가 반기는 분 이제 말갈기를 붙잡고 이랴
이렇게 시작은 햇는데 예상 되는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지 ?????
시작이 반이라 하였으니 이제 마무리 짓는 일만 남았습니다. 좋은 글 기대합니다.
원선생님, 화이팅 입니다.
아침엔 시원한 냉수 한컵 마시고 컴 앞에 앉으면 힘이 솓습니다. 브라보! <김기태>
여기다 제2화를 거듭 올립니다. 재미없는 글이지만 많이 사랑해 주세요. 글동무들의 관심이 큰힘이 됩니다.
그런 놀이가 있었습니까 정말 일본 말이군요. 도마렛도 일본어이고, 오니도 술레 라고 하는 말인것 같습니다.
도마렛은 일본말이 확실한것 같은데 오니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원주 사람이지만 어느 고장이고 아이들 놀이는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