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금)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있었던 풍석(楓石) 서유구(徐有[矩+木]:1764-1845년)
탄생 2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마침 박물관 전시인 <종묘>전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풍석은 다산 정약용과 비슷한 시기의 소론계 실학자로서 개화의 선구 박규수 등도 그의 문하에서
교류를 가진 19세기의 최고 지성이었고, <임원경제지>라는 우리나라의 백과전서를 혼자 집필해낸
학자이기도 하다. 아래 초상은 작자미상으로 75세 때 모습을 그린 것(개인소장)이라고 한다.
아래는 2009년에 첫권 <본리지>의 완역본 모습입니다. 여기서 '본'이란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할 때의
본입니다.
지난 99년 괴테탄생 250주년 때 우리나라에서는 기념우표까지 발행했고, 모짜르트 때도 기념음반이
시끌벅적 나온 적이 있었다. 재작년 다산 탄신 250주년 때는 서구의 루소니 누구니 하고 비교하며
그 의미를 부각시키기는 모습도 보였다. 이번 풍석의 250주년 기념은 참 조용히도 지나친다 싶었다.
습재연구소의 김정기 선생이 마침 <임원경제지> 번역팀이 출발할 때부터 일을 해온 일꾼이라
그 팀의 고난 속 행군을 곁에서 지켜봐온 터이고, 25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리니 함께 참석하여
그 연구성과를 들으며 확인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신문 소개 기사로는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404/h2014043022020984330.htm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888539 참조! ^^
인사동에서 경복궁 앞을 지나 고궁박물관으로 가는 사이에 세월호 참사로 촛불시위가 일어나서인가
삼청동 입구 동십자각 일대는 온통 전경버스들이 대대적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예전 80년대 민주화
투쟁 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한 시위도 없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구나
싶었다. 81년 서울의 봄 때도 대학생 스크럼이 안국동로터리에서 동십자각을 거쳐 청와대 쪽으로
갈까봐 계엄군과 전경버스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차량을 통제하며 저렇게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시민의
일상을 겁내는 정부, 꼭 그모양 아닌가.
낮은 더웠다. 마침 고궁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종묘>전을 온 김에 둘러보았다.
조선 5백 년 동안 국교였던 유학과 그 바탕인 효 사상과 조상숭배의 의례가 왕실문화의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오늘날까지 전해준다. 그 건축문화는 대신 사진 화면으로 대신하였다. 눈여겨 볼 거리들이
많았으나 그럴 시간이 안 되었다.
강당은 같은 건물이지만 서문 쪽 입구에서 가까왔다.
이번 학술행사는 임원경제연구소와 한국고전번역원의 공동 개최로 되어 있다. 지금은 연구소로 모양을
갖추었지만 출판사를 전전하며 <임원경제지> 첫 권을 내야 했던 고난의 과거가 있었다. 작년에야 번역원
산하사업으로 포함이 되어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덩치 큰 사업을 시작한 소장학자들의 소박하고 일관된
뜻이 없었다면 이런 오늘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간 정권이 바뀌며 기존 시스템 안에서 생각의 변화를
마련하려는 노력도 있었고, 그것이 민족문화추진회가 고전번역원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을 하였으며,
지역 거점을 연결하는 사업과 더불어 이와 같은 연계도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아래는 입구에 세워놓은
펜던트.
학술대회는 행사 사회의 진행 다음으로 발표 때는 전체 사회를 도올 김용옥 선생이 맡았고, 그의 후즈닷컴
(hooz.com)에서 동원된 촬영팀이 전면을 막아 서 있었다. 도올선생의 제자들이 임원경제지팀에 다수가
활약하고 있기도 하지만 번역원의 탄생과정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독대를 하는 등의 기여도가 녹녹
찮게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며칠 전 신문사설로 여성대통령의 인격을 지칭하며 현시국을 발언한
것 때문에도 도올선생의 사회는 관심거리로 보였다(5/2일자 한겨레신문의 “국민들이여, 거리로 뛰쳐
나와라!”). 물론 사회를 보면서는 완전히 학술적인 측면에서만 발언했지만 말이다.
그 역시 전체 발제를 서두에서 하였다. 큰 시점으로 19세기의 서유구 시대를 보는 관점의 문제를 잘도
거론해 놓았다. 도올선생은 우선 '실학'이란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켜온 사람이고, 그의 '동양철학'은
조선유학의 바탕에서 나오지 않은 (대만과 일본 동양학을 섞은) 독특한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현재
학계의 주류 담론이라 할 근대(성) 논의에서도 색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굳이 '자본주의 맹아' 같은
것을 따지거나 말 많은 '봉건제' 논의도 말자는 것이다.
도올선생은 서구 지성 중에서도 특히 미국식 인문과학을 대변한다. 그래서 서구 철학자 중에서도 독일철학
분야에선 내가 보기에 그간 취약함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었다. 그가 칸트나 헤겔 철학을 독일어
원문으로 모두 독해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였고, 영미 관점에서의 비판점을 가지고 요점이나 결론만
거론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번도 마찬가지지만 TV나 인터넷을 통하지 않고 이처럼 그의 강의를 직접
육성으로 듣긴 처음이었다.
그의 요지는 결국 서유구를 '전근대'의 인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의 근대는 오히려
조선의 근대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서구철학의 근간이 되는 칸트의 '오성의 구성능력'
이란 데 비하면 동양의 사유에는 아예 기독교사상과 결부된 그런 오성의 한계성이 애초부터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우주를 통합할 수 있는 '복합계로서의 생명의 변계성'이란 관점을 주장한다. 그래서
"보만재(서명응:서유구의 할아버지)로부터 풍석에 이르는 사유의 집약과정이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사유의 전개과정의 밀도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다양성과 통일성을 과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서유구가 추구한 인간은 '천인화해적(天人和諧的) 합일(合一)의 인간', '자연과 내가 합생하는 창조적 삶'
이라고 하였다. 그런 지성의 시대에 영조나 정조 같은 임금은 학자군주이긴 해도 오히려 이런 위대한
지성들에게 족쇄를 채운, 아무런 더 큰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던 '용군(庸君:원래는 조순 선생의 표현이라
하였음)'이었을 뿐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런 말을 들으며 이번에 비로소 그의 생각 바탕에는 아나키즘이,
바로 현대적 무정부주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그가 70이 다 되어서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현실 발언을 하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었다.
발표는 1,2부로 나누어 3명씩 소장학자들이 각자의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었고 3명씩 토론자가 토론문을
읽었다. 김문식 단국대교수는 규장각에 있을 때의 글을 다시 발표하는 수준이었고, 임원경제연구소의 소장
정명현은 경희대 박사논문이 될 농업정책론 일부를 발표하였다. 고전번역원의 서정문은 그저 관심가는
대로 다산과의 비교를 발표하였다. 소장학자나 비연구자의 발표는 흔히 특정 주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현재의 연구수준을 가늠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농업정책론에서는 전제(田制)문제가 핵심논의인 만큼
경제사적으로 탄탄한 연구가 있어야 하지만 서유구의 논의만 소개하는 수준이어서 아쉬웠고, 다산도 마찬
가지이지만 그 유명하다는 저술들이 왜 소통되지 않고 나중에야 알려질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당대 수용사
문제가 역시 중요하게 보였다.
2부는 각론 식으로 <임원경제지의>의 '정조지(鼎俎志)'에서의 음식 조리 문제, 건축론, 의학론 등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전문학자들이 요즈음 어떻게 공부하는지가 여실히 느껴지며 흥미로웠다. 하지만 자기가
파들어가는 주제 이외의 그 주변, 연관된 전반적인 조망 아래서의 자기 주제가 뭘 말하는지에 대한 일반
론적 뒷받침들이 대체로 든든해 뵈지 못하였다. 그건 요새 학계 풍토이니 어쩔 수가 없나 보다.
1부가 끝나고 휴식시간에는 '정조지'에서 소개한 대로의 떡과 음료,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원이 많아 준비한 떡은 모자라 동이 났고 겨우 찹쌀모찌 두어 개와 딸기 두 개를 먹을 수 있었다.
저녁 때가 되어 발표와 토론이 모두 끝났다. 소장 연구자들의 연구가 잘 이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뿐, 당장
무슨 결론이 따로 있겠는가.
그냥 춘천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김정기 선생을 따라 저녁까지 먹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자리엔
연구소사업으로 만든 '부의주(浮蟻酒)'라는 쌀 동동주도 가져와 맛을 보게 해주었다. 똑 쏘는 시큼한 맛이
강했다.
경복궁의 서쪽은 참 오랜만에 다시 와 보게 되었다. 효자동, 옥인동 등의 서촌이다.
오랜만에 영추문을 보자 사진으로 담을 생각이 났다. 거기도 길가엔 전경버스가 진을 치고 있었다.
어두워진 밤중까지도! □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학술 대회에 대한 높은 식견에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명현 소장은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경희대'라고 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한문으로 씌여진 옛글을 요즘 말로 번역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더구나 그런 인력을 양성하는 데에는 더 무관심한 듯합니다.
내가 소장님의 학위학교를 잘못 듣고 틀리게 기억했네요! 서울대로 정정합니다. 곧 나올 학위논문이 기대됩니다!
김정기 선생이 번역에 참여하는 '임원경제지'가 부분적으로 발간이 진행중인지 궁금합니다.
제1권인 '본리지'는 3책인가로 연전에 완역이 되었습니다. 수정하여 책 사진을 첨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