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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815
7월8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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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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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2rClFdeH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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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탁월한 대 영성가께서 한 수도공동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하루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공동체 문을 나서 교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수도원 담 안으로부터 크게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스승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늘 옥신각신하던 두 형제가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아침부터 크게 다투고 있는 두 형제를 보자 스승까지도 덩달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순간 당장 달려가서 이렇게 혼냈을 것입니다.
“이 쫌생이들아! 너희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아침부터 싸움질이나 하고 있게. 너희들, 그 작은 것 하나 양보 못하면서, 도대체 뭣 하러 수도원 왔어? 그러려면 당장 짐 싸라!”
그러나 스승은 다시 발걸음을 밖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는 길고도 긴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담을 세 바퀴나 돌고 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간 스승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두 형제를 타일렀다고 합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문제에 개입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분노나 화로부터 자유롭게 했습니다.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돌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습니다. 스승이 담을 따라 돌던 시간은 어쩌면 다투고 있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스승은 다투고 있던 형제들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감정의 영향을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최소화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조금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갓 수도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 수도자가 스승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승님, 제 마음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슬픔에 가득 차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누구도 판단하지 말며, 누구도 비방하지 말게. 그러면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이네.”(안셀름 그륀,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분도출판사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복음전도 여행’에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당부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당부말씀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복음 선포자로서 지녀야할 중요한 자세 중에 하나가 ‘평화’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 선포자 자신이 내적으로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사람이 내면의 불안정으로 인해서 얼굴이 어둡거나 침울하다면 복음 선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복음을 선포한다는 사람이 어딜 가나 분열을 조성한다면 그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복음선포자는 마음이 늘 잔잔한 호수 같아야 합니다. 그 어떤 바람 앞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삶의 중심에 자리하시니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평화가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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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D4uKf8lV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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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믿을 때 생기는 위험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복음선포로 파견하십니다. 그때 우선 주는 것에 대해 아끼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받은 것을 그대로 내어주는 모범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되 받아내는 것도 무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주면 반드시 받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동네에 들어가던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집에만 머물라고 하십니다. 다른 집들도 분명 무언가 내놓고 싶을 텐데 한 집만 거덜 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 집에서 받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꾼에게 아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고, 그가 주님의 일꾼에게 대하는 신자의 모범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면서도 받아내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하나는 ‘자신이 당연히 받기만 하면 되는 줄 알게 된다.’라는 이유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받기만 하다가는 부담이 되어 상대를 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도 선악과를 받으려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는 내어놓지 않는 상태에서 주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조상들은 당연히 받기만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고 싶다면 주기만 해서 부담스럽게 만들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주기만 하고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주는 것의 목적은 그 사람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며칠 전 저의 신학교 입학 동기였던 한 사제가 평화방송에 나와서 7성사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성소(하느님의 부르심)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는 어려서부터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커서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신학생과 한 방에 자게 되었는데 유재선 어린이는 신학생으로 사는 게 좋냐고 물었고 그 신학생은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며 한번 신학생이 되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자신을 다 내어놓을 수는 없었는지 거의 사제가 될 즈음 8년 만에 신학교를 나오게 됩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에게 신학교 입학 추천서를 써 주었던 아버지 신부님이 “내가 기도를 해 봤는데, 넌 어떤 식으로든 사제가 될 거라는 답을 받았어.”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믿지는 않았는데, 어찌어찌하다가 프란치스코 전교봉사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런데 삶이 신학교 때보다 더 힘들어서 한 1000번은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 했다고 합니다. 결국, 종신서원을 얼마 남기지 않고 떠나려는 찰나에 십자가에서 어떤 음성을 듣고는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우리가 더 많이 가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내어놓게 하시는 일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주님께 가다가는 잘못된 주님을 섬기게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당신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쏟아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최종목표입니다.
신원조회도 안 되는 산속에서 40년 동안 홀로 살아온 할머니가 있습니다.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와 먹으며 살았는데 조현병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제작진들이 완강한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텐트에서 버티며 열흘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는지 자신이 한 밥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시 그 밥도 보통 사람이 먹기는 역겨울 수 있으나 제작진은 맛있게 먹어줍니다. 할머니께서 조금씩 내어놓을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의 음식을 먹어준 제작진의 소원대로 병원을 가기위해 산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참사랑은 이렇게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계속됩니다. 내어놓을 수 있으면 순종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 머물며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자신들에게 순종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도록 파견된 것입니다.
대화할 때 혼자만 이야기하면 그것이 대화일까요? 상대도 말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을 넘어서서 내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으켜 내어놓게 하시지만, 우리 또한 주님의 기도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내어놓게 청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주어도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옳습니다. 내어놓는 빈 곳에 주는 이의 것이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내어놓는 공간에 상대의 것을 채우는 것이 관계입니다. 그래야 상대 안에 내가 살고 내 안에 상대가 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입니다. 주고받음이 없이는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고 그래서 복음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기쁘게 내어놓게 만드는 사람이 진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받는 것도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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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7-15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고 권능을 주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우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하신다. 주님께서 지니신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주님의 권능과 같은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세속적이던 이들이 이제 하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악마를 쫓아낼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모습이 되도록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리고 하신다. 만일에 그들이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것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즉 탐욕을 단죄하셨다. 주님께서 그 권능을 제자들에게 거저 주셨으니 제자들도 그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니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9절)고 하신다. 보수를 바라지 않는다면 금과 은과 돈을 지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못해서 그들이 하는 선교활동이 인유 구원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재물을 끊은 사람은 생활에 필요한 것마저도 끊는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10절) 이는 세속의 물건에 관심은 버리라는 말씀이다. 참된 보물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옷만 있으면 된다. 마음의 악행 때문에 이단이나 율법 같은 다른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격도 없이 권위를 사용하려는 모습을 말한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 필요한 음식과 옷만 받으라고 하신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1절) 사도들이 묵는 집은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 집에 머무르라고 하신다. 나쁜 평이 도는 사람이면 자칫 말씀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렀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신다. 평화의 인사는 말과 몸짓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집에는 평화가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우선 평화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들 앞에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신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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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이스라엘 성지 순례는 복음서의 평면적이고 문자에 머무는 이야기를 입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여러 차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 순례를 떠나기 전에 순례가 그저 단순한 여행이 되지 않도록 많은 것을 준비하게 됩니다. 순례의 주제를 정하고 공부도 하면서 묵상과 성경 통독으로 순례를 기다립니다. 순례를 할 때에도 주제를 깊이 생각하며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같은 장소와 건물을 보더라도 늘 새롭게 다가오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이런 순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파견되어, 그분과 함께 떠나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은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일지 모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며 같은 일을 하는 일상 말입니다. 때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이유를 찾지도 못하며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지켜보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순례의 여정에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주제를 정해 주십니다. 순례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순례의 기준이며 가치, 그리고 방식입니다.
첫째는 ‘소유에서부터 자유로움’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미리 채우려는 마음보다는 감사하고 나누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머무름’입니다. 이것은 함께 있는 것이며 동감하는 것이고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도 서로 나누며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집착과 미련에서부터 자유로움’입니다. 집착과 미련은 성공과 좋은 결과만을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자기만족과 성공을 위해서 더 큰 아픔과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놓고 떠날 수 있어야 새로움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상이라는 순례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에서부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먼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주제들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함께 걸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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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복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선포는, 실제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게 해 주는 일이고, 복음 선포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복음 선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은 ‘영업’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은총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입장료를 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신앙생활로 얻게 됩니다. 그 나라의 입장권은 돈을 받고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도 그 입장권을 돈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이 교회에 바치는 헌금은 무엇인가? 모든 헌금은 언제나 항상 ‘감사 헌금’입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서 바치는 돈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돈입니다. 교회는 그 돈을 교회 운영비와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합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9-11)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고(루카 5,11), 그래서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왜 이런 지시를 하셨을까?” 예수님의 지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른 사람들이다. 그 첫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떠나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께서 너희를 먹이실 것이다.” 제자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빈 손’으로 떠나도
아버지께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빈 손’이지만, 영적으로는 ‘은총으로 가득 찬 손’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버린 것들을 되찾아서 가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일은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떠났다면, 그들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만일에 교회가 돈 걱정만 하고 있다면,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는 않고 돈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기는커녕 돈이라는 마귀에 사로잡힌 불쌍한 곳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시는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당연하다.’라는 말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일꾼 쪽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일꾼이 걱정하지 않아도(걱정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일꾼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천사를 직접 보내실 수도 있고, 어떤 기적을 일으키실 수도 있고, 착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도움을 제공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라는 말씀은, 숙식을 제공해 줄 사람을 찾아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도 되는지를 잘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숙식과 편의를 제공해 준다고 해서 아무거나 다 받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후원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더 나은 대접을 하는 집을 찾으려고 옮겨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2-15)
이 말씀은, “선교활동의 성과에 너무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마땅하지 않은 집’은 복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들을 기회가 없어서 복음을 모르고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은 우리 쪽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전해 주었는데도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 자신의 책임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지만,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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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도자의 덕목을 나타내는 일화가 일본에 있습니다. ‘새장에 있는 새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해결 방안입니다. 울지 않는 새는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울지 않는 새는 새장에서 풀어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울지 않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지도력은 과감한 혁신을 이야기합니다.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칼을 버리고 조총을 선택한 무사집단이 권력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저는 카세트테이프에서 CD를 경험했습니다. CD가 오래 갈 줄 알았는데 곧 MP3에게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지금은 듣고 싶은 음악을 유트브나 음원 검색을 통해서 스마트폰을 통해 듣습니다. 저는 이런 지도력을 예수님의 모습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쇄신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대의 징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두 번째 지도력은 자유입니다. 울지 않는 새에게 새장은 구속입니다. 새장에서 풀려난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지도력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서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겸손, 나눔,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만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세 번째 지도력은 인내입니다. 한국인에게 있는 병중에 ‘화병(火病)’이 있습니다. 분노를 참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커다란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에게서 이런 지도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차원의 인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용서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이야기 하였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정한 여인을 용서해 주는 이야기,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이야기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다림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기다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여러분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제들을 용서하며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배반하였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십시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십시오.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십시오. 여러분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십시오.” 저라면 새장에 갇힌 울지 않는 새를 여러분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는지요? 변화와 쇄신, 자유와 인내를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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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아버지의 발걸음>
본당에서 사목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성당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전화로만 가끔 안부를 묻곤 하셨는데 그날 제가 사목하는 곳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셨습니다.
미리 연락을 하면 혹시라도 “몸도 불편하신데 오지 마십시오.” 할까 봐 조용히 오신 듯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투병 중이셨는데도 불편한 몸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오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뵙자마자 마음과 달리 “가능하면 다음에는 오지 마십시오. 제가 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고향 집에서 제가 사목하는 곳까지는 제주도 내에서 가장 먼 거리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발했을 것이고, 차도 여러 번 갈아탔을 것입니다.
저는 내심 ‘아버지의 병환이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본의 아니게 섭섭하게 들리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신부님 얼굴을 보러 왔는데, 이제 보았으니 됐습니다.” 하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사제관으로 모시려 해도 굳이 사양하며 돌아서시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힘든 몸을 이끌고 아들을 보러 오셨는데, 아들한테서 들은 첫마디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무척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는데, 아버지께서 드러나지 않게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장례 후 제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제게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슬픔을 가누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휴대전화에서 아버지의 전화번호는 지워질지 모르나 생전의 아버지 모습은 기억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깨닫는 것은, 세상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과감하게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그 길이 사랑을 전하는 길, 화해하러 가는 길, 위로하는 길, 용서하는 길, 용기를 주는 길, 격려하는 길이라면 다른 일을 무릅쓰고서라도 나서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나는 제자들이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을 제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 나서는 길은 복음의 길이고, 우리가 길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 여정 자체가 복음의 여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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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재현 요셉 신부님]
예수께서는 12사도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돌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사도들은 그 일을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 일을 그 일을 합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 8) 하셨습니다. 권능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일한 대가로 단지 음식, 양식을 얻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 외에 대가를 받아서도 안되고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거저’의 그리스 원어는 δωρεαν입니다. δωρεαν이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의 δωρεα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δωρεαν의 의미는 ‘선물로’ 또는 ‘값없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선물로 받았으니, 선물로 주어라” 또는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 사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선물로 주어야 합니다. 값없이 주어야 합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가진 것을 선물로 주어야 합니다. 값없이 주어야 합니다.
거저 주는 것은 이익이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저 주는 사람은 이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선물로 주면서 돈을 받지는 않습니다. 이익을 남기는 것은 장사이고 상업입니다. 이익을 남기는 사람을 기업인, 상인, 장사꾼이라 합니다.
교회가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이익을 생각하고 이윤을 추구한다면 교회는 하나의 기업이라 하겠습니다. 봉사자가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이익을 챙긴다면 그 봉사자가 아니라 장사꾼일 것입니다.
교회는 사심 없이 욕심 없이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봉사자는 선물로 받은 것을 선물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것을 값없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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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백남국 요한 신부님]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
미국으로 교포사목을 떠날 때 제가 가진 것들이 너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큰 가방 두 개에 넣을 수 있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처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는 복음 말씀대로 적게 가졌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가졌지요.
그런데 어느날 성체 앞에 앉아 있다가 ‘적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이처럼 적게 가지고도 홀가분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필시 저처럼 혼자 사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을 부양할 의무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아니면 가는 곳마다 필요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거나.
그러고 보면 적게 가졌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 비해 참 팔자 좋게 사는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게 지녔다고 흐뭇해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지니고 살아야겠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만이 온전히 주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음을 강조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주님, 제 삶이 가식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청빈의 정신을 알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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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마지막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였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입니다. 그런데, 단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만 하지도 않습니다. 그 징표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권능도 주셨는데, 그것을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어라.’ 하십니다.
“앓는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여기에서는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사되고 베풀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나눌 때라야 비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나누고 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신다. 그러니, ‘자신의 것인 양’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다른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받은 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주신 분’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받은 것’을 주며, ‘주신 분’의 사명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포해야 할 나라는 자기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늘나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챙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입을 것, 먹을 것, 그 어떤 안전장치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기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고,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지고,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라 하십니다.
또한,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고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입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받아주든지 않든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마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군말 없이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형제에게 평화의 인사를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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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마태 10 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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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
<사도들의 파견!>
예수님의 이 말씀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으로 회개한 이후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찾고 있던 중, 1208년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들려온 사도들의 파견사화인 오늘 복음 말씀, 특히 '마태10,9-10'을 듣고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외치면서 즉시 실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던 바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 그러더니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 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1첼라22)
오늘 복음인 사도들의 파견사화를 듣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렇게 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예수님의 이 말씀(마태10,9-10)이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전념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본질에 집중하고, 부수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 복음 선포라는 본질 보다는 그외 부수적인 것들, 곧 살 집을 걱정하고, 돈을 걱정하고,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자동차를 걱정하면서 그러한 것들에 더 집착하거나 우선적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그러한 걱정들은 하느님께 내어맡기고, 복음 선포라는 본질에 집중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힘겨운 일이지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장마로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곳 고성도 어제 많은 비가 내려 곳곳이 피해를 입었답니다.
성당도 흐흐.
기도 안에서, 함께 잘 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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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내지는 이>
마태오 10,7-15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보내지는 이>
보내는 이와
맞이하는 이
그 사이에
보내지는 이가 있지요
맞이하는 이가
보내는 이를
오롯이 맞이하도록
보내지는 이는
보내는 이만
품고 가야지요
보내는 이가
맞이하는 이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보내지는 이는
맞이하는 이에게
모든 것이 되야지요
보내는 이에게는 보람이요
맞이하는 이에게는 기쁨인
보내지는 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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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다닐 때, 제가 사는 동네에 커다란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합니다. 층수가 자그마치 15층, 높아서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는 고급 아파트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15층 하면 그렇게 높다고 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높은 층수였습니다. 이 아파트가 세워지고 입주가 시작되면서 친구들과 아파트로 놀러 갔습니다. 이 아파트에는 근사한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흙바닥에서 고무공 가지고 놀았던 당시에 이 놀이터는 신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몇 번만 들어갈 수 있었고, 얼마 뒤부터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세워지면서 우리의 아파트 입장도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우리 집도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아파트 내에 외부인이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주민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아파트 단지 내 정원만 개방해도 굳이 공원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것’이라는 생각, 남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의 부재가 중복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마음, 나눔의 마음이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심이 우리를 계속해서 갈라놓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이나 고을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저를 털어 버려라.” 발밑의 먼지를 터는 것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결별의 뜻으로 하던 몸짓이었습니다. 즉, 부당한 고을,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지 않은 고을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에 외면받을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마음, 나눔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자리를 비워나갑니다. 그래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주님을 거부하는 삶을 사십니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면, 절대로 주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랑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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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이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신부님은 행복하세요? 기도생활, 독신생활, 하느님께 구속되는 삶이 힘들지 않아요?”
정해진 시간에 미사와 기도를 해야 하고, 독신을 지켜야 하며, 교회의 장상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누구는 이를 자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를 지키는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은 신학교에 들어간 첫 해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안에서 영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의 억압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신학생 때부터 얼리어답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새로운 기계를 가장 먼저 사용해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신부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졌지요.
지금 많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처음 나왔을 때, 매스컴에서 광고가 대단했고 이를 보면서 저 역시 빨리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낭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고 싶다는 생각이, 기도할 때와 묵상할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에 생각의 자유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일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지요.
주님만이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자유를 주십니다. 세상의 것은 더욱더 자신을 세상에 구속하게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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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삶의 기본자세를 철저한 무소유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도직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아닙니까?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잠시 맡겨 주신 것이니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 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성 마더데레사)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고서는 선심 쓰듯이 주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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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관계의 힘>
-관계는 저절로 성장, 성숙하지 않는다-
“만군의 주 하느님, 우리 힘을 도로 주시고,
부드러운 얼굴을 보여 주소서. 우리가 당장 살아나리이다.”(시편80,4)
“하느님은 나의 구원자시니,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이 없나이다.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오 나의 노래이시며, 나를 구원하셨나이다.”(이사12,2-3)
아침 성무일도중 마음에 와닿은 주옥같은 성구입니다. 관계는 존재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아무리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관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밝혀집니다. ‘사람답게’ 막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분명해집니다.
며칠전 오랜만에 만난 분이 반갑게 다가왔지만 마스크에 변한 얼굴로 잘 알아보지 못했고 덤덤한 느낌이었습니다. 미안하게도 솔직히 무관無關한 관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순간 ‘아, 관계의 힘이구나! 관계도 방치放置해선 안되는 구나! 끊임없이 공을 들여야 하는구나! 관계는 저절로 성장, 성숙하지 않는다!’ 깨달았습니다.
“여기가 천국입니다!”
흔히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하며 하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외적 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형제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입니다. 관계가 좋으면 지옥같은 환경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고 관계가 나쁘면 천국같은 환경에서도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함께 살아도 서로간의 관계의 깊이는, 또 하느님과 관계의 깊이는 천차만별입니다. 태평양 깊이의 관계도 있고 얕은 시냇물 깊이의 관계도 있습니다. 참 행복은 관계의 깊이에 달렸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둘이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제 애송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세월이 지나 아무리 반복해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 바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날로 깊어지는 하느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나홀로 하느님과의 관계는 추상이며 환상입니다. 형제들과 더불어의 관계와 함께 가는 하느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섬이 아니며 혼자만의 구원은 없습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21년전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 옆의 고요한 얼굴의 성 요셉상을 보며 쓴 시입니다. 내면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은 그대로 하느님과의 깊디 깊은 사랑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정말 영적 성장은 이런 관계의 성장과 성숙을 뜻합니다. 절대로 저절로 관계의 성장과 성숙이 아닙니다. 간절하고 한결같은 기도와 말씀공부, 사랑 실천의 수행이 필수입니다.
-“날로
탁해져 가는 세상, 대기
날로
생명의 빛
초록草綠
깊어가는
초목草木
같은 영혼이고 싶다”-2021.7.7.
바로 어제 써놓은 시입니다. 미세먼지로 탁한 세상, 대기이지만 부드럽게 빛나는 초록빛 생명의 초목들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사랑과 신뢰 관계에 있는 영혼들의 빛이 이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암산과 초록빛 풀과 나무들을 배경한 성전이 너무 아름다워 날마다 사진에 담곤합니다. 성전에 붙어있는 제 ‘천장암(天藏庵;공부만 하라고 하늘이 감춘 절, 서산 천장암)’ 암자庵子같은 집무실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요셉 수도원은 아브라함 수사의 종신서원식을 앞두고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염추기경님으로부터의 친필親筆 축하편지도 반가웠습니다. 추기경님의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을, 하느님과 늘 푸른 관계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님께
종신서원 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아브라함아!”(창세22,1)
결정적으로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행복하게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축하합니다.
요셉의 해에 종신서원하심을 특별히 축하합니다.
-2021.7.5. +염 안드레아 수정 추기경 드림-
흡사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신앙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 수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날로 주님과의 깊어지는 신망애信望愛의 관계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진선미眞善美의 삶입니다.
이런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아브라함-이사악-야곱의 계보를 잇는 믿음이 그대로 요셉에게 전수되고 있음을 봅니다. 진짜 하느님의 꿈쟁이이자 쌈쟁이인 요셉의 깊은 하느님 믿음이 다음 감동적인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십니까?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얼굴을, 마음을, 말씀을 대하는 느낌입니다. 하느님과 절정의 깊이 관계에 있는 요셉이요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꿈이 요셉을 통해 완전히 실현됨을 봅니다. 이런 요셉을 능가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늘 하느님과 일치 관계에 있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3.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4.마귀들을 쫓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죄가 많은 세상이라 병도 많습니다. 주님을 만나 관계를 회복할 때 이런저런 앓는 병은 치유되고, 죽어있던 영혼들은 살아나고, 온갖 영적 나병은 깨끗해지고, 세속주의,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 온갖 이념들과 무지와 탐욕, 허영, 교만, 나태의 무수한 마귀들은 일소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지 않으니 온갖 마귀들이 득실 거립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인생광야여정중에는 셋중 하나이다. 성인이 되든지, 괴물이 되든지, 폐인이 되든지 셋중 하나다.” 주님과의 관계 상실로, 또 무관한 삶으로 삶의 중심과 의미, 방향을 잃고 온갖 마귀들의 종이 되어 괴물이, 폐인이 되어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성인, 괴물, 폐인, 악마 이 모두는 우리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주님과 일치의 관계가 이런 무소유의 삶을,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모든 것에서 초연한 이탈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으로 사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성령聖靈과 환대歡待의 도움은 든든한 최고의 자산입니다. 주님만으로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로운 사도들이요, 이들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주님의 평화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 깊어가는 영적여정인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살펴보게 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해 주시어 우리 모두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우리 함께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합시다.
“주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 생명, 저희 사랑,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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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 자세를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이르십니다.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복음 선포와 치유, 되살림, 정화, 구마 등의 활동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이 아님을 일깨워 주시는 겁니다. 애초에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 성자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나누어 받아 수행하게 된 것이니까요.
"지니지 마라."(마태 10,9.10)
예수님은 사도들이 이것저것 주렁주렁 챙기지 말고 그저 홀가분하게 떠나길 바라십니다. 교통이나 운송, 치안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당시로서는 만약을 대비한 돈, 보호를 위한 의복, 안전을 위한 지팡이 등은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지만 다 내려놓고 가라고 하십니다.
사실 자기 것이 없어야 하느님의 보호를 깨달을 수 있지요. 가난하기 때문에 하느님 섭리 앞에 겸허히 설 수 있고, 기대하지 않았던 이에게 제공받는 것에 대해 고마운 줄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사심없이 나눌 수도 있게 되지요. 자신이 빈 몸임을 아는 이야말로 거저 받은 것을 기꺼이 거저 줄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요셉과 이복 형제들 사이의 화해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창세 44,18)
요셉이 벤야민만 이집트에 종으로 남기고 돌아가라고 하자 유다가 나섭니다. 오늘 미사 독서 대목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유다는 벤야민 대신 자기가 남아 종이 되겠다고 하지요. 노쇠한 아버지 이스라엘이 요셉에 이어 벤야민마저 잃게 되면 삶의 의기마저 꺽이게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창세 44,33-34 참조)
한때 아버지가 편애한 형제를 시기하고 해치려 했던 형제들이 이제는 오히려 아버지의 편애를 인정하면서 자신을 희생하여 그 사랑을 지켜 주려 합니다. 신분을 감춘 요셉의 혹독한 단련으로 연대의식이 생겨난 걸까요? 이제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밀어넣을 때의 그 형제들이 아닙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는 하느님께서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드디어 요셉이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형들과 자기 사이에 있었던 고통의 흑역사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버림받고 미움 받았던 상처를 하느님의 시각,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통찰하고 승화한 것이지요.
요셉이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발달심리학 차원으로 보면 어려서부터 받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형제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그렇게 사랑 받은 기억이 그를 더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게 했을 수도 있지요. 거기에 더해 요셉이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과 함께 계시면서 지혜와 힘을 주시고 돌보아 주신 하느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요셉은 자기가 받은 상처를 더 큰 악으로 앙갚음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와 사랑으로 되돌려 줍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보호의 기억, 그리고 감사가 사람에게 받은 고통을 압도하고 초월했습니다. 자기가 누린 모든 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아는 이는 이처럼 벌거벗은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겸허히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는 우리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파견됩니다. 꼭 거창하게 어디 선교지를 가지 않아도,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파견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누리고 받은 모든 것을 제 것으로 착각하는 이는 늘 자랑과 공치사로 자기 영광의 바벨탑을 쌓기 바쁘지만,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은 이는 내어주고 나누기 바쁠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뭔가 남들보다 조금 더 주셔서 그만큼 윤택하고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았다면 더,더,더 나누라고 미리 채워주신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 하지요.
삶에서 우리가 받은 사랑과 보호와 위로, 그리고 상처와 고통과 눈물 모두가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통찰되고 승화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 모두가 우리를 더 관대하고 포용적이며 지혜로운 하느님 사람으로 성장시켜 줄 것이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평화의 존재가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히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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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65dfwUrVCs&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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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마태 10, 8)
거져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거져 받는
우리들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느님의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실상 내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하느님의
소중한
생명이었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삶의 관계가
사랑이다.
주고받는
사랑의
실천이 참된
신앙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믿음과 나눔이다.
믿음을 놓치면
나눔은 사라진다.
믿음과 나눔이
머물러야 할 곳은
주님의 품이다.
삶의 의미는
주님의 은총에
있다.
주님의 손으로
나누고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는
믿음의
새날이다.
새날 안에서
내가 없어지면
털어야 할
욕심의
먼지조차
없어진다.
꽉 쥐고 있는
것을 놓는 것이
건강한 평화의
힘찬 발걸음이다.
가벼워야
더 자유롭다.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나누어야 할
것들이다.
막힌 곳을
뚫어주시는
그리스도의
대자유이다.
그리스도는
자유롭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거져 받은
오늘이며
거져 받은
평화이다.
거져 주어야
할 삶의
나눔이다.
삶이
새롭다.
++++++++++++++++++
(2)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 10)
무거운 짐을
내려놓습니다.
주객전도의 시간을
멈출 때입니다.
물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물건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우리의
삶입니다.
집착하는 물건을
비워내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첫 시작입니다.
잡착하고 있는
이 마음이
바뀔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집착과 믿음은
내려놓음에서
새로운 길을
만나게 됩니다.
새로운 길이란
복음의 길입니다.
복음의 길이란
집착과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믿음은
내려놓음이라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내려놓아야
주님께서
써 내려 가실
여백이 생깁니다.
우리의 여정에서
기대어야 할 믿음은
지팡이가 아니라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필요한 것은
맡겨드리는
여백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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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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