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안그런척 하면서도 왠지 모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나보다. 약자의 편에서는 버릇 절대 강자는 자신들의 반이라고 생각하는 피해의식 그래서 백제를 가장 온건히 보고 고구려의 패망을 아쉬워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일제식민이었던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세뇌가 아니었겠는가? 온전히 물들었던 세뇌자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3대는 지나야 하지않겠는가? 이제 60년이니 30년남았나보다. 그런데 요즘은 예전보다 시대의 흐름이빠르다고하니깐 좀더 앞당겨질지 기대는 해본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우리의 역사에서 고구려는 그냥 고구려였다. 오직 전라도 경상도의 엉뚱한 정치적인 감정부추김으로 인해 백제의 피해의식이 온 나라에 이상한 동정표를 가지게끔 했었다. 그런데 얼만전 부터 중국의 생뚱맞은 동북공정으로부터 갑자기 고구려까지 국민들의 동정표를 얻게됨으로 신라는 낙동강 오리알신세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정작 자신들이 죄다 신라의 후예들이면서도 잘못된 역사인식에 의해 이를 알지못하고 누워서 침을 뱉고 있는 것이...
지금 백제의 성씨을 온전히 타고난 사람이 이 나라에 몇이나 되는가? 또한 고구려의 성씨을 온전히 타고난 사람은 또 몇이나 되는가? 일제 때 얻어 걸린 호족초본과 그 빌미로 줍게되었던 족보로인하여 돌쇠나 마당쇠와 같은 상놈과 천민들이 대를 이어 상전을 모셔야했던 일상에서 갑작스리 성씨을 얻은 탓인지 도무지 주제파악도 안되고 또 괜시리 재발이 저려서인지, 먼 꺼리도 아닌 것에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 사사건건 생뚱맞게 시비를 일삼는 것이 버릇이된 듯하다. 특히 요즘 잘나가는 놈들의 대부분이 예전에 더럽게 못나가던 놈들이 대부분이다. 인생은 돌고도는 것이라 참으로 잼있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신라와 당의 교역이 통일신라에서 비로소 시작되었을까? 신라가 한강유역을 찾이하고, 당과 국경을 접하게 된 상황 (절대 지금의 황해를 마주보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배는 있을 지언정 당의 배는 없다.)
당시 고구려를 넘보았던 수가 신생 당에 의해 망했다.
그런데 참으로 생뚱맞을지 몰라도 문득 이런 생각이든다. 왜 고구려와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의 활동무대에 위, 연, 촉, 진, 한, 월, 오, 수, 당, 금, 송, 원, 왜, 명, 청 등이 있었을까? 그런데 왜 그런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우리 역사서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 이라 표현하여 사용했을까? 누구나 알듯이 전쟁과 란은 엄현히 다른다. 625도 전쟁보다는 동란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
왜가 순식간에 일본으로 바뀌어버린 것을 우리는 그냥 담담히 넘겨버린다. 그리고 저 외자들의 역사가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엄청길게 바뀜을 그냥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 버릇에 지금도 너무나 쉽게 역사가 꾸며진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특이하게 왜를 구성햇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과연 다 일본으로 갔을까? 아니면 지금의 화교들의 시초가 되어 동남아 등지에서 거상이되었는가? 그들이 근새에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받아들이자 주산군도로 들어가 제를 오렸다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왜의 후손임을 암시하지않는가?
왜가 나라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외자 위, 연~명, 청은 조선의 일개 제후로 역사의 무대에서 떨쳐일어나 잠시 머물다 사라진 효웅들의 후손들이었는가? 그러한 효웅의 역사를 조선의 빈틈을 타서 역사속에서 동격으로 혹은 그 상위에 다 올려 기록한 것인가?
수를 쇄약의 기로에 서게한 후 신생 당에 의해서 패망케한 고구려 그런 연후 그 성리감에 도취된 고구려는 주변국(백제와 신라, 특히 신라)의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했을 것이다. 평형을 유지하던 상태에서 그 한쪽이 치우치게 되면 지반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당시 한강유역을 도모했던 신라가 가장 큰 위협을 느낄 수 밖엔 없는 상황이었음은 자명하다. 국경을 인접한 백제도 적이고, 고구려도 적일 수 밖엔 없는 상황에서 한강유역을 찾이하게 되면서 인접하게된 당에게 신라는 무엇을 생각하게되었을까? 그리고 과연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신라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었이었겠는가?
당시 신라의 성장을 가만두고 봤을 고구려도 아니었고 백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을 했고 그러한 틈에서 신라는 살기을 도모했다. 당시 고구려로가서 타협점을 찾았으나 그 타협점이 조율되지않았기에 당으로간 것이다. 굴욕은 전쟁을 의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은 수를 패망시키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고구려와 반할 수 밖엔 없는 상황이다. 하나의 정당한 나라였다면 공존을 선택했을 것이겠지만 오히려 망하게 한 수의 보복을 도모한 것은 당이 나라가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라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추측컨데 수와 당은 단지 무능한 우두머리만 바뀐 같은 체제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마도 고구려 연방의 한 지역에 속한 수가 그 대표를 바꿔 당이 된 상황에서 신라는 당을 부추기든지 아니면 연합을 시도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수 밖엔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는 충분히 백제는 요리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를 상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의 군사력을 지원받고 당의 낙후한 기술을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백제를 치면서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되는 도움도 주지못하는 당의 군사력을 확보하므로 고구려를 견제했고 그로인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고구려의 자발적인 붕괴를 얻게 된 것이다. 고구려를 백제보다 먼저 공략했다면 고구려는 절대 발해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흑치상지와 같은 백제의 저항군이 있었을진 몰라도...
이렇듯 당시 수나 당은 별볼일없는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활동무대는 대륙의 변두리 네팔이나 미얀마 등 대륙의 서쪽과 중동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당과의 합작품이된 삼국통일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야심만으로 보아넘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생사와 결부된 선재공격이라고 보여지는 면도 다분하다.
이는 어줍잖게 체계화되지않은 당이 신라에게 원병을 보냈다고 해서 삼국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했고 또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일격에 배척할 대안도 갖추고 있었던 신라가 어찌 얍삽한 야심가들의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신라가 당과 연합하면서 당이 좀더 역사속에서 오래갈 수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 나라의 면모로 바뀔 수 있었다는 것이 신라의 실수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후에서도 대륙에서 여전히 외자들이 이어지는 것을보면 조선과 고려의 세력권하에서도 일게 효웅들의 세력화된 집단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효웅들의 세력이 초기와는 달리 매우 체계화를 이루게되므로 지금 역사를 보는데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게 된 요소라고 본다.
역사의 서술은 후대에서 가필되고 수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오로지 그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 낼 수 있는가에 따라서만이 역사의 진실을 겨우 엿볼 수 있을 뿐이 아니겠는가?
같은 기록도 해석하기 나름이며 받아들이는 자들이 많으면 엉뚱한 해석도 역사가되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