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역사학도
Can one be rewarded a half million dollars by the government just for beating
policemen? Such extraordinary things unlikely to happen in most other countries.
But this abnormal and strange thing actually happened in South Korea, and that
in the name of democracy. This is why we need to know the true story of the
Kwangju Uprising as we are approaching its30th anniversary.
경찰을 때린 댓가로
정부로부터 수억원 대의 보상금을 받는 일이 가능한가?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에서는 그런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정상적이고도 이상한 일이 한국에서 실제로 있었는데, 더구나 민주주의를 팔아 그런 일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광주사태 30주년을 맞이하여
광주사태의 참 이야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이 아래에 광주사태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보는
외국인들은 전경 혹은 군경이 시위 혹은 폭동을 진압하러 가는 장면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국인들은 진실은 그 반대임을 안다. 이 사진은
시위대 혹은 폭도들이 군경을 공격하러 가는 장면이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들의 혼동을 일으키는가? 외국에서는 시위대가 전경 복장을 하고 군인의
총을 드는 일이 없다. 광주사태가 광주사태인 이유는 그런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시위대가 순경의 복장을 강탈하여
착용하고 군용트럭을 강탈하여 타고 다니는 것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하는가? 우리가 광주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법치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런 몇가지 비정상적인 일들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여기 아래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도대체 저 트럭 위의 무장단체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한국을 잘
모르는 어느 외국인은 저 무장단체를 군인으로 보고 보도하거나 수기를 썼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 무장단체를 군인으로 착각할 때 광주사태는 왜곡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민주화운동가들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러나 아직 우리가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문제가 있다. 탈북군인들도 봉기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저 무리 중에 끼어있었다고 말하고, 광주시민들도 도대체 저 무장단체는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무장단체를 우리가 민주화운동가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더욱이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되었다는 문제가
있다. 해방구의 일차적 의미는 적화통일 기지이다. 좌익이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남로당이 남한 곳곳에 해방구를 설치함과 동시에
북한의 남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 윤씨들이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 주역이었는데, 그 중 윤순호 씨에 대하여는 "그는 해방 광주에서 윤
열사의 권유로 「투사 회보」를 제작했고 마지막날 밤에 총을 들었다"는 표현이 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9.html ). 그리고 광주공원 광장을 해방
광장이라고 불렀다 (광주매일『正史 5 ·18』특별취재반 저, 正史 5·18 121 쪽).
광주에 대한민국 정부 통치를 거부하는
해방구가 설치되었을 때 누가 해방구를 설치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광주사태 때 일개 공작조를 지휘하였던 북한군 534 특수부대 지휘관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였던 탈북여성은 공작조의 두가지 임무를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80쪽).
북한에서는 이미 1982년에 5.18연구도서가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란 책명으로 출판되었는데,
실제로 남한 주사파의 기원이 광주사태로 거슬로 올라간다. 이 책 3장 "영웅적 광주인민봉기의 력사적 의의"는 광주사태를 "조국통일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한결같은 념원과 지향을 반영하여 영웅적으로 싸운 대중적인 애국적구국항쟁"으로 정의한다. 이 책은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꿈에도 소원인 통일" 혈서를 쓰고,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성명서가
낭독되었고, 그런 노래가 애창되었다 (http://cafe.daum.net/issue21/3Fdk/4676
).
1980년 5월 16일 광주에서 전라남도 민족·민주화성회가 거행되었는데, 이를 5.16 화형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화형 대상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만약 김대중이 죽은지 몇달 지난 지금 애국시민들이 김대중 화형식을 거행한다면 김대중 지지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5.18측에서는 5.16 화형식이 평화시위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만약 지금 김대중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평화시위라고 말하면
납득하겠는가? 경제 건국기의 주역들을 화형에 처하는 것은 역사논리의 폭력이다. 성조기를 붙태우면서 평화시위했다고 말하면 미국 국민들이
납득하여주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5.16 화형식이 던진 끔찍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더구나, 5.16 화형식에는 광주의 시위대가
유신잔당이라 부르던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부정하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5.16 화형식의 상징적 의미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 전복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성명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란 구호로 끝맺음한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1130.html ). 당시 학생이었던 우리보다도 북한에서
오히려 광주사태를 그 시작부터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정보가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체적이라는 사실은 윤기권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윤기권은 1991년 2억원의 보상금을 수령한 후 월북하기 두 해 전이었던 1989년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해방 기간 동안)YMCA에서 저녁이면 모여 앉아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직접 일어나서
질문도 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우리 나라를 말할 때 남한만을 말하는데 실질적으로 삼천리 강토 전부 우리나라가 아닙니까?> (송기숙
1990년 편저 『광주 5월 민중 항쟁 사료 전집』)
광주사태 기간 동안 시민군이 날마다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나, 북한자료가 그렇게 말하며, 지금 5.18단체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하는 성명서와 시민군 증언록이 그
사실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 때 광주의 무장시민군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었다. 우리도 통일을 원한다. 그러나 어떤
통일을 원하는가? 우리는 분명하게 적화통일을 반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군 윤기권이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을 지지하였었느냐 반대하였었느냐의
문제이다. 도대체 그가 원하는 통일이 어떤 통일이었기에 2억원의 보상금 수령 후 월북하였는가?
아래에 캡쳐된 윤기권의 증언은
광주경찰서가 광주향토사단에 지원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5월 18일 오후의 급박한 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사건 전개 순서를 관찰해 보라.
평화 시위 도중에 공수부대가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순경들이 인질로 납치되니깐 광주경찰서가 광주향토사단에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고, 광주향토사단도
예하 부대인 7공수 33대대 동원령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 앞에서 우리는 윤기권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었음을
보았다.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통일을 윈했던 것인가? 그는 "파출소를 쳐부수고 최규하 대통령 사진을 떼어낸 다음 짓밟아버렸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가원수에 대한 그의 입장이요 태도였다. 그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는데, 최규하 대통령 사진을 짓밟고 광주경찰을 인질로 납치한 상태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무엇이 그의 국가관이었는가?
윤기권은 그의 증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또한 민중항쟁이
통일로 이어지면 자신의 이익이 없게 된다는 것 때문에 민중항쟁을 탄압하는데 동조한 미 제국주의자들도 뉘우치고 물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순순히 그렇게 하기란 만무하다. 지금 그들이 그대로 집권하고 있는 이상 5·18의 진상규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방법은 온 민중이
반독재투쟁에 적극 동참하는 길뿐이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306&page=49
)
어쩌면 우리가 http://cafe.daum.net/issue21/3Fdk/4676
에서 보았듯 1982년판 북한의 5.18도서에서 주장하는 것과 그토록 같은 논조의 말을 윤기권이 1989년 5월에 하였는가? 주한미군이
통일의 걸림돌이라는 것이 윤기권의 반미 투쟁 논리이다. 그러면 1991년 2억원의 보상금 수령후의 그의 국가관은 좀 달라졌는가? 만약 시민군에
보상해 주는 것이 광주의 상처 치유 방법이었다면 그의 국가관이 보다 건전해지는 변화를 우리가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1년 3월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 [3월4일, 광주 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 고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월북이 민주화운동인가? 월북이 대한민국 국민이 애국하는 방식인가?
월북하면 광주의 상처가 치유되는가? ㅤㅁㅑㄴ약 그렇다고 5.18 단체들이 주장하며, 그런 시각에서 지금 광주사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크게 잘못된 주장일 것이다.
월북한지 9년 후였던, 광주사태 20주년에, 즉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기 몇달
전이었던 2000년 5월에 윤기권은 북한신문에 이런 5.18 수기를 기고하였다.
<<광주봉기의 잊을수 없는 최후의 밤/의
거자
(평양 5월
25일발 조선중앙통신)남조선 광주에 살고 있다가 1991년에 의거입북하여 현재 평양시 교수강습 및 학생답사견학소에서 지도교원으로
사업하고 있는 윤기권이 광주인민봉기 20돐에 즈음하여 <광주봉기의 잊을수 없는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의 수기를 발표하였다.
수기는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 26일 밤은 하나의 고장으로 생겨 난이래 광주가 맞은 가장 긴장한 하루 밤이였다.
전두환일당에 의해 5.17폭거가 터지자 광주시민들은 항의시위에 떨쳐 나섰다.그때 나도 같은 또래의 고등학교 동무들과 함께 시위대오에 뛰여 들었다.
파쑈광들은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댔었는데 이것은 애국시민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였다.폭도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총칼을 마구 휘둘러 댄 그들이였다.
<유신체제>의 철페를
절규한 시민들의 평화적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발톱까지 무장한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살만행을 마구 자행한 자들이 폭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는가.
사실 나는 자신이 속해 있던 시위대오가 <향군회관>앞 거리에서 처음 파쑈계엄군과 맞다 들었을 때 설마 총을 쏘랴 하는 생각이 들었
다.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였다.느닷없이 귀청을 째는듯한 총성이 울린 순간 지끈하며 한쪽 팔이 떨어 져 나가는듯한 모진
아픔을 느꼈다.흉탄에 맞았던것이다.정신이 아찔해지는 바람에 나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푹푹 쓰러지는것도 미처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오는 주춤한것이 아니라 더욱 노호하였다.이런 사태가 광주의 이거리,저거리에서 일어 났다.말하자면 계엄군이 울린 폭압의 총성은 평화적시위자들을 놀래운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을 봉기에로 불러 일으킨 신호성으로 되였다.
광주봉기는 이렇게 해서 일어 났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되고 27일 새벽에 접어 들자
<도청>일대에는 긴박감이 한층 감돌았다.그러나 시민군들의 얼굴들은 근엄하면서도 랑만에 넘쳐 있었다.최후의 순간을 내다 보면서도 그
들은 투쟁가를 부르고 가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서로 고무하였다.
그런속에서 갑자기 파쑈계엄군의 도시 재진입을 알리는 다급하면서도 침착한 녀성방송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거듭 울려 나왔다.
시민군은 저마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격발기를 당기며 위치를 차지하였다.좀 있더니 땅크,장갑차의 무한궤도 소리가 울리고 총소리,폭
음소리가 정신이 나갈 지경으로 울리기 시작하였다.계엄군이 <도청>일대를 포위하고 총공격에로 넘어 간것이였다.총소리가 콩볶듯한속에서
도간도간 계엄군측에서 확성기로 투항하라는 위협적인 소리가 울려 나왔다.시민군측은 이에 <유신체제를 철페하라>,<전두환을 찢어 죽
이라>라는 구호의 웨침으로 대답하면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도청>건물에서도 항전의 총탄이 뿜어 졌고 내가 있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도 복수의 불줄기가 계엄군을 향해 뻗어 나갔다.
<도청>일대에서의 총격전은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여 아침 7시가 넘도록 계속되였다.참으로 가렬한 항전이였다.
...
그 최후의 결전으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그러나 광주애국렬사들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그것은 그간 남조선에서 <문민>의 간판을 달았던 <정권>도 나왔고 <국민>의 명판을 단 <정권>도 나왔으나 달라진것이란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이에서 얻게 된 심각한 교훈은 과연 그 무엇이겠는가.그것은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 <정권>이 열번,백번갈려도 변화란 있을수 없으며 반미가 없이는 자주도 민주도 통일도 있을수 없다는것이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기에 민중은 반미자주화와 반파쑈민주화의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 든것이다.민중은 반드시 원쑤들로부터 피의 대가를 받아 내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겨 올것이다.
나는 광주사태의 증견자로서 이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다.>>
이것이
5.18정신이라고 윤기권이 말한다. 북한도 그것이 5.18정신이라고 말한다. 2000년에 윤기권은 그의 5.18수기에서
"그들은 투쟁가를 부르고 가요<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서로 고무하였다"고 기록한다. 1982년에 출판된 북한의 5.18 도서 역시 "몸과
대오가 그대로 육탄이 되고 불덩이가 되어 원쑤들과 결사전을 벌리던 그 나날에 그들이 심장으로부터 부른 노래는 통일의 노래였다"고 기록한다 (http://cafe.daum.net/issue21/3Fdk/4676
.같은 통일의 노래를 불러도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의 통일이 목표이냐 적화통일이 목표이냐에 따라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북한의
5.18도서는 적화통일 열망이 광주의 5.18 정신이었다고 말하고, 윤기권 역시 그렇게 말한다.
윤기권은 이미 노태우 정부 시절
당시 환율로 50만불에 해당하는 2억원의 보상금을 수령했다. 만약 월북하지 않았다면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시절 더욱 두둑하게 보상금을 챙겨
100 만불 재산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더구나 세계 10위의 경제강국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이 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은
백만 불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을 감안하면 윤기권이 받았으며, 더 받을 수 있었던 보상금 액수는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월북하였는가? 지금 그는 북한에서 행복할까? 남한에서는 대통령 사진을 떼어 짓밟을 수 있었다. 그런 표현의 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 며칠간의 시민군 경력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 북한에 가면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는가? 그곳에서 좀
불만스럽다고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을 짓밟을 수 있을까? 누가 그를 북한으로 데려갔는가? 윤기권은 이미 노태우 정부 시절 당시 환율로 50만불에
해당하는 2억원의 보상금을 수령했다. 만약 월북하지 않았다면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시절 더욱 두둑하게 보상금을 챙겨 100 만불 재산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더구나 세계 10위의 경제강국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이 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은 백만 불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을 감안하면 윤기권이 받았으며, 더 받을 수 있었던 보상금 액수는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월북하였는가? 지금 그는 북한에서 행복할까? 남한에서는 대통령 사진을 떼어 짓밟을 수 있었다. 그런 표현의 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
며칠간의 시민군 경력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 북한에 가면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는가? 그곳에서 좀 불만스럽다고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을 짓밟을 수 있을까? 누가 그를 북한으로 데려갔는가? 1982년도의 북한의 5.18도서를 보면 북한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민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군이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 5.18도서를 편저한 조국통일사는 어느 시민군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고,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광주사태 발생 이틀 전 5.16화형식 때 낭독된 성명서와 윤기권의 증언은 실제로 그런 발언, 그런
노래들이 광주사태를 특징지었음을 입증한다.
누가 윤기권을 북한으로 데려갔는가? 그리고 윤기권은 언제부터 북한세력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북한의 5.18도서와 윤기권의 증언은 광주사태 당시 북한세력이 윤기권 등 핵심 시민군의 일거일투를 주시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광주의 소설가
전용호가 안기부라는 5.18논객의 코믹
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
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