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인의 지력을 꽁꽁 묶어놓았으며 아주 효과적으로 활력을 압살해버렸다. 모든 사회성원은 묵직한 쇠고랑이를 찬 죄수나 다름이 없었다. 청조말기 외국 관찰원들의 말처럼 지극히 무감각하고 또 지극히 인내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중국력사를 뒤로 번질수록 인문적관심은 점점 먼지가 오르고 고귀, 인자, 관용, 존중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은 점점 희소해진다. 이를 대체한것은 의심, 자사자리, 잔인과 비렬함이다. 주 원장의 아들 주예가 황위를 탈취한후 적의 딸들을 기생방에 보내여 륜락녀로 전락시켰다. 하루는 태감이 그에게 한가지 보고를 올렸다. 즉 그 기생들은 하루에 20여명 남성들의 유린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어린 륜락녀가 임신을 했다면서 그믐날에 애를 낳았는데 그녀에게는 이미 세살이 되는 딸애가 있다는것이였다. 주예는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애들이 크면 돈을 바가지로 끌게 되겠네."
명조후기 태감 위충현은 조정내의 기형적인 권력 변천중에 명나라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도박과 음주를 내놓고는 다른 재간이라고는 없는 이 문맹, 망나니가 명나라 천하를 흐릴대로 다 흐려 놓은것이다. 그런데도 그 많은 한림학사, 진사 공경대신들이 다 그의 발밑에 꿇고앉아 그의 수양아들로 되였다.
상기 분석은 아주 굵은 선으로 언급했으며 감성화된 분석이다. 성숙되지 못하고 세밀하지 못하며 전면적이지 못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지는 따로 증명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그 어떤 생물의 상태던 다 그 기본유전자가 결정하는것과 같이 중국 국민성의 모든 부정적면의 표현은 다 길고 긴 중국 력사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다.
한때 피가 끓는 인의지사들이 사회의 각가지 페단을 간과할수 없어 한몸을 내던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왕안석 변법으로부터 장거정 개혁, 그리고 강유위의 유신에 이르기까지 개혁가의 끝장은 거의 다 철저히 실패하여 목숨도 건지지 못한 눈물겨운 사실이다. 하긴 이들의 개혁이 사회전진을 다소나마 추동한것은 사실이다.
폭력과 독재앞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장렬한 항쟁을 진행했다. 중국력사상 세상을 뒤엎는 대 봉기가 수없이 많았으며 하나 또 하나의 독재왕조를 뒤엎었다. 그러나 반항이 아무리 완강하고 아무리 장렬하다고 해도 최종 정복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수없이 기발을 내들고 기의했다가 피로 강물을 물들이고 인구가 거의 절반이나 감소되는 대가를 치렀지만 인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를 바꿔오지 못했다. 독재제도는 외려 더 엄밀해지게 되였다.
때문에 아편전쟁후 중국을 찾아 온 서방관찰가들은 자기들이 본 경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와같은 인내력은 중국에서 본 가장 비참한 경상이다. 부자들은 먹을것이 너무 많아 먹고 먹어도 다 먹지 못한다. 그래도 그것이 모자라 또 식품을 탈취하려면 얼마든지 탈취할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에는 헤아릴수 없는 사람들이 묵묵이 굶어죽고 있다. 중국사람들은 이와같이 괴상한 일을 너무도 많이 보았기때문에 아사현상과 부자들의 탈취에 무감각해지고 말았다."
외국인이 이상하게 생각하는것은 재난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리재민들이 "단합하여 지방 관원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이 고난에 빠진 리재민들에게 무엇 때문인가고 반복적으로 질문했다. 그들이 들은 대답은 "두렵다"는것이였다.
중국인 국민성격 연혁궤도(3)
중국력사상 벼슬길에는 력대로 저명한 "청렴관리 도태률"이란것이 있다. 청렴관리는 벼슬길에서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그 대신 탐관오리들은 외려 물을 만난 고기와 같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공무에 집착하는것이 아니라 어지간히 지나칠수 있으면 지나치려 한다. 중국인들은 중용을 숭상하고 원활함을 따진다. 뿔이 없는 사람만이 많은 장면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좋은 운수를 만나게 된다.
일부 중국인들은 흔들림 없는 신앙이 결핍하다. 이것은 중국이란 이 무대가 몇천년이래 렬근적인 경쟁의 무대였기때문에 이 무대에서 생존하려면 맘이 못되고 의리를 지키지 않고 안속과 겉이 다른, 이를테면 류방과 같은, 주원장과 같은, 자희태후와 같은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충분한 연기가 있어야 하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더 인의를 지키는것처럼 연기한다. 천진하고 인자한 사람은 언제나 참패를 면할수 없다. 체면을 너무 따지는 항우처럼, 성현의 책을 제대로 읽은 건문황제 주윤문과 같은 사람들은 다 실패의 쓴맛을 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제왕들의 무치한 표현과 파괴적인 행위로 3강 5륜의 효용이 실제상에서는 일찍부터 파산된것이다. 우리는 력사상 너무도 많은 기편을 겪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것도 쉽게 믿지 않는다. 또한 서로 상호간의 신임도 없다. 황제는 공신들이 황위를 탈취할가봐 의심이 태산같았다. 때문에 관건적인 시각에는 공신들을 살해해야 속이 편안해 했다. 지어는 가장 인자하다는 황제인 리세민도 현무문에서 자기의 형제들을 살해한후 화근을 송두리채 뽑아버리려고 그들의 아들까지도 다 살해했다.
우리는 합작능력이 결핍하다. 친구간 합작해서 사업을 하다가도 나중엔 돈 때문에 서로 반목이 되여 소 닭보듯 한다. 서로 상대방이 더 먹지 않았는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봉건 대가정은 암투와 시기로 충만되였다. 때문에 중국인 한 사람은 룡과 같지만 중국인 세사람이 모이면 불과 하나의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구가 류행되고 있는것이다.
로신의 말과 같이 중국력사는 두가지 시대밖에 없었다. 한가지 시대는 노예로 되고싶지만 노예로 되지 못하는 시대이고 다른 한가지 시대는 잠시간 노예로 된 시대이다. 과거 중국인들은 그 누구도 당당한 집주인이라는 감각이 없었다. 이 국가는 타인의 사유재산에 불과했다. 그는 타인의 노예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 아낄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 뜨락에 있는 물건을 아끼면 된다. 울타리밖에 있는 물건을 두고 사람들은 왕성한 파괴욕을 갖고있다. 가로등은 자기의 일에 아무런 방애가 없다. 그러나 그 가로등을 꼭 파괴하여야 속이 풀린다. 아름답게 구축한 광장을 누가 맘대로 지저분하게 어지럽혀 놓아도 마음 아파하는 심정이 없다.
허망한 ‘국민성개조’
중국에 오기전 서방사람들의 두뇌에는 중국에 관한 아름다운 상상을 가득 담고 있었다. 푸르토이는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총명하고 가장 례절이 있는 민족’이라고 인식했다. ‘중국을 모든 민족위에 놓아야 한다.’ 유럽에 전파된 중국 서적에 근거하여 상상한 그들은 중국이야말로 물산이 풍부하고 문화가 발달하고 현명한 황제가 국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례절 바르고 도덕이 고상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편전쟁때 군함을 타고 중국에 온 서방사람들의 눈에 보인 상황은 그들을 너무 놀라게 했다. 그들이 본 중국의 도시는 너무도 더럽고 그들이 본 중국의 보통사람은 전설에서 알게 된것처럼 그렇게 문명하고 교양이 있는것이 아니였다. 식민주의자들은 그 즉시 고개를 번쩍 쳐들고 서적을 통해 함부로 중국인을 추하다고 력설했다. 중국인들은 마치 족쇠를 찬 범인들이나 다름이 없다고 평가한것이다. ‘뇌력이 쇠약해졌고’ ‘창조력이 결핍하고’ ‘리기심이 강하며’ ‘옛것에 물젖어 있으며’ ‘리지가 혼란하고’‘시간관념이 없으며’ ‘무슨 일이든 얼버무려 버리고’‘동정심이 없으며’‘ 거짓말을 잘하며’‘신용을 지키지 않으며’‘속과 겉이 다르다’고 제멋대로 평가했다.
중국인 성격에 관하여 심입해 연구한 전도사 밍은버는 중국인들과 30년간 접촉한후 ‘중국인들의 다방면 수요중 가장 절박하게 수요되는것은 하나인데 그것은 다른것이 아니라 인격과 량심이 무엇보다 먼저 수요된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중국 국문이 점차 개방됨에 따라 점점 많은 선지선각의 중국인들이 국민성문제를 의식하게 되였다. 그들은 자아를 반성한 결과 실망하게 되였다. 그 실망은 외국인보다 더 절절했다. 때문에 분석과 비판도 외국인보다 더 격렬했고 더 날카로왔다. 엄복, 양계초, 손중산으로부터 로신, 호적 그리고 당대의 백양, 용응대 등은 많은 사실을 렬거하여 분석을 진행했으며 한세대 또 한세대 내려오며 대성질호했다. 그들은 약속도 없이 똑같이 ‘국민성개조’라는 슬로건을 내들었다. 우선 먼저 제도를 개조하여야 하느냐 아니면 우선 먼저 사람을 개조하여야 하느냐 하는 선택앞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중국인들이 공인하는 국민성개조의 기수인 로신은 1925년에 "일후 가장 요긴한것은 국민성을 개조하는것이다. 그러지 못할때 독재든, 공화든 혹은 무엇이든 간판은 바뀌여졌지만 물건은 변함이 없을것이다. 이것은 전혀 통하지 않는것이다."라는 저명한 언론을 남겼다.
그 어느 세대 사람들의 시각에서도 중국인 국민성의 렬근성은 모든 문제의 죄수로 보였다. 모든 중국인들이 다 뼈까지 바꾸어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해야 중국은 현대화의 각종 제도를 추행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때에 가야 중국은 부흥할수 있으며 강대해질수 있다는것이다. 그렇지 못할때면 그 아무리 좋은것이라고 해도 중국에 들어오면 다 원래 면모가 변한다는것이다.
하다면 어떻게 해야 탈태하고 환골할수 있겠는가? 전도사 밍은버가 제출한 대책은 기독교 교리에서 출발한것이다. 중국인을 방조하여 성실한 품성을 길러내고 리타정신을 수립하고 견정한 신앙을 건립한다는것이다. 량계초와 같은 구식의 개혁가는 ‘신민설’을 제출했다. 매개인의 의지력에 힘입어 자기 두뇌중에 루적된 천년오물을 씻어낸다는것이다. 로신과 진독수 등 격진주의자들은 전통문화를 전반적으로 쓸어내고 ‘중국서적을 읽지 않고’ 국민성이 서식할수 있는 문화기초를 파괴한다는것이다.
조기에 모택동도 국민성을 개조하는 운동중의 위대한 투사의 한사람이다. 그는 일찍 청년시기 철저하게 국민성을 개조해야 중국을 구할수 있다고 인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다.
국민들은 페단을 점철한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사상이 너무 낡았으며 도덕이 너무 파괴되였다. 우리 나라의 사상과 도덕은 위선적이고 진실하지 못하며 허망하고 내실이 없다는 두 마디로 개괄할수 있다. 5천년간 유전되여 온 이 국민성은 그 뿌리가 너무도 깊다. 때문에 거대한 힘이 없이는 이것을 정돈하지 못한다.
그러나 근 백년간의 우렁찬 국민성 개조운동이 거둔 성과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 량계초가 림종시에 본 중국은 그가 출생했을때의 중국보다 사람들에게 실망을 더 실어다 주었다. 로신은 국민성을 개조하는데 거의 신심을 잃고 절망의 맘을 안고 세상을 하직했다. 현대사에서 국민성에 대한 개조는 외려 상반되는 효과를 생성했다. ‘반우파’운동, 문화대혁명은 사람들의 상호신임을 진일보 훼멸했다. 그리하여 서로 의심하고 서로 경계하는 정도로 발전했으며 리상, 숭고, 순결 등 단어를 숭상하지만 멀리하게 했다. 중국인들의 도덕 자질은 신중국 건립이래 ‘문화대혁명’중 가장 크게 추락되였다.
개혁개방후 현대화행정에서 중국이 봉착한 핵심문제는 점점 더 민족성과 관련된 문제로 표현되고 있다. 국민자질, 관원자질, 신앙위기, 도덕위기, 성실위기, 탐오와 독직습관, 공덕결핍, 내부암투 등 문제가 돌출해지게 되였다.
비록 경제성장속도는 자랑할만 하지만, 비록 중국이 날따라 몰라보게 변하고 있지만, 비록 중국 부분지구는 이미 ‘현대화’에 진입했지만, 그러나 일부 보도를 보면 우려가 없지 않아 있다.
2002년 8월 31일 ‘제로만보’의 소식에 따르면 어느 한 현의 브로커 리씨가 소형 화물차를 몰고 가다가 한 로인을 다쳤다. 리씨는 그 로인을 구렁창에 처넣고 죽든 살든 관계치 않고 달아나버렸다. 그 화물차에 같이 탄 10명 일군은 그짓을 보고도 덤덤했다. ‘생활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9월 2일 호남 유양의 한 16살 소년이 PC방에서 5명 소년에게 칼질을 하여 죽였다. 그가 칼질할때 수십명이 곁에서 구경했다. 방관자들은 마치 폭력영화를 보듯 한 사람도 경찰국에 신고전화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심양시 모, 마 대사건이 발생한후 심양시 시민들은 그 탐관을 증오하는것이 아니라 돈을 제 호주머니에 넣었다 하더라도 백성들을 위해 일 하나라도 한 탐관은 괜찮다고 했다. 돈을 탐오하지 않았지만 그대신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한 사람보다는 낫다고들 했다. "그들이 비록 죄를 범했지만 그래도 심양시민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큰 탐관이 아니라면서 관원들중에서 그래도 비교적 청렴한 편인데 재수가 없어서 걸렸을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이 자주 당신의 귀에 들어갔을때마다 당신은 자연 로신이 언급했던 ‘구경군 심리’를 련상했을것이다. 지금의 구경군은 로신이 비평한 구경군보다 더 랭담하고 삭막하다고 말할수 있다. 로신선생이 아직 생전이라면 지금 중국인들의 정체적인 도덕자질에 관해 어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지 알수 없다. 로신은 ‘어린이를 구하자’라는 호소를 또 한번 터칠런지도 모른다. 때문에 신문지상에서는 상기 사실에 대한 절망스러운 비평을 가했다.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있게 된것이다.
백여년의 실망을 루적한 결과 이와같은 착오적인 결론을 유출하게 된다. 중국인의 렬근성은 천하 가장 완고한 사물이다. 모든 중국인은 태여날 때부터 이미 ‘려과성 바이러스’를 휴대하였으며 한평생 이를 치유하지 못한다.
같은듯 하면서도 같지 않은 한국인(1)
필자는 청해성 룡양협에서 처음으로 황하상류를 보았다. 천여리를 흐른 황하는 여전히 밑바닥까지 볼수 있었다. 너무도 맑고 푸르렀다. 나는 경이감을 금치 못했다.
원래 황하도 이처럼 맑은것이였다는것을 새삼스레 뉘우친것이다. 황하는 그러나 하류로 내려올수록 척박한 토지와 만나게 되고 지류가 많을수록 누렁물로 변하고 만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탁류로 된것이다. 중화민족도 그 상징물인 황하처럼 기나긴 력사가 중화민족을 초췌해지게 만들었으며 많은것이 고대처럼 그렇게 순결하지 못하게 만든것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즉 한국인은 황하 상류의 물을 베여가서 한강에 주입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였다. 물길은 길지 않지만 급하고 편벽한 벽골을 타고 흐르는 한강 대부분 물은 여전히 맑고 푸르다. 바다에 흘러드는 입구에 가서야 약간 오염되였다. …… 한국인들과 초보적인 접촉이 있다면 당신은 한국인들에게 우리 중국 춘추시대 인물들의 기질이 있다는것을 발견할수 있다. 그들은 단순하고 솔직하며 굴강하고 생명보다도 의리를 더 중히 여기는것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그들의 본성이 별로 오염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선반도의 력사는 그 원류를 중국과 갈라놓을래야 갈라놓을수 없다.
‘사기’의 기재에 따르면 주왕 폭정시기 그의 숙부 기자가 대노하여 멀리 조선으로 떠나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쓰고 있다.
‘한서’에도 이와 비슷한 기재가 있다.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체할 때 수만명 연나라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조선으로 이동했다. 그중 위만이라는 연나라 두목이 기자 후대를 몰아내고 위씨 조선을 건립했다는 기술이다.
한왕조에서 조선을 정복한 다음 조선을 한나라의 4개 군으로 편성했다.
한나라가 멸망된 다음 3국이 자웅을 다툴때 조선은 점점 중국을 리탈하여 독립을 획득했다. 그러나 조선은 력대 중국 중앙왕조와 지극히 밀접한 종주국과 번속국 관계를 유지했으며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대단히 받았다. 당나라 시기 허다한 조선의 선비들이 천리를 마다하고 중국으로 건너와 과거고시에 참가했다. 급제한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벼슬길에 나섰다.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 주희의 리학이 중국에서 류행했다. 조선도 주자학설을 류입하여 본국의 도덕표준으로 정했다. 명나라 시기 중국에는 왕양명이란 대유가 출현되였다. 조선인들은 또 양명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동질적인 사회와 비근한 문화는 두 민족간에 공동점이 아주 많게 되였다. 조선 국왕은 중국 황제들의 통치술법을 잘 배웠다. 가령 부동한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독재통지가 중국보다 더 엄밀하다는것이다. 주원장이 백성들의 무단외출을 금지하고 백리밖으로 떠날때면 통행증을 떼야 한다고 규정했다. 조선은 아예 모든 백성들에게 다 명찰을 달고 다니게 했다. 그 명찰에는 성명, 년령, 출신과 주소를 기입했다. 관청에서는 수시로 행인들의 명찰을 검사했다. 조선도 과거제를 실행했다. 역시 ‘절부’요 ‘렬녀’를 표창했으며 관원들은 역시 중국 관원들과 마찬가지로 탐오하고 부화타락했다. 그리고 선비들도 중국 선비들과 같이 보수적이며 완고했다. ……
유보운은 ‘조선의 현대화 도로’란 책에서 고대 조선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봉건주의 속박하에 광범한 인민들은 지극히 락후하고 우매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해가 뜨면 들로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산만하고 낮은 수준의 농업사회생활을 유지했다. 이것은 구 중국의 광범한 인민들과 같이 유교의 전통적인 통치방식에 습관되였다. 인정을 중히 여기고 상호간 인맥을 따지고 법률을 중시하지 않고 원칙을 따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벼슬아치들에게 예물을 주는데 습관되였으며 그들을 청해 대접하는 등으로 인맥을 맺었다. 그래야 어려움에 봉착했을때 벼슬아치들을 찾아 도움을 받을수 있다. 관원들은 이런데 습관되여 먹고 마시고 뢰물을 받았으며 술좌석에서 국가의 원칙을 팔았다. 그 누구든 관청에 인맥이 있으면 그는 편안한 생활을 누릴수 있다. 세금도 면제받을수 있다. 지어 그가 법을 위반했어도 관원을 매통하면 관대한 처분을 받을수 있다.’
이 짧은 한구절을 통해 그것이 중국인가 아니면 한국인가를 분별할수 있는가?
한국인과 중국인이 가장 크게 부동한 점이라면 한국인의 강인함과 중국인의 유연함이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기후 변화가 크다. 동서남북 민족성도 천차만별이다. 천백년이래 부단히 이동하고 융합되면서 점차 관용적이며 평화적인 민족개성이 형성되였으며 경우에 따라 적응하는 통일적인 성격이 형성되였다.
조선반도는 면적이 적다. 중국의 한 성에 불과하다. 지리환경은 중국보다 더 봉페되였다. 조선반도는 몇천년이래 점차적으로 단일민족으로 형성되였다. 조선반도는 중국과 국경선이 접경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성격기질은 중국 동북인들과 비슷하다. 다 호방하고 굴강하다. 반도와 산간지역의 봉페성으로 하여 조선인들은 그 특유의 고집스러움과 견정함이 형성되였다.
중국은 력사적으로 허다한 변고를 겪었다. 즉 억압에 의해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경력이 너무도 많았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경험이 풍부하고 타협할줄 아는 지혜를 키웠으며 림기응변에도 능하다. 이길만 하면 접어들고 이길수 없으면 피한다.
조선반도는 자고이래 외계와 교류가 많지 못하다. 력사는 너무도 간단하여 한장이면 다 쓸수 있을 정도다. 때문에 민족성가운데 단순함과 질박한 상고 유풍이 다분히 보류되였다. 그들의 피에는 원고시대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한 그 거치른 야성을 아직 보류하고 있다.
한왕조 말기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2천년간에 조선반도는 외침을 수차나 받았다. 그러나 타민족의 직접적인 통치를 접수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험과 도전앞에서 언제나 조금도 우유부단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직접적인 항쟁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굴강적인 그들의 항쟁은 응당 받아야 할 보답을 받았다. 기원 512년 수양제가 ‘수륙 113만 3800명’을 령솔하여 호호탕탕하게 조선을 원정했다. 이 수자는 거의 당시 조선의 전국 인구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수왕조는 전성기에 처해 있었으며 주변 국가들은 다 수왕조에 강복했다. 수왕제는 한나라 시기의 국토를 거의 다 수복했다. 그런데 아직 굴복하지 않은 자그마한 조선에 대하여 이처럼 거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기 때문에 조선을 굴복시키는것은 너무도 수월한 일이라고 수나라 사람들은 믿었던것이다. 중국인들의 사유방식에 따르면 조선인들의 가장 좋은 선택은 무릎을 꿇고 신하라고 승인하는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시대를 아는것이 준걸’이라는 말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란으로 돌치기’를 선택했다. 그들은 믿기 어려운 완강한 반항을 선택했다. 그들은 견성대하를 빌어 수나라대군을 물리쳤다. 참패한 수군의 손실은 거대했다. 수군은 패배의 종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수양제는 대노하여 또 다시 건국의 병력을 총 집중하여 3차, 4차 고구려를 진공했다. 그러나 수군은 조선에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했다. 수왕조는 조선을 토벌하는데 국력을 너무 소비했기때문에 후에 신속하게 멸망되고 말았다.
20년이 지난 다음 중국력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인 당태종이 솔군하여 평양성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조선인들이 전설에 전해진 이야기처럼 그렇게 완강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수군이 실패한 원인은 수양제가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18살에 기병하여 천하무적이란 미명을 받은 황제는 자기가 조선에 본때를 보여줄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도 3차나 원정했지만 3차 다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인은 마치 휘여들지 않는 철강으로 만든 칼과 같이 한차례 또 한차례의 반항을 통해 한번 또 한번 불에 달구어 낸것처럼 그 칼은 점점 더 날이 선것이다. 외족에 대하여 그들은 중국인처럼 심각한 굴욕적인 기억과 심리의 피해가 없다. 때문에 그들은 무엇이 ‘굴복’이며 무엇이 ‘참고 견디는것’이며 무엇이 ‘대범한것이며’ 무엇이 ‘원활하다’는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피는 피로 갚는다’는것을 알뿐이다. 비록 천여년간 기나긴 시일 침침한 봉건통치를 경과했지만 그들의 혈성이 마멸된것이 아니고 그들의 뼈는 과거와 같이 딴딴하고 굳세였다. 그들이 20세기 잠에서 깨여났을 때 그들의 굴강한 성격은 그 즉시 경제건설중의 분투정신으로 전환되였으며 스포츠 게임장의 박투의식으로 전환되였으며 국제 교류중의 완강불굴함으로 전환되였다.
같은것 같지만 같지 않은 한국인(2)
한국인과 중국인의 본질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구별이 있다. 전자는 전력투구하지만 후자는 대수 얼려 넘길수 있으면 얼려 넘기는것이다.
몇천년간 중국의 경제문화는 줄곧 조선에 앞섰다. 중국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구가 많고 문화가 보급되였으며 경제가 발달하였다. 사회류동성이 크며 사람지간의 경쟁도 아주 격렬했다. 중국인은 이와 같은 세련속에서 날로 교활해 졌다. 그러나 조선은 장기간 경제가 매우 락후했으며 문화도 보급되지 못했다. 보통 백성들은 장기간 페쇠된 환경에서 귀머거리가 되였고 봉사가 되였다. 때문에 사회 성원들은 중국문화의 부면 영향을 적게 받았다. 중국 변경지역의 사람들이 비교적 순박하고 자연스러운것과 같다. 조선인들의 몸에는 자연적인 본성이 더 많이 보류되여있다
중국인의 신앙은 허실이 분명하지 못하며 또한 진퇴가 허용된다. 이것은 어딘가 태극처럼 오묘하고 신묘하다. 적극적으로 진취할때는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입세적인 유교를 선택한다. 좌절을 당했을때는 불가나 도교에 집착한다. 호소하고 웨칠때는 광명정대한 례의와 삼강오륜을 부르짖지만 실제 문제를 처리할때는 또 우회적인 방식을 취해 리익과 접근한다. 중국에서는 권술에 능한 사람이 진정한 영웅인물이다. 력대 위대한 군주나 걸출한 대신들은 다 음양 두 수단에 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 손에 도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리익이란것을 꼭 틀어쥐고 있다. 이 두가지를 다 가지고 있으며 이 두가지 다 숙련하다. 이로써 립신양명을 이룩한다.
이에 비해 조선인들은 중국인들보다 너무 성실하다. 그들은 무엇이 융합이고 무엇이 영합이라는것을 모른다. 유학을 접수했으면 불교는 철저하게 포기한다. 때문에 유학이 조선에 전입된 이후 유교와 불교간에 ‘생사쟁투’의 격렬한 투쟁이 있었다. 결과 불교를 의식형태 령역에서 구축해 버렸다. 한국학자 황병태는 한국의 유학은 ‘원교지주의’와 류사하다고 평가했다. 학설의 순결성을 고수하여 조금이라고 변형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병태는 “4해에 그 어디 가든 다 정확한 주희 리학의 문화체계를 접수한후 한국 유학은 줄곧 성리학에 준했으며 엄격하게 성리학을 추종했다." "그 목적은 한국 사회제도와 인민들의 문화수요를 충당시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제도와 인민들이 마땅히 준수해야 할 영구하고 보편적인 도덕, 정치준칙이였다." "한국의 리학은 비록 중국에서 배워간것이지만 외려 중국의 리학보다 더 엄밀하고 더 정통적이다."라고 썼다.
중국에서는 진정으로 엄격하게 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학습단계에 있는 선비들이나 도학가들이다. 독서인이 일단 사회에 진입하면 ‘변통’이라는것에 물젖어 책벌레로 있는것에 만족해 하지 않는다. 도학가들은 또 사람들이 조소하는 대상이다. 보통백성들은 철리와 욕망이라는 큰 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이 습속에 따라 생존하는것이 정상상태이다.
조선력사상 전통적도덕을 파괴적으로 과도사용한 일이 없다. 조선의 각 왕조는 다 오랜 시간을 유지했다. ‘충효’라는 이 가치 리념은 한번도 조소를 받아본적이 없다. 조선사회는 경제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중국과 같은 발달한 잠재법칙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중국백성들과 같은 에돌아가는 기괴한 지혜가 없다. 고대 조선의 독서인들을 대개가 ‘립론을 따지고’‘책대로 했다.’ 그들은 주자학설의 교조적인 히학을 끌어안고 일상생활에까지 운용했다. 일거일동은 다 책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그들의 선동하에 정주리학은 조선에서 세속화되였으며 보통백성들의 생활준칙이 되였다. 현대 유학가 두유명교수는 "다른 한가지 재미있는 일이라면 유가학설의 민간화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이 유가의 모국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완전히 근거가 없는것은 아니다"라고 설파했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세번째 부동한 점이라면 전자는 급한 성미이고 후자는 침착한 성미이다.
한국인들의 빨리빨리는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에 가면 한국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말이 "빨리빨리"라는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한국인들은 무엇이나 빨리 한다. 걸음을 걸어도 빨리 걷고 차를 몰아도 빨리 몬다. 경제발전도 빠르고 그대신 겨우 신건한 고층빌딩도 빨리 무너지는 사례가 없지 않아 있다. 한국인들의 가장 큰 결함이라면 참을성이 결핍한것이다. 문제를 고려할때 자주 편격적이고 일면적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느린 성격도 세상에 유명하다. 중국에서 정부관원들이 우선 먼저 구비해야 하는 자질은 ‘성숙하고 안정’한것이다. 무엇이나 다 ‘연구연구’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문제를 보는데는 전면적이고 역동적인것을 따진다. 그리고 안정한것을 따진다. 마이시온은 "중국인들의 다른 한 장점이라면 유연한 태도이다. 중국인들이 방문을 왔을때 그들에게 오래 기다리게 해도 그들은 성을 내는 법이 없다. 신경이 마비되였으며 유연하고 참을성이 있다. 결과 중국인들은 기어코 자기의 목적을 도달한다. 중국인들은 성을 내는것은 자기 컨디션을 소모하는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구비하게 된 원인은 다른것에 있는것이 아니라 지리와 력사에 그 원인이 있다. 면적이 적고 인구가 적은 조선은 하나의 국가로서의 반응이 아주 신속할수 있다. 구름 한장이 지나가면 전 조선에 비가 내린다. 국왕의 명령은 이튿날이면 호응이 있다. 력사가 간단하고 문화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좌절에 대한 기억이 깊지 못하다. 때문에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처럼 개인의 리해득실에 끙끙 앓지 않는다.
중국의 거대한 체적은 그 동작이 빠를수 없으며 느리지 않을수 없다. 이는 마치 큰 코끼리처럼 아무리 민첩하다 하더라도 보기에는 여전히 느리게 보인다. 과거 중국의 이 한끝에서 저 한끝까지 소식을 전달하려면 몇달, 지어는 반년이상 시간이 걸린다. 황제의 명령도 십만 쾌속으로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며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 황제의 명령도 색낡은 명령으로 되고 말때가 있다. 중국은 너무도 크고 상황이 너무도 복잡하여 그 어떤 한가지 조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때면 뿌린 물을 다시 거둘수 없는 우환을 자아내게 된다. 장자는 몇천년전에 벌써 명확한 견해가 있었다. 그는 "대국을 관리하는것도 마치 작은 물고기를 료리하는것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했다. 그 뜻인즉 체적이 방대한 국가는 달달 볶을수 없다는것이다. 마치 작은 물고기료리를 할때 몇번 뒤집어 놓으면 그 물고기의 형태가 다 변해버리는것이나 같다는것이다.
이처럼 방대하기 때문에 력대 중국 정치가들의 두뇌부담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무거웠다. 그들은 나중에 게으른 사람이 취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 어떤 일이든 한칼로 똑 같이 베여 자르는 방법이다. 모든것은 옛법에 따라 그대로 하면 된다는것이다. 모순에 봉착했을 때 가장 적절한 방법은 우선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것이다. 결과 문제는 가면 갈수록 쌓이게 된다. 제도도 가면 갈수록 기형적으로 변한다. 황인우선생은 중국은 ‘수자적으로 관리하지 못한것’을 아주 마음 아파했다. 이것은 기실 수공시대 ‘수자적인 관리’가 중국의 거대함과 복잡함에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리성적 관리는 최종 유럽 소국에서 먼저 발전했지 중국에서 먼저 발전한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소국에서 먼저 신속하게 응용했지 중국에서는 아직도 한칼로 자르는 방법을 취하지 않을수 없다. 이로부터 결론을 얻을수 있다. 즉 중국의 미발달과 공구이성의 결핍, 그리고 중국인의 시간관념의 결핍과 정확한것을 홀시하는것은 다 중국이라는 이 국가의 체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볼때 우리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위대한 공적의 다른 한 일면을 보아낼수 있다.
로인과 소년(1)
중국인들은 오차물을 마시기를 좋아한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다. 오차물 한 주전자면 한 나절을 보낸다. 한국인들은 오차물을 마시는 습관이 없다. 그들은 냉수를 마신다. 추운 겨울에도 고개를 뒤로 재끼고 냉수를 꿀떡꿀떡 마신다.
중국은 한때 부유했고 존귀했다. 또 그에 못지 않게 쇠락되기도 했다. 중국은 장기간 태평성세가 있었다. 또 그에 못지 않게 헤아릴수 없는 폭정, 혼란, 재난을 겪었다. 기나긴 중국력사의 흐름은 가능하게 발생할수 있는 모든 일들이 다 발생했었다. 중국인은 문자 그대로 세계에서 견식이 가장 많은 민족이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생존지혜를 루적했다. 한 사람이 너무 늙으면 나이만큼 혈기가 죽어들고 골기가 죽어들고 모든것을 믿지 않으며, 모든것에 전력하지 않고 모든것을 천천히 추진하며 모든것을 안온하게 추진한다. 모든것은 변증법에 따른다. 장마가 지면 흙을 다져 물길을 막는다. 군졸이 오면 장군이 나서서 막아낸다.
그러나 한국인은 마치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년과 같다. 그들은 세상물정에 물젖지 않았으며 골기와 오기가 그대로 있다. 그들은 신심에 대한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으며 혈기가 왕성하며 행동이 민첩하다.
위기가 도래했을때 로인과 소년의 반응은 각기 다르다.
서방 군함의 포성은 깊은 잠에 떨어진 중국을 깨웠다. 련이어 상처를 입은 중국은 천천히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강의 길을 선택했다. 허지만 두뇌를 장기간 사용하지 않았기때문에 관절에 두터운 녹이 쓸었으며 장기간 관습이 쌓이고 쌓여 모든 자강의 길은 너무도 어려웠고 또한 고통스러웠다. 망국과 민족이 요절하는 긴급한 형세하에 중국의 거동은 너무도 무디고 연약하고 또한 우유부단했다. 시시각각 과거의 경험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알게 모르게 저절로 과거 옛길을 답습했다. 한차례 또 한차례의 타격하에 중국은 철저하게 신심을 상실했으며 원래 강인하고 완고한데로부터 취약하고 자비감에 빠졌다.
세계력사를 돌이켜 보면 그 어느 나라도 중국처럼 곡절을 많이 겪고 어려움을 많이 당하고 고통스러웠던 나라는 없다. 우리는 줄곧 문화가 그 괴수라고 력설해 왔다. 때문에 어떤 신문화를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 다투어 왔다. 장기간 ‘주의’를 둘러싼 론쟁의 수렁에 빠져 헤여나오지 못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유교문화와 우량전통을 우리는 ‘봉건’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저 멀리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수천년간 루적된 완고한 관습은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을 지지누르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한가지 사실을 알게 했다. 즉 ‘문화’와 ‘민족성’은 같은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는 하나의 관념이고 ‘민족성’은 하나의 습관이다. 이 습관은 무의식에 많이 속하는 그런 관습이다. 이를테면 코구멍을 후비는것은 관념적으로 볼때는 좋은 습관이 아니지만 때로는 손가락이 쾌감을 따라 저절로 코구멍을 후비게 된다.
1840년 중국이 놀라서 깨여난 그 시각, 조선은 아직도 중국 옆에서 잠에 떨어져 있을 때다. 중국에서 양무운동을 추진할 때 조선은 아직 잠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일본인이 조선을 합병한후에야 갑자기 놀라서 깨여났다.
일본인의 침략앞에 소년과 같은 한국인의 강렬한 자존심은 너무도 강한 자극을 받았다. 금방 당하게 된 치욕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소년 조선의 일초 일분을 지졌다. 급한 성격을 가진 한국은 드디여 총망하게 현대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정치환경과 급한 성미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했다. 한국은 실제적인 시각에서 출발하여 경제발전이라는 이 길을 선택한것이다.
한국인의 완강하고 강인한 성격이 경제건설중에 잘 나타났다. 한국인은 현대화행정에서 최대의 의지력으로 수천년간 내려온 게으른 습성을 개변하고 극복했다. ‘과거의 모든것은 이미 어제처럼 다 죽은것이다. 금후의 모든것은 마치 오늘처럼 새로 태여 날것이다.’라는 결연한 의지로 지난날의 생활습관을 개변했다. 그들은 말한대로 하는 사람들이며 또한 재빨리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다.
1961년 박정희가 쿠테타를 발동하여 번개처럼 정권을 탈취했다. 그는 철의 수단으로 한국이 독립후 10여년간 정치적으로 연약하고 사회가 혼란한 국면을 결속지었다. 박정희는 한국정부에 강렬한 군인기질을 주입했다. 그는 ‘갱생’정책을 추진했고 부패한 낡은 정부를 대규모로 물갈이를 했다. 대량의 젊은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후 10여년간 그는 한차례 또 한차례 부정비리 척결운동을 전개했으며 관원들이 커피나 마시고 무도장이나 드나들며 지나간 일본노래를 듣는것을 하루아침에 단속했다. 그는 한차례 또 한차례 조금이라도 부정비리에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인수가 얼마나 많든간에 즉시 처단했다. 독제적인 수단으로 의지력이 강한 청교도정신의 관원대오를 건립한것이다.
기타 발전도상의 국가를 보면 다 부패한 집권관료대오가 사회진보를 가장 완고하게 방해한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한국사회에 깊숙하게 뿌리내린 권위주의 전통을 리용하여 관료집권 독재수단을 통해 전국을 경제발전의 군대로 조직했다. 한국인들의 복종의식, 질서의식, 집단의식, 등급의식은 경제발전과 사회진보과정에서 거대한 역할을 발휘했다. 한국 공사는 다 군사화조직과 비슷하다. 임원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회색제복을 입고 왼쪽 가슴에 명찰을 달았다. 그리고 군사술어를 많이 썼다. ‘공업전사는 건설과 전투를 함께한다.’ ‘출국전’‘110억달러 출국고지’ 등 술어 등이 그 좋은 본보기이다. 기업가는 임직원들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시켰으며 그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효도하는것처럼 공사에 충성하게 했다. 그들로 하여금 그 어떤 렬악한 조건도 참고 견딜수 있게 했으며 저수입 상황에서도 야근, 특근하게 했다.
한국인들의 급한 성미와 근면함은 경제발전의 발동기였다. 1960년이전 한국인들은 게으른 민족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현재 한국인들은 과거와 완전히 부동한 자태로 세계앞에 나섰다. 한국인들의 걸음걸이 속도는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 홍콩인이나 도쿄인들보다 더 빠르다. 지난 세기 80년대 보통 한국인들은 다 자원적으로 야근과 특근에 참가했다. 별도의 보수를 받지 않았다. 불과 몇십년이 안되여 한국은 경제거인으로 성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빈궁한 나라가 제11위 강국으로 급부상한것이다.
한국인들의 전력투구와 조금도 에누리없는 정신은 서방을 따라배우는 과정에서 절대 대수 넘기는 일이 없다. 그들은 서방을 따라배우더라도 가장 훌륭하게 따라배워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십몇년전만해도 허다한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자동차가 미국시장에 진입한다는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그들의 구상을 조소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자동차는 이미 백만대가 넘었으며 현대집단의 자동차는 이미 대량으로 미국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한국의 핸드폰은 비록 늦게 발검음을 뗐지만 짧디짧은 몇년간 삼성의 핸드폰은 세계 핸드폰시장에서 앞자리를 달리고 있다
경제발전의 수확은 단순히 물질적인 재부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사회구조의 변화이다. 당시 박정희가 철의 수단으로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타격하여 전반 정치체제를 철저하게 개조했다. 관료기구는 과거 사회활력을 억제하던 도구로부터 경제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현대형 관리기구로 전변되였다. 과거의 ‘관본위’를 개변하였으며 ‘주의’를 숭상하던것을 개변했으며 ‘공상’적인 사회기풍을 개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학을 존중하고 리성과 개성을 존중하며 실리를 존중하는 사회정신기질을 창조했다.
로인과 소년(2)
교육이 보급되면서 한국인들의 참정의식과 참정능력이 대폭으로 제고되였다. 그들은 한국인 특유의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민주를 쟁취했으며 국가의 전도와 민족의 창성을 위해 대성질호했다. 비록 인구는 중국에 비해 퍽 적지만 민주를 쟁취하는 과정에 흘린 그 피는 중국인들의 몇배나 된다.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시위행진중 자기보다 몇배나 강대한 군경과 강렬한 취루탄앞에서 그들은 여전히 퇴각이라는것을 몰랐다. 민중의 회생과 일부 개명 정치령수들이 시대조류에 순응하였기때문에 한국은 비교적 순리롭게 권위형 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전환했다.
사회진보와 더불어 한국인들의 정신면모는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60년대이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궁한 나라의 하나였다. 한국인은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 기시를 받는 민족이였다. 량계초는 그의 '조선이 멸망한 원인'이란 책에서 조선이 멸망하게 된 원인을 조선인들의 국민성에 귀결시켰다. 그는 조선인들은 빈말을 하기 좋아하며 내부 쟁투가 엄중하며 후안무치하고 성격이 음험하며 일을 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민족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인들은 자기네도 민족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것을 승인한다.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한후 한국인들의 결함을 속임없이 제출했다. 독립정신이 결핍하고 게으르며 무위도식하려는 의욕만 넘치는 대신 창의력이 결핍하며 진취정신이 결핍하며 자사자리하며 영예감이 결핍하며 양호한 판단력이 결핍하다고 자성했다.
그는 "인민들의 결함, 이를테면 일하기 싫어하며 권세에 아첨하며 노예주의와 타인에 의거하려는 악습 등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 우리 혁명의 최종목적은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불행한 유산을 소멸하는것이다. 즉 서로 미워하고 종파주의가 엄중하며 랑비하고 혼란하며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한것 등이다."라고 설파했다.
현재 우리는 박정희의 목적이 대부분 다 실현되였다는것을 볼수 있다. 한국인들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가장 단합이 잘되였으며 민족주의가 농후하고 근면하며 자강을 강조하며 정결하고 책임성이 있는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인들의 변화를 통해 본 민족성의 개조
최근 몇년간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변소를 담론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국을 방문한 기행문은 거의 다 한국의 ‘화장실’을 취급하고 있다.
변소는 역시 중한 차이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자대로 되여있다.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이로부터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한국인들은 너무 너무 깨끗하다.’‘한국인은 정결을 아주 중시하는 민족이다.’ 이와같이 변소를 통해 민족성의 고도를 해독하는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백년전 중국 무관 섭사성이 동3성을 고찰하고 겸하여 조선을 경유했다. 그가 본 조선은 사람을 놀랠 정도로 ‘더럽고 혼란하고 란잡’했다.
백년전 중일한 3국 농촌의 변소는 같은 수준에 놓여 있었다. 모두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우에 널판자 두 장을 올려놓으면 그것이 바로 변소였다.
백년후 일본인들이 신식변기를 발명했다. 대변을 보고나면 자동적으로 온수가 흘러나와 응덩이를 씻어준 다음 말려주기까지 한다. 일본인들의 변소는 주방이나 다름없다. 향기가 풍긴다. 공예 전시실처럼 각종 꽃꽂이 등 장식품을 설치해둔다.
한국은 20세기 60년대 말에 처음으로 세척식변소를 도입했다. 몇십년 발전을 경유하여 지금은 거의 일본과 대등한 위생수준에 도달했다. 한국인은 또한 나름대로 변소를 화장실이라 개명했다. 이런 일들을 두고 중국인들이 경모를 금치 못했다. 농촌은 새마을운동을 거쳐 기본상 현대화장실을 쓰고 있다. 그러나 외진 산간벽지는 아직 옛날식변소를 쓰는데가 있다.
하다면 중국의 형편은 어떠한가? 비록 북경, 상해와 같은 대도시의 고급변소는 일본이나 한국보다 더 호화로운것이 있다.
그러나 그 광활한 농촌은 여전히 백년전의 변소와 다름이 없다. 변소는 중국인이 자비감을 가지는 원인의 하나이다. 한세기동안 외국인들이 중국을 방문하는가운데서 인상이 가장 깊은것은 물론 장성과 고궁의 휘황함이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하게 중국식변소의 악취일것이다.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중국의 변소를 자기의 글에 서술했다. '참고소식'은 그런 글을 여러번 전재했다. 중국인들이 머리를 숨길 곳을 찾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를 위해 전혀 변호하지도 못하게 했다.
중국, 일본, 한국은 개국초기 다 사회공덕심이 결핍한 사회라고 일컬어 왔다. 츠다 소우키치는 1916년 '우리 나라 국민사상에 대한 연구'라는 글을 저술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일본 국민성가운데서 ‘공공의식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한국 교육가 김재은도 "한국인의 심령 심처에 틀거지 하고 있는것은 권위주의, 리기심, 무질서주의이다"라고 설파했다.
과거 중국, 일본, 한국 3국 축구팬들이 축구를 구경할 때면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일본이 가장 먼저 구경을 마치고 돌아갈때면 서방사람들을 따라배워 자기 주변의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량호한 습관을 형성했다. 이어 절대 일본을 따라배우지 않는다던 한국인들이 일본사람처럼 처사했다.
혹 우리는 '국민성'에 관해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른바 허다한 '렬근성'이 반영한것은 전 현대화시대의 사회적성격이다. 산만하고 모래처럼 흩어져 있고 게으른것은 해가 뜨면 들로 나가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소농사회 생활절주와 적응되는것이다. 독립사고가 결핍하고 창의성이 결핍하며 낡은 틀에 따르는것은 독재사회에서 양성한 순민품질이다. 자존심이 부족하고 원칙이 없으며 동물식으로 생존하는것은 엄혹한 생존조건에 의해 외곡된 인간성이다. 이밖에 ‘단합하고 합작하고 애국하고 순결하고 개방하고 학습한다’는 우수한 품질은 모든 사람에 대한 현대사회의 요구이다. 현대사회의 고효률은 사람들에게 자아조직을 잘해야 할것을 요청하고 자아교육을 요청한다. 현대사회의 물질성취는 사람들에게 자존과 자신감을 심어준다. 현대사회의 격렬한 경쟁은 사람들의 강렬한 창의의식을 심어준다.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렬근성' 혹은 이른바 '중국국민성'을 ‘전 현대화사회성격’이라고 개명하는것이 어떤가?
우리 사회에서 번마다 비평을 받는 공덕심 결핍과 원칙부재는 전 현대화사회 체제하에 광범한 인민대중들은 아직 자기가 나라의 주인공이란 감각을 체험하지 못했으며 법칙에 대한 충분한 신임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의 기본 감각은 여전히 수천년내 정부의 관리를 받은 피동자이다. 때문에 주인이 된 자호감이 없으며 책임심이 없고 적극성이 없다. 때문에 그들은 시청광장에 아무 쓰레기나 다 버린다. 거액의 자금을 들여 광장을 건설할때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지도 않았으며 보통 시민들의 시호도 고려하지 않고 관원들의 정치공적을 보여주기 위한 공정에 지나지 않기때문에 시청광장이라고 해서 따로 진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것이다. 이른바 중국인들은 잘 참고 견딘다고 하는데 이것은 표달하는 경로가 발달하지 못했던가 아니면 반영한 문제가 제때에 효과적인 해결을 얻지 못했다는것과 통한다. 가령 효과적인 메카니즘을 건립한다면 중국인들도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할것이다. 수천년 쌓이고 쌓인 관습이 아직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것은 그 관습이 아직 생존의 토양이 있다는것을 설명해 준다.
한 사람을 놓고볼때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며 운명은 또한 역적으로 그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 한 민족으로 놓고볼때 력사가 그 민족의 성격을 결정하고 성격은 또 역적으로 력사에 영향을 준다.
한 사람이 자기 사유의 오유구역을 헤여나오지 못하거나 자기 착오의 행위모식을 개변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성격을 개변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도리로 한 민족이 사회메카니즘의 개혁이 없이 단순하게 락후한 민족성을 개변한다는것도 불가능하다. 오직 현대화 사회에서만이 '현대성격'이 생성된다. 그렇지 못할때면 아무리 큰 힘으로 사상개조를 진행한다고 선동하고 대표적인 사례로 인도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마치 모래우에 탑을 쌓는것이나 다름이 없다. 전혀 성공할수 없는것이다.
중국은 력사적으로 다재다난한 국가였다. 때문에 우리 성격중에 허다한 결함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인 몸에 '려과성 병균'은 없다. 중국인의 결함은 불치의 '렬근성'이 아니다. 말을 바꾼다면 중국인들은 자비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나아가 방기할 필요가 없다.
왕조가 수도 없이 바뀌었던 중국에 비하면 한국의 왕조는 역사는 길지만 간단한 편이죠. 그런의미에서 한페이지를 말하는 것이죠. 그이후 이야기또한 조선인은 중국같이 역사적으로(북방민족의 중국정복) 굴욕이란 걸 모른다라는 언급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네요. 또한 수군의 언급은 한국역사가들도 쉽게 놓치는 부분인
첫댓글 점입가경이라고... 기자로 부터 조선 (고조선)이 발생했다고? 거기다 한사군을 세웠고? (한사군이 있기는 한건지...) 역사가 짧아서 한페이지로 쓸수 있다는군요... 제대로 웃겨주네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이건가..
어찌됐던 고구려를 조선인으로 봤네요.. 결국 고구려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라는 간증을 해주고 계시네 이분.... 우리는 고 부분만 똑 떼서 쓰면 되겠네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왕조가 수도 없이 바뀌었던 중국에 비하면 한국의 왕조는 역사는 길지만 간단한 편이죠. 그런의미에서 한페이지를 말하는 것이죠. 그이후 이야기또한 조선인은 중국같이 역사적으로(북방민족의 중국정복) 굴욕이란 걸 모른다라는 언급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네요. 또한 수군의 언급은 한국역사가들도 쉽게 놓치는 부분인
데 이걸 언급한거봐서는 책을 대충 쓴 사람같지는 않군요..
왠지 이 게시물의 저자는 일본 기타 잇끼의 극우적 감수성과 매우 유사한 느낌을 주네요.
때놈들구라잘치는거 알잖아여 ㅋ
짱꼴라가 노인이고 우리나라가 소년? 그렇다면 저 짱꼴라들은 이제 곧 죽을 때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계속 커 나가겠네~ 좋구나~냐하하~
나의친구.....역시 화교군,,,어덯게 우리나라가 한나라 땅이란 말을..??..그리고 기자조선이 중국인이라고 ...그리고 중국인이 우리 나라를 건설했다....헉 어처구니가 없군
중국놈들생각을간접적으로 보게된는군여
기자조선은...거의 인정안하는 분위기인데 학계에서...한사군도 개소리 ㅡㅡ
허허 이사람 무슨소리를 써놓은건지...조선의 역사가 한페이지에...?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력사는 너무도 간단하여 한장이면 다 쓸수 있을 정도다.? 이것들이 뒈질려고 환장을 했나? 니네 나라 역사중 한족의 역사는 과연 1장이나 될까?
가면 갈수록 헛소리가 난무하는 글이네요 우리민족이 수천년동안 게을러? ㅡ_ㅡ;; 위에 떼놈있고 옆에 일본놈있고 편할날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나라가 게으르다고?
우리역사와 문화에 대한 중화주의적 시각이나 여러 일본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황당하지만 그밖에 일부 분석이나 사유는 참고할만 한 것 같네요.
열받네.이 짱꼴라새끼들.읽을 가치를 못느끼겠다.안읽을 거야!
나의친구 ....웃기군,,,당신도 다른사람보고 일본사람이라고 하던데 ...당신이 나보고 그런 소리할 자격있나??...화교라는 말이 그리 좀심 상하나??...역시 화교였군...ㅋㅋㅋㅋㅋ...오바좀 그만해라 쌍 소리하는것 보니 상종 못하겠군,,,,
....khs3>또라이같은 새끼야???...!!!!.....역시 저질이군....그리고 한나라 이야기는 글쓴 지나족 이야긴데 오바 하기는....당신의 입이 궁금하군,,,
력사는 너무도 간단하여 한장이면 다 쓸수 있을 정도다라.... 니네들이 한국사 배워볼래? 머리 터지겠구만.
나의친구님 ....욕쓴 리플 삭제했군요.....아무리 열받아도 욕은 하지 말자구요....당신의 인격입니다
이 양반은 고구려를 조선역사로 인정하는군.......음.
한국사는 기록이 많이 안남아서 솔직히 적은 편이죠..쩝.. 기록만 잘 남아 있다면 백제사가 고구려만큼 중시 여겼을지도 모르는데 아쉽죠..중국 역사서 보고 연구하는 형편이라니.. 훔쳐가고 태워 없애버린 x같은 외세만 아니였어도..
뭐 그래도 한페이지로 요약된다고 열 받을건 없다고 생각되네요.. 한국이 한페이지면 대부분의 나라는 몇줄이면 되고 게다가 한줄로 요약되는 미국도 잘 살고 있으니 신경쓸 말은 아닐듯..
나의친구..님은 이글을 너무도 당연하게 수긍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는 군요..이 원글을 작성한 사람의 지식수준을 알만한 글들입니다..너무 심심해서 읽고는 있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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